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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 패류(敗類) (2)
“칫! 너무해, 혼자 할 것도 없으면서 같이 다니면 안 되나?”
누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누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넋 잃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죽어있는 패갑철마만 쳐다봤다.
검왕이 패갑철마를 단숨에 죽여버렸다.
군더더기가 없다. 사람이 파리를 때려잡듯이 탁! 부딪치는 순간에 죽여버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검성 성주도 이런 식으로 십마를 죽이지는 못한다.
검성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고, 십마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혈천혈도 진구량조차도 지렁이 짓밟듯이 이런 식으로 처형하지는 못한다.
처형! 처형이다.
검왕과 패갑철마의 비무는 결코 싸움이라고 할 수 없다.
패갑철마의 손발을 묶어놓고, 진기도 운용하지 못하게 봉해놓고, 꼼짝하지 못하게 나무 기둥에 묶어놓고…… 그런 연후에 창으로 푹 찌른 게다.
두 사람의 싸움은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누강은 전에도 이런 싸움을 봤다.
검왕이 마공관에서 마군을 이런 식으로 눕혔다. 삼마를 단숨에 쓰러트렸다.
허나 그때는 아주 심한 중상을 당한 상태인지라 제대로 보지 못해서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도 놀라기는 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심한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인이 아니던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마군이 쓰러지는 것을 분명히 봤다.
삼마가 픽픽 나가떨어지는 모습도 봤다.
허나 그 모습들은 환영과 함께 섞여 있어서 긴가민가하는 의심을 불러온다.
검왕이 정말 그랬을까?
검왕이 그들을 쓰러트린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당시 의식이 혼미한 상태였는지라 보지 못한 것이 있었을 게다. 그들이 한참 싸우는 중에 깜빡 정신을 놓았을 수도 있다.
아니다. 분명히 중간에 정신을 놓았을 게다.
아무리 검왕이라고 해도 그렇지…… 십마를 저런 식으로 쳐낼 수는 없다.
헌데 직접 두 눈으로 보니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정말 그랬구나! 정말 검왕이 십마를 장난감처럼 희롱하는구나.
검성 성주도 상대할 수 없는 지경…… 이제 누가 검왕을 상대할 수 있을까.
“칫! 우리 가요.”
누미가 누강 곁으로 다가왔다.
주위에는 야차삼십락이 있다. 이제는 삼십이라는 숫자를 떼어내야 하겠지만.
누미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도 그들이 공격해 온다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저들의 숫자가 조금 전보다 훨씬 줄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투망 합공에 대응할 방책이 없다.
그래도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
저들이 누강 일행을 공격할 경우…… 저들은 검왕의 분노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이 또 한 번 재현될 게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누미가 누강을 안아 일으켰다.
“마차는 왜 부수고 난리야. 곧 죽을 거면서.”
많은 사람들이 패갑철마의 죽음을 지켜봤다.
“혈영잔류, 맞지?”
“맞아.”
“분명히 혈영잔류지?”
“맞아.”
반복해서 묻고, 반복해서 말한다.
유계판서와 흑포사추는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도 믿을 수 없었다.
“혈영마공, 맞지?”
“핏빛 기류가 흘렀어.”
“적벽검문에는 저런 무공이 없지?”
“으음!”
끝내 유계판서가 신음을 쏟아냈다.
흑포사추가 물어온 말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들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물어서 사실을 재확인한다. 그러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
검왕은 마공을 수련했다. 그것도 마공관의 마공을.
이번에는 유계판서가 물었다.
“일검직자는 어떻게 봤어?”
“하아!”
흑포사추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검왕이 전개한 일검직자는 완벽했다. 단순히 검을 곧게 찔러왔을 뿐인데…… 그 누구도 막거나 피할 수 없다. 부딪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대응할 방법이 없다.
검왕의 일검직자는 검성 성주의 일검직자보다도 뛰어난 것 같다.
검왕과 부딪쳐서 살아난 것이 천운이다.
