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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 패류(敗類) (3)
“상처는 어때?”
“괜찮습니다.”
“그럼 가야겠다.”
“문제없습니다. 가시죠.”
음사는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의 몸 상태는 누강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큭!”
떠나자는 말에 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음사가 복부를 움켜잡고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직 무리군.”
“큭! 그런 것 같습니다.”
“주변에 온통 독충들이다. 숨어있을 수 있나?”
“그건 염려 마십시오.”
음사가 환하게 웃었다.
검왕은 마인들을 독충이라고 불렀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해충이면서, 독까지 지녔으니 박멸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검왕이 독충이라는 말을 하자 불현듯 옛날 일들이 떠오른다.
검왕은 참 밝고 맑았다.
누구에게나 환하게 웃었고, 예의 있게 대했다.
술도 좋아했다. 벗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일 때는 두주불사(斗酒不辭)도 마다하지 않았다.
검왕은 오직 마인들에게만 잔인했다.
마인들에게 검왕은 저승사자였다. 그러나 무릎 꿇고 진심으로 참회하면 용서해주기도 했다. 무작정 잘못했다고 베어 죽이는 냉혈한은 아니었다.
그 시절에 자주 썼던 독충이라는 말을 다시 듣자 웃음이 나왔다.
검왕이 음사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조카님에게 가지 마. 당분간 조카님과는 거리를 둬. 네가 아주 필요할 때가 생길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러죠.”
“가급적 빨리 회복하고. 이를 악물고 굼벵이라도 주워 먹어. 몸을 빨리 추스르는 게 급선무야.”
“언질이라도 주시면 안 됩니까?”
“무슨 언질?”
“저도 눈치가 있습니다.”
“네게 그런 게 있었나?”
음사는 검왕의 놀림을 한 귀로 흘리면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검왕께서 말씀하신 그 일…… 당주님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 말입니다. 제가 절실하게 필요할 정도라면 꽤 심각한 건데…… 시간이 어느 정도나 남은 일입니까?”
“열흘에서 보름.”
“여, 열흘!”
음사가 낯빛이 하얗게 질려서 되물었다.
검왕이 이토록 염려할 정도라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뜻이다.
패갑철마를 단숨에 거꾸러트린 검왕인데 자신 같은 하찮은 졸자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누강은 자신이 구해야 한단다.
열흘에서 보름……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몸이 나을 리 없다. 지금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강적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는 결코 아닐 것이다.
“검왕. 검왕이 도와줄 수는 없는 겁니까?”
“없어.”
“정녕 없습니까?”
“방법은 오직 하나…….”
검왕이 말끝에 여운을 남겼다.
“그, 그게 뭔데요? 그게 뭡니까?”
“누미가 조원검법을 오성 정도만 익혀도 되는데…….”
“뭐라고요!”
음사는 기가 막혀서 말도 잇지 못했다.
이제 겨우 입문(入門)한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 있지…… 당금 무림 최고의 절기를 자유자재로 쓰면 된단다. 심도 깊게 쓰지는 못해도 반사적으로는 튀어나와야 한단다.
이런 황당한 말을!
“기대하기 힘들겠지?”
검왕이 태연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묻는 겁니까?”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거잖아. 아주 필요할 때가 생길 테니까 도와주라고.”
“그런 말을 아주 편하게 잘도 하십니다.”
“후후후!”
검왕이 가늘게, 쓸쓸하게 웃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음사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공관 고수들을 공격한 사람은 적이 아니다. 바로 검성 사람들이 검을 휘둘렀다. 그들 중에 마군이 섞여 있었고, 백살마창과 태황도마 같은 거마가 있었다.
마인들이 귀선부의 이름으로 마공을 쳤다.
헌데 지금은 그들이 쏙 빠졌다.
검왕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십마들뿐이다. 마군도 없고, 백살마창도 없다. 그리고 그 여자…… 면사를 쓰고 나타난 여인, 이령이라고 신분을 밝힌 여인도 없다.
