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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章 낙검(落劍) (2)
‘후후!’
검왕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비형은잠이 움직였다.
그가 자신의 말을 듣고 누미를 보호하니…… 힘들기는 하겠지만 살 수 있는 희망은 잡은 셈이다.
‘용서하지 않는다. 결코!’
검왕은 암울한 눈을 들어 야공을 쳐다봤다.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달빛도 밝다. 밝은 달…… 지금은 약간 이지러져 있지만, 하루 이틀 정도면 완전한 보름달이 될 것 같다.
밤하늘에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여자, 한 여자가 그려진다.
잔인한 여자.
똑똑하고, 예쁘고, 달콤하고…… 칼로 심장을 찌를 수 있는 여자.
“후후!”
검왕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한 번은 미소를 지었고, 한 번은 소리 내어 웃었지만 웃음의 대상은 전혀 다르다.
“술 한 잔 할까?”
미청년이 걸어와 맞은 편에 앉았다.
얼마 전까지 그 자리에 혈천혈도가 앉아있었다. 역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술을 마셨다.
검왕은 미청년에게 호로병을 던져 주었다.
“술을 넉넉하게 가져온 모양이군.”
“…….”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
“이런 행동,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말이 많은 놈이군.”
“뭐? 하하! 하하하하!”
미청년이 참으로 밝게 웃었다.
미청년은 싸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단지 이 순간을 즐기려는 것 같다.
검왕은 마시던 호로병을 툭 던져 버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손에 잡을 만한 것, 적당한 것.
검왕의 눈에 작고 도톰한 나무작대기가 보였다.
굵기는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정도이고, 길이도 검에 비해 못하지 않다. 약간 짧지만.
검왕이 나무를 들고 허공에 붕붕 휘둘러봤다.
“그거로 싸우게?”
미청년은 어이없다는 듯 검왕을 쳐다보더니, 자신 역시 주위를 둘러봤다.
“싸움은 공평해야지.”
그가 검왕처럼 바싹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두 사람은 앉은 자세 그대로 서로를 쳐다봤다. 한 손에 나뭇가지를 들었지만 들어 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불쏘시개로 들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이름은?”
검왕이 물었다.
“실례 아닌가. 그런 걸 물어보려면 자신부터 소개해야지.”
미청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두 놈에 대해서 말을 들었다.”
“말을 들어? 우리 말을?”
“중평(仲平)과 녹천(綠天). 둘 모두 가당찮은 별호들이라서 짐작이 쉽지 않군. 어떤 놈이냐?”
“호오!”
미청년이 눈빛을 반짝였다.
“그 정도까지 알고 있다면 우리를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는 건데. 하하하! 뜻밖이야. 뜻밖. 이곳에도 눈과 귀가 제대로 박힌 인간들은 있었군.”
“……”
“녹천. 내가 녹천이다.”
미청년이 자신을 녹천이라고 밝혔지만 검왕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미청년만 쳐다봤다.
침묵한다. 침묵한다. 침묵한다…….
검왕의 침묵이 너무 깊어서 미청년도 곧 침묵 속에 함몰되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입을 열어 말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되어버린다.
사실 말을 할 수가 없다.
검왕은 이미 투기(鬪氣)를 흘려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싸움 중이다. 눈으로, 몸으로, 전신으로 싸움을 말하고 있다.
찰나의 틈만 생기면 검왕이 덮쳐온다.
검왕은 미청년은 쳐다본다. 미청년은 검왕을 쳐다본다.
두 사람은 긴장하지 않는다. 모닥불을 쬐는 편한 모습으로 서로를 주시한다.
두 사람은 쉽게 싸움을 벌이지 못한다.
검왕은 십마를 상대할 때처럼 거침없이 파고들지 못한다. 그저 쳐다보기만 한다.
“후후후!”
미청년이 가늘게 웃었다.
검왕을 비웃는 듯한, 도발적인, 틈을 보이는 듯한 웃음을 흘린다.
그러나 검왕은 여전히 깊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미청년을 뚫어지게 쏘아보기만 한다.
“이봐, 날 밝겠어.”
미청년이 웃으면서 말했다. 순간,
쒜엑!
검왕이 비조처럼 모닥불을 타 넘었다. 손에 들고 있던 나무 작대기는 어느새 미청년의 머리를 두들겼다. 허나,
타타타타타탁!
나무와 나무가 거칠게 부딪쳤다.
한 번씩 격돌이 일어날 때마다 나무 부스러기가 모래알처럼 피어나 날아다녔다.
탁! 삿!
검왕과 미청년이 일차 격돌을 마치고 떨어졌다.
두 사람이 들고 있던 나뭇가지는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검왕의 작대기는 중단 어림에서부터 부러져 나갔고, 미청년의 나뭇가지 역시 손에 잡고 있는 부분만 간신히 남은 상태였다.
“혈영마공…… 좋군.”
검왕은 미청년의 말에도 묵묵부답, 절반 남은 나무 작대기를 들어 올렸다. 순간,
파아앙!
착각일까? 나무작대기가 주변의 공기를 한껏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미청년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호오! 그게 가능한가?”
츄아아앗!
검왕이 쏘아왔다. 검왕이 움직인다 싶은 순간, 어느새 옆구리와 왼쪽 다리를 동시에 타격한다.
순간, 미청년이 신형을 우뚝 멈춰 세웠다.
탁! 탁!
검왕이 미청년을 두들겼다. 나무작대기가 원하던 부위를 정확하게 내리쳤다. 그리고,
푸욱!
아주 짧고 강렬한 파육음이 터졌다.
“으음!”
신음을 흘린 사람은 검왕이다. 그가 미청년을 쳤는데, 그가 오히려 신음을 흘렸다.
“천강(天綱)…….”
