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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章 환사(幻邪) (1)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입에 신물이 고이고, 두 다리는 부들부들 떨린다. 진기는 불안정하게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한다.
쉬우웃!
누미는 죽을힘을 다해서 치달렸다.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일에 휘말렸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지금 당장은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갖기로 했다.
우선 살자! 살자!
십마 중에 일인인 비형은잠이 뒤를 보호해주는 것은 안다. 하지만 크게 믿지는 않는다. 검왕이 당할 정도인데 비형은잠인들 뭘 할 수 있겠나.
결국 이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셈이다.
혼자서 살아남아야 한다.
‘헉헉! 이렇게…… 이렇게 달리기만 하다가는 결국 잡혀.’
도주를 포기할 수도, 마냥 도주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때,
슈우웃!
누미는 등 뒤에서 일어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흘린 바람 소리가 아니다. 불현듯 등 뒤에서 솟아난 바람 소리다.
잘못 들었을까? 아니다. 아무리 경황이 없기로서니 신경을 바싹 곤두세우는 바람 소리를 잘못 들었을 리 없다. 그렇다. 이 바람 소리는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왔다!’
달려나갈 수도 멈출 수도 없다.
있는 힘껏 달려나간다고 해도 서너 발짝을 움직이기 전에 잡힐 게 빤히 보인다.
몸을 비틀어서 옆으로 피할까?
그야말로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다. 쾌속으로 안 된다면 변화로도 안 된다.
‘숙조!’
그녀는 검왕을 불렀다. 아니, 검왕을 떠올렸다.
이 세상에서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오직 검왕뿐이다. 검왕만이 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검왕, 숙조, 어떻게 해요!
이 순간…… 왜일까?
그녀는 신형을 멈춰 세웠다. 도주를 포기한 사람처럼 전신에 힘을 완전히 풀고 멈춰 섰다.
그녀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보인다. 여유롭게 웃으면서 다가오는 사내가.
누미는 이 사내를 알지 못한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다. 하지만 이 자가 자신을 노리고 나타났다는 것은 안다. 사내의 웃음에서 의도를 읽었다.
누미는 피식 웃었다.
실제로 그녀는 웃음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정신도 없다.
웃음은 저절로 피어났다.
사내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띠었다. 마치 ‘왜 웃어?’하고 묻는 듯한 표정이다.
슈웃!
누미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곧장 찔러갔다.
빠르게 찌르지 않는다. 현란하게 찌르지 않는다. 묵직하게, 단순하게, 가장 볼품없는 초식을 펼쳐낸다.
“헛!”
사내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누미는 일검직자를 펼쳤다. 검왕을 떠올리는 순간, 그가 펼쳐 보였던 일검직자가 생각났다. 검성의 검학 중에는 이 순간에 대치할 초식이 많은데…… 그 많고 많은 초식 중에서 오직 하나, 일검직자만 생각났다.
검왕은 마지막 순간에 이 초식을 펼쳤다.
아무 정신도 없는 그녀에게 전력을 다해서 일검직자를 펼쳤다.
보고 배워라!
그 당시에는 검왕이 일검직자를 제대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시연을 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봤다.
그 후, 잘생긴 사내가 일검직자를 썼다.
미공자의 검학을 보자 어찌 된 영문인지 검왕의 일검직자가 사라져버렸다.
미공장의 검에 비하면 검왕의 검은 너무 단순하다.
그리고 그 후, 일검직자에 대해서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았다. 주변 여건이 그럴 만한, 일검직자를 생각할 만한, 수련할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또 그녀 자신도 일검직자의 중요성을 몰랐다. 인식하지 못했다는 편이 맞을 게다.
헌데 지금 이 순간, 일검직자가 생각난다. 다른 초식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맨 마지막에 검왕이 펼쳐 보인 일검직자만 생각난다. 그 검학…… 그녀의 손에서 피어난다.
스읏! 스읏! 스으으읏!
그녀를 쫓아왔던 사내는 감히 상대를 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서기만 했다.
휘릭!
누미의 검초가 변했다.
일검직자는 이 장 이상 펼칠 수 없기 때문에 검초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쉬이이익!
그녀는 마치 쫓아오기만 하면 단단히 혼쭐을 내주겠다는 듯 일검직자의 여운을 남긴 채 신형을 띄워 사라져 갔다.
“후후! 후후후!”
일검직자에 밀려난 사내는 더 이상 누미를 쫓지 않았다.
그가 누미를 지켜본다. 그녀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의미 모를 미소만 짓는다.
‘웃!’
비형은잠은 크게 당혹했다.
그녀는 누미가 설마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고수를 상대로 검초를 펼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정말로 그런 일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다.
헌데 그랬다. 그것도 초상승 고수가 아니면 효과가 나지 않는다는 일검직자를 펼쳤다.
사내가 물러선다.
비형은잠은 그 이유를 안다.
누미가 지금 펼치는 일검직자는 완벽하다. 검왕이 펼쳤던 것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검직자를 보면 화후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일검직자는 이력(履歷)으로 펼쳐내는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내공과 숙련된 초식과 무공에 대한 이해도…… 이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서 펼쳐진다.
본인이 터득한 무공의 깊이만큼 펼쳐진다.
누미의 무공은 얕다. 결코 깊은 편이 아니다. 문득문득 절초를 펼쳐내기는 한다. 허나 그것은 그녀가 검성의 검학을 배워서이지 결코 수련이 깊기 때문은 아니다.
헌데 지금 펼친 일검직자는 전혀 다르다. 이건 누미가 아니라 검왕이다.
팟!
