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파괴록-28화 (28/225)

# 28

第六章 낙검(落劍) (3)

누미는 눈을 부릅떴다.

눈앞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난다. 목간에 뜨거운 물을 담았을 때처럼 뿌연 수증기가 일어난다.

지금은 깊은 밤이다.

아지랑이나 수증기가 피어날 시간도, 장소도 아니다.

‘적!’

누미는 본능적으로 침입을 감지했다.

차앙!

그녀는 누구냐고 묻기 전에 검부터 뽑았다. 헌데!

슷! 스으읏!

아지랑이가 무척 빠르게 미끄러져 온다.

십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뭔가가 아른거린다 싶었는데, 어느 새 코앞에 이르렀다.

‘빠르다!’

누미는 등에서 찬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빠르다는 사람을 참 많이 보아왔는데, 이처럼 빠른 자는 단연코 없었다.

파라랑!

누미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볼 틈도 없이 검초를 펼쳐냈다.

초식이 없다. 어떤 초식을 펼치는지, 검초가 어떻게 흘러나가는지 모르겠다. 무작정 본능적으로 휘두른다. 목적은 오직 하나, 적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헌데,

슷!

급하게 풀려나가던 검초가 중간에서 뚝 멈췄다.

‘헉!’

누미는 진정으로 깜짝 놀랐다.

자신의 검초를 이토록 쉽게 무너트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고수가 있다면 오직 십마와 버금가는 고수들…… 십마!

“은잠이다.”

아지랑이가 짤막하게 말했다.

‘은잠? 은잠! 비형은잠!’

누미는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

헌데 십마 중에 일인, 비형은잠은 그녀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시간이 없다. 유행(流行)은 배웠나?”

누미는 귀신에 홀린 듯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으로 펼칠 수 있는 시간은?”

“바, 반 시진.”

“고작 반 시진인가.”

비형은잠의 눈가에 짙은 그늘이 덮였다.

유행은 적벽검문의 독문신법 수류암행(隨流?行)을 일컫는 말이다.

체무거주(體無居住)라. 몸이 없으니 머무를 곳도 갈 곳도 없다. 흐르는 물처럼 시시때때로 상황에 맞춰서 흐를 뿐, 몸이라고 고집하는 것이 없다.

지형에 맞춰서, 바람에 맞춰서, 내 몸 상태에 맞춰서…… 적절하게 흘러간다.

여기까지가 수류(隨流)다. 그리고 전부다.

사실 수류암행을 줄여서 말한다면 유행이라는 말보다는 수류라는 말이 적당하다.

수류를 수련한 사람의 움직임은 매우 아름답다.

어디가 어느 부분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면이 전체적으로 어울려서 아름답게 느껴진다.

- 아름다워. 향기가 나는 것 같아.

수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된 느낌이다.

수류의 수련 정도는 사람들의 느낌만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향기를 느끼면 정통으로 수련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아직도 요원한 게다.

암행(?行)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느낌 때문에 탄생했다.

암(?)은 수류암행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특징적인 말은 모두 빼버리고 유행이라고 부른다.

비형은잠이 바로 그 신법, 수류암행을 말한 것이다.

- 전력으로 펼치면.

이 말은 잘못되었다.

수류암행은 전력으로 펼치는 신법이 아니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형체가 없는 것처럼…… 부드럽게, 유유하게 전개하는 신법이다.

그런 점을 모를 리 없는 비형은잠이 ‘전력으로 펼치면’이라고 물어왔다. 반드시 수류암행을 펼쳐야 하고,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펼쳐야 한다.

죽을 힘을 다해서 펼쳐본 적이 없다. 허나 만약 그리한다면……반 시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면 진기가 고갈될 것으로 판단된다.

비형은잠이 누미의 검을 놓고, 누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너까지 데려가지는 못한다.”

누강이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혹시 숙부께서?”

“그렇다.”

“숙부님은?”

비형은잠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흠!”

누강이 침음성을 터트렸다.

비형은잠은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강호 경험이 풍부한 누강은 비형은잠의 얼굴에서 어두운 기운을 읽어냈다.

검왕도 안위를 보장하지 못한다.

검왕이 평소 원수라고 여기던 마인에게 누미를 부탁할 때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놓인 게다.

누미도 눈치가 있다. 그녀는 급히 누강을 쳐다보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무슨 말들을 하시는 거예요? 숙조께서 위험한 거예요? 말도 안 돼. 세상에 숙조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런 말씀을…….”

비형은잠이 누미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말했다.

“가야겠다.”

“짐작했소이다. 나는 괜찮으니까…… 이 아이는 안전하겠소이까?”

“모르지.”

“후후! 시간이 없을 텐데.”

누강이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아버님!”

누미가 누강을 쳐다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지금 누강은 자신에게 비형은잠을 따라서 떠나라고 말한다. 자신은 위험에 처했는데…… 악(惡)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십마를 따라서 몸을 피하란다.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강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는 거다.

누강이 누미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래서 더더욱 얼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숙부님이 당한 것 같다.”

“네? 그게 무슨 말씀…….”

“조용히 하고 똑똑히 들어. 숙부님이 당할 정도라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 숙부님이 비형은잠께 무엇인가를 부탁한 모양인데, 이 부탁…… 숙부님이 목숨을 건 부탁이다.”