검왕은 그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누강을 쳤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들었다. 누미를 마물에게 제물로 던졌다.
그런데도 그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예전의 검왕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기는…… 예전의 검왕이라면 패갑철마를 그런 식으로 죽일 수 없었겠지.
무엇인가가 달라졌다.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어쨌든 주어진 기한이 십여 일 뿐이라면…….’
겨우 십 일 동안에 백찰마창의 창구멍을 메꿀 방도는 없다. 패황도마의 칼자국도 지우지 못한다.
아니…… 방법은 있다.
‘결국 그 수를 써야 하는가. 정말 얄미운 사람이라니까.’
음사가 쓴웃음을 흘렸다.
검왕은 막무가내로 말한 게 아니다. 음사가 할 수 있으니까 시킨 것이다.
음사에게 비책이 있다.
죽음 직전에 쓸 수 있는 마지막 한 수, 진기를 일시에 격발시키는 비책이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사부뿐이다.
헌데 검왕이 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수를 써달라고 부탁한 게다.
음사가 겉옷을 벗고 가부좌를 틀었다.
츠으으읏! 츠으으으읏!
운기조식을 취했다.
진기를 이끌어 사지백해로 흘려보낸다. 전신이 깊은 물 속에 잠긴 듯이 평온해진다. 여기서 한 번 더…… 더 깊은 곳…… 평소 같으면 전혀 건드리지 않는 경맥을 뚫고 들어간다.
‘강맥(降脈)!’
음사 가문에서 발견한 비맥(秘脈)이다.
비맥이 열린다.
“잠깐, 잠깐, 잠깐!”
누강이 급히 누미를 제지했다.
“왜요? 불편하세요?”
“잠깐, 잠깐, 잠깐만 쉬자.”
“그래요.”
누미는 누강이 불편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지, 누강을 더욱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누강은 털썩 길가에 주저앉았다.
그들 주위로는 아직도 마인들의 눈길이 머물고 있다.
패갑철마 사건 이후로 급히 달려드는 마인은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저들은 굶주린 승냥이다.
누강이 마공관의 마서를 가지고 있다면, 알고 있다면…… 마급을 취해서 초고수로 탈바꿈할 수 있다면…….
일생에서 단 한 번 목숨을 걸어볼 만한 최고의 선택 순간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손 놓고 지금처럼 비루하게 살 것인가, 목숨을 걸어볼 텐가.
떡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면 잔칫집 주변을 어슬렁거려야 한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서 떡을 바란다는 것은 망상이다.
마인들은 절대로 먹잇감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숙부님이…… 뭐라고 하셨지?”
“뭘요?”
“네게 말이다. 조원검법을 가르쳐 줄 때 한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뭐라고 하셨는지 말해봐라.”
“빨리 익힐수록 좋다고요.”
“빨리?”
“네.”
“후후후! 후후후후!”
누강은 실없는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빨리’라…… ‘빨리 익힐수록 좋다’고?
적벽검문 문도들은 ‘빨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속성 무공이라는 게 존재하는 모양이다. 며칠 동안 수련해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무공도 있다.
적벽검문에는 그런 무공이 없다.
무공은 도(道)다.
도가(道家)에 몸담은 사람들은 도인(道人)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처럼 여긴다. 도인은 범인들과 무엇인가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만에! 이게 적벽검문의 답이다.
도(道)…… 길이다. 길 위에 선 사람이다. 꾸준히…… 끝이 없는 길을 가는 사람이다.
도인은 길 위에서 죽는다. 길을 가다가 생명이 끝나는 지점에서 조용히 멈춘다. 더 이상 길을 가지 않고, 현재까지 걸어온 길도 돌아보지 않고, 현재에서 멈춘다.
서두를 이유가 있는가?
무엇인가를 빨리하려는 사람은 결코 도인이 아니다.
무인도 마찬가지다. 무공은 끝이 없다. 끝이 없는 길을 걷는 사람이 무인이다.
