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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 패류(敗類) (4)
그가 나타난 것은 사위에 어스름 어둠이 깔릴 무렵이다.
그는 말끔한 청삼 무복을 입었다. 이목구비는 옥으로 깎아 만든 듯 흠을 잡을 수 없었고, 피부는 백옥처럼 맑았다.
눈동자…… 맑다.
특히 너무도 반듯하고 깔끔한 콧잔등이 인상적이다. 반듯하면서도 날카롭지 않다. 낮지도 높지도 않다.
그는 하늘의 명장이 가장 잘 그린 초상(肖像)이다.
그는 너무 잘생겨서 일단 눈길을 주면 도저히 떼어지지가 않는다. 무례한 줄 알면서도 계속 쳐다보게 된다. 그러다가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기라도 하면…….
그에게서는 강인함이 풍긴다.
하늘이 시샘할 정도로 균형 잡힌 몸에서 용수철 같은 탄력감이 묻어난다.
그래서 그에게는 ‘예쁘다’라는 말을 쓰지 못한다. ‘잘생겼다’ 혹은 ‘멋지다’라는 말만 떠올리게 만든다.
누미는 그를 쳐다봤다.
연무를 멈췄다. 그를 보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이렇게 생긴 사람도 있구나.’
세상 남자들은 모두 투박한 땀 냄새만 풍기는 줄 알았는데, 향기를 풍기는 남자도 있구나.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살짝 미소 지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뇨.”
“그럼 왜?”
“네? 아! 네. 죄송해요. 무례했네요.”
누미는 사내가 말을 건네 온 후에야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급히 눈길을 돌렸다.
“저기서부터 소저의 연무 모습을 봤는데…….”
그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리켰다.
어디서부터 봤다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좌우지간 멀리서부터 본 것 같기는 하다.
누미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이 사람이 날 봤다고? 연무하는 모습을? 창피해.’
누미는 이 사내가 자신의 미숙한 검 놀림을 봤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내가 말했다.
“소저, 검 좀.”
“네?”
사내가 검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누군가가 무인에게 검을 달라는 말하는 것은 아주 큰 실례다. 허나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고, 누미도 그 말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누미가 스스럼없이 검을 건네주었다.
“저는 검을 잘 모르지만…… 만약 내가 일검직자를 펼친다면, 전 이렇게 하겠습니다.”
사내가 검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렸다. 순간!
촤아아아아!
누미는 파도소리를 들었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아주 거센 물소리가 일어난다. 바다 한가운데, 절해고도에서 혼자 파도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이 인다.
검에서 소리가 난다. 파도소리!
누미는 자신의 검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 줄 몰랐다. 이토록 아름다운 소리가 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름다워!’
스읏!
사내가 검을 찔러온다.
누미는 웃으면서 검을 쳐다봤다.
검이 자신을 찔러온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내의 모습이 너무 평온해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준다고 생각된다.
피햇!
누군가가 급히 말했다.
누미는 그 소리를 들었지만…… 피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름다운 음악에 취해서, 파도소리에 취해서 입가에 상큼 미소를 베어문다. 좋다.
그녀도 검이 찔러오는 것을 봤다. 허나 저 검에는 살의(殺意)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안다. 느낀다. 그러니 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촤악!
한순간, 파도소리가 멈췄다.
검이 그녀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사내가 검을 늘어트려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제 일검직자입니다.”
“멋있어요!”
누미는 검을 받아 들 생각도 하지 않고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검왕과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순간, 누미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숙조!’
사내를 만난 순간부터 숙조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일순간에 숙조에 대한 모든 것이 지워졌다. 숙조는 생각나지 않고 사내만 보였다.
“그런 말씀은 실례예요.”
누미는 검을 받아들었다.
“숙조, 검왕 맞죠?”
“…….”
“검왕이니까 숙조에게 대항할 사람이 없는 게 맞죠?”
누강은 누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누미는 불안한 게다. 그래서 이것저것 종알대고 있는 것이다.
사내는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다. 사내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은 검왕을 노린 포석이다.
그는 패갑철마처럼 두 사람을 인질로 삼지 않는다.
만약 그가 패갑철마 같은 행동을 했다면 누미나 누강은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질로 잡아서?
굳이 두 사람을 인질로 잡아서 밥 먹여주고, 재워줄 필요가 없다.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검왕은 사실을 알았을 게고, 어떤 식으로든……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잘 긴 미남 고수와 일전을 벌일 것이다.
방금 전에 만났던 사내와 검왕은 부딪친다.
‘분명히 십마보다 한 수 위였어.’
패갑철마를 일순간에 죽여버린 검왕, 그런 검왕을 티끌만큼도 생각나지 않게 만든 검초.
사내가 검초를 펼칠 때 검왕은 생각나지 않았다.
누미가 그랬고, 누강도 그랬다. 검왕이 펼친 일검직자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내의 일검직자는 화려했다.
그에 비하면 검왕의 일검직자는 밋밋했다. 너무 단순해서 말할 것이 없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최고의 검주(劍主)다.
누가 이길까?
다른 때 같으면 패갑철마마저 일순간에 죽여버린 검왕 편을 들겠지만…… 미청년의 검초를 보게 되자 검왕이 이길 것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건 뭐죠? 검에서 파도소리가 났어요.”