검왕이 놀랍다는 듯 가늘게 뜬 눈에서 신광을 발산하며 말했다.
미청년이 검왕의 말을 받았다.
“후후! 맞아. 천강부동신(天綱不動身)이야.”
“그게 가능하군.”
“하하하! 우습잖아. 그 말은 내가 한 말인데. 혈영마공에 적벽검문의 검공을 섞는 것도 가능한데, 천강부동신인들 가능하지 못할 리 없잖아.”
검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청년이 천강부동신을 이뤘다. 금강불괴(金剛不壞)와 버금가는 경지다.
중원에도 이런 무공들이 있다.
그중에 제일은 패갑철마와 강신천마다. 그들이 수련한 외문기공은 육신을 돌이나 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도검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도 한다.
허나 천강부동신은 이런 외문기공과는 궤를 달리한다.
능수능멸(能遂能滅), 위험이 생기면 일어나고 평안하면 사라진다. 타격을 받는 부위에는 진기가 집중되어 방어막을 형성하고, 여타 부위는 평안함을 지킨다.
전신 진기를 한 점에 모으면 한지 천만 겹을 쌓아놓은 듯한 효과가 생긴다.
말 그대로 도검불침(刀劍不侵)이다.
할 것이 없다. 어떤 무공으로도 미청년을 손상시키지 못한다.
미청년이 검왕의 마음을 읽은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천천히, 압박하면서.
“내가 검붕(劍崩)을 맞아준 것은…….”
부웅! 붕!
미청년이 겨우 손잡이만 남은 듯한 나뭇가지를 허공에 휘둘렀다.
작은 나무토막에 불과한 나뭇가지에서 거목을 휘두르는 듯한 파공음이 울린다.
“검붕이 소문처럼 강한지 보고 싶어서야.”
부웅! 붕!
미청년이 나무토막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검왕의 미간에는 점점 더 깊은 골이 팼다.
미청년이 보여주는 검…… 검붕이다.
“진정한 검붕이라면 천강부동신 정도는 무너트려야지. 거칠 것이 없어야지.”
“…….”
“적벽검문의 자존심이 무엇인지 아나?”
모순되게도 미청년이 적벽검문 제일기재인 검왕에게 적벽검문의 자존심을 묻는다.
“검붕, 바로 이 검붕이야.”
부웅! 붕! 부우웅!
“이 검붕 하나면 만무(萬武)를 제압할 수 있다. 이것이 적벽검문의 자존심이야.”
부웅! 붕!
“그래서 적벽검문 문도는 타문파의 무공을 수련하지 않는다. 곁눈질도 주지 않아.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바로 이 검붕, 이거 하나면 제왕이 될 수 있으니까.”
부우우웅!
미청년의 나무토막이 검왕을 향해 쏘아졌다.
검왕은 즉시 작대기를 들어서 마주쳐갔다. 내리쳐오는 검붕을 향해 미약한 손짓을 했다.
미약하다. 정말 미약하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데, 짚으로 만든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꽝!
아주 짧고 격렬한 소리가 울렸다.
“후후후! 검왕…… 적벽검문 제일기재라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말이야. 혈영마공도 수련했고…… 그만하면 일이 초 정도는 막을 수 있다고 봤는데…… 형편없군.”
미청년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검왕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스륵! 쿵!
검왕은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미 숨이 끊어져 딱딱하게 굳어버린 육신이기에.
검왕이 죽었다!
정체 모를 사내와 격전을 치르던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검왕이…… 검왕이 이렇게 쓰러지다니!
검왕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검왕은 십마를 장난감처럼 부숴버린다.
그만한 무공이라면 당연히 중원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고수를 누가 쓰러트리나.
헌데 쓰러졌다. 그것도 적벽검문의 검붕에 무너졌다.
이놈들! 어디서 나타난 놈들인가!
“제길!”
흑포사추가 이를 악물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오직 하나, 도주뿐이다. 이 자리에 계속 머물면 죽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
누가 이들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세 명이 손을 합치고도 낯선 사내조차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검왕을 무너트린 자까지 합세한다면 치명적이다. 감당할 방법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미청년은 싸울 생각이 없는 듯하다.
미청년이 검왕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모닥불을 쬈다. 검왕이 가져온 호로병을 들어서 술을 마신다.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있는 검왕을 쳐다보면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저자가 싸움에 개입하기 전에 도주해야 한다.
팟! 파팟!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신형을 퉁겨냈다.
그들과 접전을 벌이던 사내는 십마가 도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쫓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내둘렀다.
“후후! 혹시나 했는데 역시군. 저러니 평생 ‘마졸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거야.”
사내가 중얼거리는 말은 도주하던 세 사람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일부러 들으라고 말한 것이다.
흑포사추가 멈칫거렸다.
놈의 말을 귓가로 흘려버리기에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나.
“아무 생각 말고 튀어라.”
혈천성의 성주인 혈천혈도다.
“저놈들과 붙어서 일말의 승산이라도 있으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개죽음이야. 또 네놈이 나보다 자존심 쎄냐? 나, 혈천성 성주야!”
쉬이이익!
혈천혈도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오직 앞만 보고 질주한다. 뒷꼭지에 욕이 주렁주렁 달라붙어도.
혈천혈도의 말에 흑포사추도 미련없이 질주했다.
뭐가 뭔지…… 어디서 이런 놈들이 불쑥 나타난 것인지…… 분명한 것은 이제 무림 판도가 완전히 바뀐다는 것이다.
혈천성, 사라진다.
검성, 사라진다.
당금 무림을 정과 마로 양분지어 군림하던 두 거대세력이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으면 멸문한다. 저들에게.
두 사내를 뒤로하고 도주하는 발걸음이 결코 가벼울 리 없다.
“제길!”
유계판서가 정녕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계속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