가다가 멈춘다.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빨리 달린다고 해서, 조금 멀리 갔다고 해서 그곳이 지금 있는 곳과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모두가 길 위에 서 있다. 길을 간다.
적벽검문은 이런 이치에서 움직인다. 무공을 수련한다.
빨리? 검왕이 그런 말을 썼을 리 없다.
그럼 누미가 잘못 들었나? 아니다. 정확하게 들었다. 검왕이 ‘빨리’라는 말을 했다.
‘숙부가 우릴 보호할 수 없다는 건데…….’
누미에게 조원검법을 가르쳐 줄 때만 해도 검왕의 행동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다.
검왕이 직접 싸우기 싫으니 누미를 시킨 것이라고.
실제로 그런 의미도 있다. 조무래기들까지 일일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지겹다.
헌데, 헌데 말이다. 검왕이 패갑철마를 쓰러트린 후에 곧바로 일검직자를 선보였다.
일검직자는 무공의 총화다.
이제 갓 입문한 자도, 평생 무공을 수련한 자도 모두 일검직자를 펼칠 수 있다. 허나 그 위력은 천양지차, 척! 보면 착! 하고 알게 된다.
일검직자를 보면 무공의 경지를 알 수 있다.
검왕이 바로 그 무공을 펼쳤다. 자신의 무공을 과시하려는 게 아니다. 누미에게 가르친 것이다.
패갑철마를 죽이자마자 누미에게 무공을 전수해?
누강은 누미에게 부축되어서 길을 걷는 중에도 이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답을 찾은 것 같다.
누미가 누강을 상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갈증 나시면 물이라도 찾아볼까요?”
“본문의 상황을 알아봐라.”
“네?”
“본문이 어떤 상황인지 은밀히 알아봐.”
“은밀히요? 왜요?”
누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문의 사정을 알아보는데 은밀히 살필 이유가 있나? 그저 통문만 넣으면 답을 줄 텐데.
‘내 생각에는 본문이 봉쇄되었을 같다.’
누강은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입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듣는 귀가 많다. 보는 눈도 많다. 지금 하는 말이 어떤 식으로 되돌아올지 모른다.
“일검직자, 어느 정도나 수련했지?”
“어휴! 수련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하기는 그렇다. 길을 걸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수련해라.”
“네? 여기서요?”
“수련해.”
“길가인데요?”
“어허!”
“알았어요. 하면 되잖아요.”
누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일어섰다.
누미가 검을 뻗었다가 거둔다.
일검직자는 검초의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다. 단순히 내뻗는 동작뿐이다.
누미는 검의 속도와 방향을 진기로 조절해 나간다.
느리게 뻗는다. 빠르게 뻗는다. 쭉 뻗다가 중도에서 거두기도 한다.
‘그렇군.’
누강은 눈빛을 반짝였다.
누미는 요미검체다. 검을 배우라고 하늘이 내린 신체다.
그녀는 무척 빠른 속도로 일검직자를 이해하고 있다. 초수를 거듭할 때마다 내뻗는 검이 달라진다. 더불어서 조원검급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
이것은…… 마인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니 공격하고 싶은 사람은 공격해라.
이 정도의 무공도 감당하지 못하겠거든 지금 떠나라. 괜히 살신지화를 부르지 말고.
또 이것은…… 검왕의 바람이다.
누미는 요미검체다. 혹여 아는가, 수련을 하다가 퍼뜩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도.
그래서 일검직자를 선보인 것이다.
요행, 우연, 기연…… 검왕은 이런 것까지 바라고 있다.
한 마디로 자신들…… 몹시 위험한 상태다. 검왕이 기적을 바랄 정도로.
“후후! 숙부, 염려 마시오. 그래도 검을 배운 무인 아니오. 허허!”
누강은 누미가 내뻗는 검풍을 느끼면서 푸른 하늘을 쳐다봤다.
비가 와서인가? 하늘이 더욱 파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