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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章 환사(幻邪) (4)
쒜에에에엑!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바람이 불 듯 일정한 형체를 유지하지 않고…… 유행이 부드럽게 전개된다.
누미는 치달리고 있지만 치달린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빨리 달리고 있지만 몸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다. 들어오는 호흡과 나가는 호흡이 늘 일정하다. 호흡이 일정한 것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누미는 달리면 달릴수록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뒤쫓는 사람은 없다.
비형은잠의 보호도 받을 필요가 없다.
이 상태대로라면 적벽검문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본문의 무공은 깨우침의 무학이야.’
그녀는 요즘 들어서 부쩍, 아니 거의 날마다 적벽검문의 무공을 다시 돌아본다.
적벽검문의 무공은…… 아버지, 누강이 가르쳐주던 그런 무공이 아니다.
적벽검문은 초식을 떠난다.
적벽검문은 내공을 떠난다.
무림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저 높은 하늘에 떠 있는 무공이다.
일반적으로 무공을 제대로 습득하기 위해서는 기초부터 탄탄하게 다져야 한다. 서둘지 말고 한 걸음씩 계단을 밟아서 올라가야 정상에 이를 수 있다.
적벽검문은 그런 무공의 틀을 거부한다.
계단을 밟아서는 하늘에 닿을 수 없다. 하늘에 닿기 위해서는 날개를 달고 비상해야 한다.
깨우침을 얻으면 비상한다.
깨우침을 얻지 못하면 하늘 높은 곳에서 펼쳐지는 무공을 평생 이해하지 못한다.
누강은 이런 무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가 없다. 누강이 살아가는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곳에서 시전되는 무공이기 때문이다.
누미는 요즘 들어서 그런 무공을 많이 접한다.
일검직자가 그랬고, 유행이 그랬다. 검왕이 펼쳐 보이는 모든 무공이 그랬다.
이제는 누구도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다.
쉬이이익!
누미는 편안한 마음으로 질주했다.
미공자는 길가에 앉아있었다.
‘그 사내!’
누미는 사내를 단박에 알아봤다.
사내는 무척 강하다. 검왕과는 전혀 다른 일검직자를 펼치는 고수 중의 고수다.
헌데…… 왜 긴장이 되지를 않지?
누미는 본능적으로 미공자가 검왕과는 반대쪽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긴장감이 밀려들지 않는다.
미공자는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차 한 잔 하겠소? 아니면 술. 다 싫으면 물이라도.”
미공자가 돗자리 위에 쫙 깔아놓은 다기(茶器)와 호로병, 물잔을 차례로 가리켰다.
“절 기다린 건가요?”
“그렇소.”
미공자가 순순히 시인했다.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아요. 할 말 있으면 지금 해요.”
누미는 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지금 이 거리면…… 충분히 잡을 수 있소. 잡지 못해서 안 잡는 것이 아니니 이리 와서 앉으시오. 소저에게 미운 털 한 올이라도 박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오.”
미공자가 환히 웃으면 말했다.
순간, 누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사내의 입술이 너무 붉다.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이 때문인지 더욱 붉게 보인다.
눈이 맑다. 콧날이 오뚝하다. 피부가 너무 곱다.
사내가 어쩌면 저리 고울까.
누미는 흔들리는 방심을 다잡기 위해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미공자는 분명히 적이다. 하지만 미공자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으니…… 미공자가 드러내는 호감이 싫지 않다.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끌려들어간다.
이 순간, 그녀는 또 검왕을 잊었다.
항상 이렇다. 미공자만 보면 검왕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루종일 검왕을 생각하다가도 미공자만 보면 머릿속이 텅 빈다.
미공자를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누미가 팔짱을 끼며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이 거리가 좋아요. 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길을 비켜주세요. 아니면 제가 비켜갈까요?”
미공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게 호감을 보인 여인이 많았소.”
“그래요?”
“상당히 많았지. 소저도 보다시피 내가 한 인물 하잖소.”
“어멋! 그런 말을 어떻게 자기 입으로…….”
“흠! 이런 말에 놀라는 걸 보니 농을 모르고 살아온 모양입니다.”
“아! 농이요.”