비형은잠은 경신술에 더욱 힘을 가했다.
사내를 지나쳐서 누미 뒤를 쫓아야 한다. 지금처럼 누미를 치달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는 숨어야 한다. 은밀히 이동해야 한다. 가급적 눈에 띄면 안 된다. 그런데!
“우웃!”
비형은잠은 또 한 번 당혹했다. 어찌나 크게 놀랐는지 경악성까지 흘렸다.
사내가 누미를 추격하지 않는다. 멈춰 섰다. 그러는 덕분에 앞으로 치달리는 비형은잠과 부딪칠 뻔했다.
무슨 말인지 아는가?
비형은잠과 사내,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스읏!
사내가 뒤돌아섰다.
‘정통으로 걸렸군.’
비형은잠은 쓴웃음을 흘렸다.
사내에게는 자신의 경신술이 통하지 않는다. 사내가 누구인지 정녕 궁금해서 죽겠는데…… 사내는 중원에서 제일 빠르다는 자신만큼이나 빠르다.
물론 지금 거리에서는 은신술도 펼칠 수 없다.
비형은잠은 자신의 특기를 모두 포기하고 지닌바 무공으로만 상대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뭐야?”
사내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물었다.
“어……?”
비형은잠은 막 싸울 준비를 하다가 사내가 이상한 말을 물어오자 엉거주춤 되물었다.
“귀찮네.”
사내가 파리 쫓듯이 손짓을 했다. 귀찮으니까 시비 걸지 말고 가라는 뜻이다.
‘하!’
이게 사실인가? 정말인가?
비형은잠은 결코 사내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사내가 유계판서를 비롯해서 십마 세 명과 동등하게 싸우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이자와 싸우면 죽는다고 생각했거늘…… 사내가 시비 걸지 말란다.
“그럼!”
뭐가 그럼인가? 비형은잠은 자신도 모르게 사내를 향해서 두 손 모아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그리고 혹여 사내의 마음이 변할까봐 쏜살같이 신형을 떨쳐냈다.
쒜에에에엑!
비형은잠이 누미의 뒤를 쫓아 화살처럼 쏘아갔다.
“어떠냐? 요미검체를 맛본 기분이?”
“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여자 같습니다.”
“놀랐나?”
“놀랐습니다. 검이 무척 무거워졌더군요.”
“무겁다?”
“아닙니까?”
“하하하! 무겁다…… 재미있는 표현이야. 그렇군. 자네의 무공이 생각했던 것보다 낮군.”
“…….”
사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미공자의 표현을 빌리면 누미의 일검직자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무거웠다. 너무 묵직해서 마치 바윗덩이로 내리 찍히는 기분이었다.
미공자가 생각난 듯 불쑥 말했다.
“아! 그런데 내 부탁은 여기서 그친 게 아니었을 텐데?”
“압니다. 부탁을 받들자면 계속 쫓아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겨우 일검직자 한 수 보고?”
“후후후! 제 무공이 그렇게 얕지는 않습니다. 너무 무시하시면 화납니다.”
사내가 고소를 머금었다.
“봤나?”
“봤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쫓고 놓아주고, 또 쫓고…… 잡힐 만하고 놓아주고, 놓아주었다가는 다시 쫓고…….
이것이 미공자의 주문이다.
허나 그럴 필요가 없다. 미공자가 그런 주문을 한 것은 누미가 요미검체인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무공 천재라는 요미검체는 극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나?
요리조리 도망 다니고, 머리를 써서 피하고…… 그런 것을 보고자 했던 게 아니다.
무공, 오직 무공의 변화!
요미검체가 극한 상황에서 무공을 어떻게 발전시키는지, 어떻게 끌어내는지 보고자 했다.
누미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일검직자, 뛰어나다.
허나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다. 누미의 뒤를 쫓은 비형은잠도 깨닫지 못한 부분인데…… 사내는 봤다.
누미의 신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일검직자의 검이 날카로워서 뒤로 물러선 것이 아니다. 일검직자를 뻗어내는 신법, 신형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어느 한 곳도 걸림이 없었다.
적벽검문의 비초, 유행을 제대로 펼쳐내고 있다.
그녀는 사내를 피해 도주할 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유행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했다는 증거다.
유행을 제대로 펼쳐냈다면 숨이 차기는커녕 달릴수록 원기를 회복했을 터이다.
유행은 달리면서 내공수련을 하는 유일한 신공이다.
유행을 가지고 있는 적벽검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지만.
누미가 그 정도의 유행을 펼쳐냈다.
사내는 누미의 신형을 관찰하기 위해서 뒤로 물러섰던 것이다. 물러서면서 검을 본 것이 아니라 발과 몸을 본 것이다. 움직임을 주시했다.
유행을 모르던 누미가 단박에 유행을 깨우쳤다.
일검직자를 펼쳐내지 못하던 여인이 검왕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검을 전개해냈다.
더 무엇을 보아야 믿겠는가.
누미는 천재다. 지금은 약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는 보옥이다.
미공자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어때? 이제 내 마음 이해하지?”
“이해는 합니다. 허나 그래도 화요 님의 분노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바…….”
“됐어.”
미공자가 사내의 말문을 막았다.
“자넨 너무 고리타분해.”
“화요 님께서 아시면.”
“그럼…… 알아도 어쩔 수 없게…… 빨리 취해야겠지. 뜸 들일 필요 없겠어. 오늘…… 오늘 취해야겠어.”
미공자가 저 멀리…… 까마득하게 멀어져 간 누미를 쳐다봤다. 두 눈에 야릇한 염정(艶情)을 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