“검파성(劍波聲)이다.”
“검파성이요?”
“검음(劍吟)이라고도 한다.”
“검음(劍吟)? 검음(劍音)이 아니고요?”
“검에 생명을 불어넣으면…… 검은 세상을 처음 만나게 된다. 이 세상을 알게 된다. 그때 처녀성(處女聲)을 토해내는데, 그것을 검파성 또는 검음이라고 한다.”
“그럼 제 검이 살아있다는 건가요?”
“지금은 죽었다. 하지만 그자의 손에 들어가면 다시 살아날 게다. 그때는 파도소리가 아니라 다른 소리를 울리겠지. 세상을 다시 만난 반가움을 드러낼 테니까.”
“소리가 달라져요?”
“반가움이 될 수도 있고, 난폭함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을 보니 반갑다, 즐겁다. 아니면 왜 이제야 깨운 거야! 너 이놈! 검이 어떤 성질을 드러낼지는 검주 몫인데…….”
누강이 누미를 쳐다봤다.
그녀의 검은 당연히 그녀 것이다. 헌데도 누군지 모르는 타인의 손에 운명을 맡겼다.
“숙조도 검파성을 낼 수 있어요?”
“…….”
누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검왕이 흘리는 검파성을 들어본 적이 없다.
간혹 적벽검문의 고수들 중 일부가 검파성을 울렸다. 그래서 검파성을 안다.
허나 그들 누구도 미청년처럼 아름다운 검파성을 울리지는 못했다.
청년의 검파성은 아름답다. 소리가 뚜렷하다. 마치 새 생명이 일어서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검파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누군가가 악기를 연주했다고 생각할 게다. 그렇게 생각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검파성이었다.
검이 울었다.
검왕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이 느낌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어쩐지 미청년이 검왕보다 강하게 느껴진다. 혈천성의 혈천혈도, 검성의 검성주도 능가할 것으로 추측되는 검왕이 약해 보인다.
미청년은 어디서 온 누구인가?
“숙조는 검파성을 내지 못하죠? 하!”
누미가 말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강도 누미도 미청년이 나타난 의미를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말을 못한다.
누미가 결심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디 가서 술이나 마셔요.”
“쪼그만 것이 어른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누강이 따라서 일어섰다.
* * *
“베지 않으신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
키 작은 사내, 어린아이처럼 작은 몸집의 사내가 턱을 괴고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
미청년이 작은 사내를 노려봤다.
작은 사내는 미청년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았다. 여전히 턱을 괴고 하늘을 보며 말했다. 정중하게.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임무가 감찰(監察)인지라. 본문의 명은 분명히 ‘죽이라’였습니다.”
왜소한 청년의 타협 없는 말에 미청년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답했다.
“귀엽잖아.”
“네?”
“저 여자, 귀여워.”
“흠! 재미를 보실 요량이시라면…… 하루 정도 기한을 더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품으시고 내일 베시면, 전 베신 것만 보고 올리겠습니다.”
“하하하!”
미청년이 웃었다.
“저 여자, 베지 않을 생각이다.”
“항명처럼 들립니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저 여자, 요미검체다.”
“그거야 이미 알고 있는 일.”
“아주 근골이 뛰어난 자식을 낳아줄 게다.”
미청년의 말에 왜소한 사내가 눈빛을 반짝이며 돌아봤다. 그리고 약간은 놀란 눈빛으로 말했다.
“아! 그런 뜻이셨습니까?”
“저 여자를…… 흠! 어떻게 한다? 본문으로 끌어들이면 화요(火妖)가 가만있지 않겠지?”
“후후! 질투심이 워낙 강하신 분인지라.”
“쓸모가 있어서 살려준다고 해. 네 임무가 감찰이라지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그렇다고 화요 님의 미움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소한 사내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보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길.”
“후후후! 너란 놈…….”
“아시겠지만 이것에 제 최선입니다.”
“알았다.”
“헌데…… 이건 개인적으로 여쭙는 건데…… 저 여자, 언제 품으실 건지?”
“그게 왜 궁금한데?”
“검왕과 누강을 벤 후에는 원한이 사무치니 품지 못하실 것 같고, 그래도 안긴다면 미친 여자일 게고. 베기 전에 품었다고 해도 베고 난 후에는 원한이 사무치니 아이는 낳아주지 않을 것 같고.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 적의 여자는 품지 못한다.
“하하하!”
미청년이 웃었다.
“베기 전에든 벤 후에든 얼마든지 품을 수 있는 게 여자지. 품는 건 문제가 아냐. 품은 다음이 문제지.”
“역시 원한이…….”
“아니,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아!”
왜소한 사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를 죽이고, 사문을 박살 내도 사내 품이 좋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욕바가지를 했을 터이지만 소공(小公)께서 하시니…… 아무쪼록 화요 님께 들키지 않게.”
“그건 네 눈과 입에 달려있겠지.”
“여차하면 절 베실 생각이라도?”
“그게 화요에게 시달리는 것보다 낫겠지?”
“아이쿠!”
왜소한 사내가 장난스럽게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렸다.
누강과 누미를 베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검왕을 베는 것…… 좀 심각하다. 하지만 역시 약간 수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누강과 누미가 들어간 주점(酒店)을 쳐다봤다. 그들의 눈길은 두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두 남녀가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