누미는 미공자와 말을 주고받는 동안 그나마 남아있던 경계심도 눈 녹듯 사라져 갔다.
미공자가 나빠 보이지 않는다.
“아까 말한 것을 계속 해보자면…… 내게 호감을 보인 여자는 많았는데, 난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소.”
“아주 심한 아부군요. 그런 말을 왜 제게 하세요?”
“소저와 만날 인연이기 때문에.”
“지금 절 유혹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그래서 이렇게 길가에 돗자리를 깔고 차 한 잔 하자고 청하는 거요.”
“차나 마시면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면요?”
“방금 전에 한 말, 괜히 한 말이 아니오. 내가 괜히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 아니오. 소저와 난 전생에서부터 맺어진 인연이란 뜻이오.”
“헛소리 그만 하시고.”
“요미검체!”
미공자가 진중하게 말했다.
누미는 미간을 짙게 찌푸렸다.
미공자가 ‘요미검체’라고 말하는 순간, 미공자가 헛소리처럼, 여인을 유혹할 때 쓰는 말투가 사실은 헛소리가 아니고 진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공자가 웃음기 지운 얼굴로 말했다.
“여인에게 요미검체가 있다면 남자에게는 사왕지체(獅王之體)가 있소. 이 둘을 하나로 엮어서 사왕요미라고 말하는데…… 들어본 적이 있소?”
누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공자가 말한 사왕지체는 물론이고 사왕요미라는 말도 지금 처음 듣는다.
미공자가 말했다.
“말로만 해서는 믿을 리 없으니…….”
그가 돗자리에서 일어섰다.
“달려보시오. 적벽검문의 유행이라는 것…… 지금부터 배워봅시다.”
“뭐요? 뭐하자는 거예요?”
“유행을 언제 터득했소?”
“…….”
“요미검체는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여건이 잘 갖춰지면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소. 사왕지체 역시 마찬가지. 소저가 유행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을 하지 않아도…… 소저를 뒤쫓다 보면 터득할 수 있을 것이오.”
“보고 배운다고요?”
“그게 사왕지체요.”
“호호호! 어디 해보세요!”
쒜에에에엑!
누미가 미공자를 경계하면서 앞으로 치달렸다.
미공자는 그녀가 옆을 스쳐 지나갈 때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안심하고 지나갈 수 있게끔 잠시 뒤로 물러서는 호의까지 베풀어주었다.
그녀가 앞으로 질주한다.
당연히 미공자가 뒤쫓아왔다.
누미는 앞으로 치달리면서 뒤를 흘깃 쳐다봤다.
쒜에엑! 탁탁! 타타타탁!
미공자가 현란한 신법을 펼치면서 쫓아왔다.
축약(縮約), 비룡(飛龍), 도약(跳躍)…… 신법에서 사용되는 온갖 요소들이 무질서하게 펼쳐진다.
유행을 뒤쫓기 위해서 최상의 신법을 펼치고 있다.
물론 누미는 미공자가 펼치는 신법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떤 효능을 지녔는지, 빠르기는 어느 정도인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감지되는 것은 있다.
‘그런 신법으로는 못 쫓아와!’
처음 한 시진 동안은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미공자는 누미를 쫓아오지 못했지만,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는 누미를 낚아채지 못했고, 누미는 그를 떨궈내지 못했다. 그만큼 본신 무공이 뛰어났다. 허나!
쒜에에에엑!
미공자가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겨우 두 시진 만에!’
누미는 너무 놀라서 안색마저 해쓱해졌다.
미공자는 도약을 하지 않는다. 비룡도 없고, 축약도 없다. 그녀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여유있게 미소까지 지으면서 달리는 것 같지 않게 달린다.
적벽검문의 유행이다.
‘뭐 저런 인간이!’
누미는 경악을 거듭했다.
유행은 적벽검문 가족들도 깨우친 사람이 거의 없는 초절정 신법이다. 수련해서 배우는 무공이 아니라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터득해야 하는 움직임이다.
그런 것을 외인이 단 두 시진 만에 시전하고 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적벽검문의 최대 신법이자 무공이 외인에게 전수된 것이다.
‘이런!’
누미는 당황했다.