마(魔)를 원수처럼 증오하던 예전의 검왕이라면 결코 요행을 바랄 수 없었을 텐데…… 검왕이 마공을 익힌 탓에 마인에 대한 증오가 사라진 건가?
유계판서가 말했다.
“어쨌든…… 앞으로 검왕만 보면 꼬리 말게 생겼네. 온다는 기척만 느껴도 도주해야겠어.”
놀란 것은 두 사람만이 아니다.
“혈영잔류!”
혈천혈천 진구량의 놀라움은 누구보다도 컸다.
혈천혈도의 무공 근원은 혈영마공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무공은 혈영마공이 사라진 후에 혈영마공을 흉내 내어서 만든 모사(摹寫) 무공이다.
그의 무공에는 혈영마공처럼 잔류가 남지 않는다.
초식은 혈영마공을 본떴지만, 내공 근원은 완전히 다른 고부를 취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혈천혈도밖에 없다.
헌데 지금 막…… 원류가 나타났다.
혈영마공!
그것도 이 세상에서 서너 번쯤 죽었다가 되살아나도 결코 수련하지 않을 것 같던 검왕이 수련했다.
정도의 병기인 검왕이 마공을 수련했다니!
물론 자신의 무공이 혈영마공에게 뒤진다는 말은 아니다.
혈영마공이 본류이기는 하지만…… 세상은 변하는 것, 무공도 변하는 것, 발전하는 것…… 그의 무공이 혈영마공에게 뒤진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갖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그의 무공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혈영마공과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무공이 되었다.
혈영잔류…… 혈영마공…… 그것에 패갑철마가 죽었다.
‘말도 안 돼!’
머릿속에서는 방금 일어난 일을 연신 부인하고 있지만, 엄연히 패갑철마가 죽어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강신천마 이놈들이 검왕에게 무너졌다는 것도…… 사실이겠군.’
강신천마, 십조잔괴, 천살마노를 찾아서 검왕의 무공을 살필 생각이었다.
회회문사는 가벼운 행동을 경계했다.
지금은 뒤로 물러서서 가만히 지켜보는 게 좋다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누가 연루된 것인가. 검왕은 정말 마공을 수련했나.
이번만은 회회문사의 말이 옳았다.
지금 검왕과 마주치면 낭패만 당한다. 아직도 자신은 있지만 낭패를 당할 공산이 크다.
누강과 누미를 건드리면 바로 검왕과 직면한다.
결국 이번 일은 바로 건드리지 말고 뒤에 물러서서 지켜보는 게 상책이다.
헌데…… 정말로 검왕이 마공관의 마공을 수련했다면…….
‘검왕이 마공관의 마공을 수련할 정도라면…… 엇!’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혈천혈도가 갑자기 깜짝 놀랐다.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마공관을 깰 수밖에 없는 상황, 중원의 그 어떤 무공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거마 혹은 마공.
“유지…… 유지자문(幽地橴門)!”
혈천혈도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 담기 싫은 한 단어를 끄집어냈다.
유지, 유계(幽界)를 말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 생명을 잃은 자들이 거주하는 세계다.
자(橴), 땅이름을 말한다.
어딘지 모른다.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유계, 유계’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유계가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유계는 죽어봐야 안다. 죽어서도 모를까?
‘자’는 그런 의미를 지닌다. 어디에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곳이 어딘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문(門), 그냥 붙였다.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다.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다.
짐작하는 것은 거기까지다. 허니 그들이 단체인지, 문도인지 궁도인지 방파인지 알 길이 없다.
그냥 어떤 집단이라는 의미로 ‘문’이라는 글을 쓴다.
유지자문…… 유계를 떠도는 사람들이다.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귀신들이다.
그들이 나타난 것일까?
마공관이 깨졌다면, 아니 인위적으로 깬 것이라면…….
“유지자문이 틀림없어! 그들이 나타난 거야! 아아!”
혈천혈도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눈에 피가 그려진다. 시신들이 쌓여 산을 이룬 모습이 비쳐진다. 비릿한 비 냄새가 마치 피 냄새처럼 맡아진다. 패갑철마의 죽음이 당연한 듯이 보인다.