“…….”

누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누강과의 이별을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이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머리로는 아직도 부인하고 있지만, 그런 예감이 든다.

“무슨 일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조건 응해라. 알았니?”

“네. 하지만…….”

누강이 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비형은잠이 재빨리 말했다.

“유행을 최대한으로 펼쳐라. 네 말로 반 시진은 버틸 수 있다고 했으니 반드시 반 시진은 버텨라.”

“내가 한 말이에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뒤돌아보지 말고, 상관하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라.”

비형은잠의 말투가 심상치 않다.

“상대는 십마 중에 세 명…… 흑포사추, 유계판서, 혈천혈도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저, 정말이에요? 그 말이?”

누미가 깜짝 놀라 경악성을 내질렀다.

누미만 놀란 게 아니다.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누강까지 놀랐다. 비형은잠의 말이 사실이라면 검왕이 정말 당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십마 중에 세 명을 조롱할 사람…… 세상에 그럴 만한 사람은 검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헌데 이어지는 말은 더욱 가관이다.

“십마 중에 세 명을 가지고 노는 자를 하인으로 부리는 자다.”

“……!”

너무 놀라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누미는 입만 쩍 벌렸다. 누강도 저절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비형은잠만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비형은잠이 긴장하고 있다.

비형은잠은 넉넉한 사람인데, 여유 있는 사람인데…… 나타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비형은잠의 두 귀가 연신 펄럭인다.

보통 사람은 귀를 움직일 수 없지만, 비형은잠은 움직인다. 보통 사람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

그가 비형은잠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능력 덕분이다.

비형은잠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다.

장난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이 시대 최고의 강자들을 무섭게 긴장시킨다.

“명심해라. 너는 앞만 보고 달리는 거야.”

“네.”

누미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쒜에엑! 쒜에에엑!

누미가 달려나간다.

그녀는 결코 향기롭게 달리지 못한다. 그녀가 달리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저 정도는 아닌데.”

누강이 피식 웃었다.

지금 누미는 본 무공의 절반도 펼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심신으로 받은 충격이 컸다는 뜻이다.

비형은잠이 누미의 뒤를 따른다.

비형은잠은 완벽하게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뒤따른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다.

“대단한 분…… 어떻게 저런 자를 움직였는지.”

누강의 머릿속에 검왕이 떠올랐다.

검왕과 십마는 앙숙이다.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으르렁거리던 관계다. 헌데 지금은 비형은잠이 검왕의 부탁을 받고 누미를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내일은 꽤 뜨겁겠어.”

누강이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달빛도 밝고, 별빛도 맑다. 밤하늘이 유난히 맑게 느껴진다.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올 텐데……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아주 좋은 밤이다. 그때,

“후후! 당주님도 감상적인 면이 있으셨군요.”

누강의 등 뒤로 그림자가 불쑥 솟구치며 말했다.

“으, 음사!”

누강이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음사는 죽었다. 그가 죽어서 구덩이에 던져지는 모습을 분명히 봤다. 허면 이 자는…… 귀신인가?

“검왕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음사가 누강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숙부님이? 그런데 왜 내겐 아무 말도…….”

“지금부터 당주님을 살리는 임무는 제가 맡습니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해보겠습니다.”

“은잠 말을 들었나?”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압니다. 비형은잠마저 긴장하는 일이 아닙니까. 제가 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검왕께서 제게 부탁한 일…… 까짓거 죽기 살기로 해보죠.”

툭! 투투툭! 투투투툭!

음사가 누강의 전신대혈을 빠르게 짚어갔다.

“음! 음맥교활(陰脈交滑)!”

“당주님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들 겁니다.”

“하하하! 십 년. 하하하하!”

누강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음맥교활은 음가(陰家) 비전수(?傳手)다.

상처를 크게 입어서 죽음이 임박했다고 느꼈을 때, 손톱만큼이라도 살 수 있는 희망이 없을 때, 최후라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자신의 몸에 전개하는 수법이다.

음맥교활을 시전하면 전신 신경이 마비된다.

상처가 있으나 아픔을 모르는 몸이 된다.

물론 정상적인 신경이 차단된 만큼 육신이 감당해야 하는 부작용은 엄청나다.

신경이 두 번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신경이 차단된 상태로는 이틀 이상 살지 못한다.

극한의 상처를 견딜 수는 있지만, 최대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이틀뿐이다.

말했지 않나. 삶에 대한 희망이 티끌만치라도 남아있다면 시전하지 않을 공부라고.

타타타타탁!

음사가 빠르게 손을 놀리며 말했다.

“억울하십니까?”

“아니. 다른 생각을 했다.”

“무슨 생각을……?”

“넌 나보다 더 큰 중상을 입었는데 이렇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음맥교활이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하는.”

“이제 마지막입니다. 해도 괜찮겠습니까?”

음사가 등 뒤 명문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음사가 중추신경을 끊으려고 한다. 이로써 완벽하게 아픔을 모르는 몸이 될 게다.

“해.”

뚝!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등에서 마치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이상하게도 아프지는 않다.

뭔가가 단단히 분질러진 모양인데, 아무 통증도 없다.

음사가 말했다.

“제가 봐둔 도주로는 이쪽입니다. 가시죠.”

음사는 누강이 움직일 수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자신 먼저 신형을 쏘아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