유행의 기본 바탕은 평정심이다. 맑디맑은 마음을 유지해야 자연스런 흐름이 지속된다.
누미의 발걸음이 둔탁해졌다. 무뎌졌다.
딱 두 시진째, 미공자가 누미 옆에 섰다.
‘장미?’
누미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미공자가 옆에 서자 진한 장미향이 풍긴다.
여인이라면 모를까 사내가 장미향을 풍기고 다닌다는 것은…… 사내가 꼭 화류계를 들락거리는 화화공자(花花公子)처럼 느껴져서 싫어진다.
미공자가 옆으로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쉽시다. 말도 하고.”
“사내가 무슨 장미향을 묻히고 다녀요!”
누미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고 말았다.
“소저는 내가 편안할 거요. 마찬가지. 나도 소저가 편안하게 느껴지오. 소저가 느끼는 감정과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먼저 말해두고.”
그런 것이었나?
누미는 미공자를 볼 때마다 편안함을 느꼈다. 검왕이 잊혀질 정도로 미공자에게 호감이 갔다.
“요미검체와 사왕지체는 서로를 알아보게 되어 있소.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해도, 두 사람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지. 후후! 마음이 이렇게 끌리는데 어떻게 알아보지 못할까.”
미공자가 독백처럼 말했다.
누미는 그 말이 낯간지러웠다. 이런 말은 연인들끼리나 할 법한 말인데.
“이런 말을 하면 분위기가 깨진다는 점은 알지만…….”
미공자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동물들이 좋은 후손을 낳기 위해서 최상의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거, 알고 있소?”
“인간을 동물에 비유하나요?”
“그래서 이런 말을 하면 분위기 깨진다고 하지 않았소. 하지만 해야 할 말이니까.”
미공자가 술이 담긴 호로병을 들어 꿀꺽 한 모금 마셨다.
“동물들은 배우자를 고르는데 상당히 민감하오. 모든 수컷을 다 물리친 최상의 수컷이 암컷을 모두 차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고. 인간이라고 다를 것 같소?”
“불쾌하네요.”
“요미검체는 여인 중에 최상, 사왕지체는 사내 중에 최상. 우리가 서로를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는 딱 이것 한 가지요.”
“조금 들을 말이 있는가 싶어서 대화를 나눴는데, 귀가 더러워지는 것 같네요. 제가 들을 말은…….”
누미는 말을 하다가 중간에서 멈춰버렸다.
찌릿!
어깨에서부터 다리까지……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다.
미공자를 노려보았다. 어깨를 잡고 있는 미공자의 손을 노려보았다.
미공자가 다른 손도 들어 올린다.
찌릿!
이번에는 왼쪽이 마비된다.
목 아래가…… 몸 전체가 마비된다.
미공자가 말했다.
“소저 말대로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동물은 후손을 낳기 위해서 교합을 하지만 인간은 즐거움을 누리려고 교합해. 색(色). 색은 인간이 떨쳐내지 못하는 최대 화두야.”
누미는 미공자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 사람…… 색한이다!
“내가 말한 것, 요미검체와 사왕지체. 그건 진심이야. 난 사실만 말해. 우린 서로 최상의 몸을 가졌고, 그렇기에 서로에게 끌리게 되어 있어. 난 당신만 보면 정신없이 빨려들고, 당신은 내 앞에 서기만 하면 머릿속이 텅 빌 거야.”
‘그만둬!’
누미는 미공자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미공자의 손길이 옷섶을 헤치고 가슴으로 파고든다. 옷을 풀어헤친다.
그녀는 저항하고 싶었지만 저항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말하고 싶었지만 아혈(啞穴)이 제압되었는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이렇게 능욕당하는 것인가.
“그러니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오늘 우리가 교합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만 두라니까!’
“물론 최상의 즐거움을 선물할 거야. 내 고민은 그 다음에 있어. 너를 살려두면 감당해야 할 후환이 너무 크거든. 후환을 감수하느냐, 한 번의 즐거움으로 끝내느냐…… 네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고민 참 많이 했다.”
슷!
사내의 손이 속옷을 헤집고 밀려 들어와 가슴에 닿았다.
‘그만! 그만!’
누미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지만 미공자는 듣지도 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