앞으로 세상은 저렇게 될 게다.
길가에, 산에, 논에, 들에 시신이 쌓여 있을 게다.
시신을 보는 일이 아주 익숙한 풍경이 될 게다. 사지가 뜯어진 시신을 보고도 태연해질 게다.
‘유지자문이 나타났다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혈천혈도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쉬익!
그는 부리나케 신형을 쏘아냈다.
‘유지자문!’
그는 미처 유지자문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검왕의 무공이 놀랍기는 하지만 설마 유지자문 때문에 이런 사단이 생겼다고는…….
‘저놈 미친 거 아닌가!’
그는 멀리 사라져가는 혈천혈도를 보면서 눈을 부릅떴다.
혈천성의 성주인 혈천혈도조차도 그가 숨어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비형은잠이라는 말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오직 숨는 것, 달리는 것 하나로 십마 중에 일인이 되기 쉬운가.
그는 검왕도 봤고, 혈천혈도도 봤다. 흑포사추와 유계판서도 봤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보지 못했다.
‘아냐. 유지자문이 아니고서야…….’
유지자문을 떠올리자 갑자기 모든 의문이 일시에 확 풀렸다.
검왕은 대쪽같은 성품이다. 마인은 원수처럼 싫어하고, 검왕 정도 되는 위치라면 가볍게 흘려버릴 수도 있는 소매치기 같은 잡범도 바로 징치한다.
본인 스스로도 절제의 극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사마(邪魔)와 어떤 연관도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제일 먼저 검왕을 떠올릴 게다.
그런 사람이 마공을 수련해?
너무 깨끗한 백지는 오염되기 쉽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납득되지 않았다.
만약 유지자문이 나타났다면…… 이해된다.
검왕이라면 충분히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할 수 있다. 마공을 수련하는 게 죽기보다 싫지만, 유지자문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수련할 수 있다.
헌데 의문은 또 생긴다.
검왕이 아무리 천재이고, 마공관의 무학이 절세라고 해도 너무 강해졌다.
비금만 보고 수련했을 뿐인데 저렇게 강해지나?
마공관의 무학은 참조하라고 놔둔 것이다. 그 비급들을 모두 수련할 수도 없거니와 설혹 수련한다고 해도 결코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되지 않는다.
무공 열 개를 어설프게 수련한 사람보다 한 가지를 심도 깊게 수련한 사람이 더 강하다.
마공관의 마공을 참조로 해서 자신의 무공을 발전시켜라!
이것이 마공관을 만든 진목적이다.
헌데 검왕은 마공 자체를 수련했다. 그가 펼친 혈영잔류는 예전의 혈영마인이 펼친다고 해도 모자랄 정도로 뛰어났다. 패갑철마가 순간에 죽었으니.
검왕은 도대체 마공관에서 무엇을 한 것인가?
그의 은거는 가짜였나?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술수였나? 중원 무림을 그토록 원망하면서 떠나갔는데?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큰 부분은 풀렸다. 어디서인가 유지자문이 태동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린다면.
‘유지자문이 나타났다면…… 지금 무림에서는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한 명, 검왕뿐이다. 검성 성주도 혈철혈도도 안 돼. 검왕뿐이야. 저 정도 무공이라면.’
비형은잠의 눈길이 가늘게 좁혀졌다.
유지자문을 떠올리자 그도 이제는 가만히 숨어있을 수 없었다. 가만히 있기에는 마음이 너무 쫓겼다.
‘가자. 일단 검왕에게…….’
스스스스스!
그는 구렁이가 담을 넘듯 스르륵 미끄러졌다. 허나 속도는 무척 빨라서 빛살을 무색게 했다.
그는 검왕이 사라진 방향으로 질주했다.
누강과 누미가 터벅터벅 힘겹게 걸었다.
야차삼십락을 떠나가는 그들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모두들 쓰러진 사람들을 본다.
멀쩡하게 서 있던 이들이 땅에 드러눕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촌각이다.
누가 이 사람들을…… 십마 중에 일인이 패갑철마를 죽일 수 있나.
망연자실, 떠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