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第二章 호료(好了)! [됐다!] (3)
“괜찮습니까?”
무심한 듯 잔잔한 울림이 귓가에 울렸다.
“숙부님이십니까?”
누강이 활짝 웃으면서 반갑게 말했다.
흑의인은 어둠 속에 가려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강은 검왕이 옆에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혈무기가 스며들어서 꽤 고통스러울 겁니다.”
“하하! 웬걸요. 이 정도는 너끈히 견딜 수 있습니다.”
누강은 자신 있게 가슴을 탕탕 쳤다.
가슴을 치자 상처가 자르르 울렸다. 금창약을 발라놓은 곳에서 극심한 통증이 일어났다.
혈무기는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혈무기가 체내에 침입하면 악성 종양으로 변질된다.
검상을 치료한다고 해서 완치되는 것이 아니다. 차후, 종양이 살과 뼈를 갉아먹을 게고, 날이 갈수록 극심한 고통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죽는다.
무인으로서의 생명도 끝났다.
종양으로 변한 혈무기는 진기에도 끈적끈적하게 찰싹 달라붙는다. 엄밀히 말하면 기벽(氣壁)에 달라붙는다. 그래서 운기할 때마다 극심한 통증을 일으킨다.
참으면 되지 않냐고?
무림 고문수법 중에 곤설인(滾雪人)이라는 것이 있다.
피부를 얇게 벗겨내어 붉은 살점이 드러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소금을 뿌리면 마치 붉은 땅에 하얀 꽃이 피어난 모습처럼 보인다.
진기가 기벽에 달라붙은 혈무기에 긁히는 고통은 곤설인에 견줄 수 있다.
누강은 그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 그렇다. 누강은 목숨에 연연한 적이 없다. 검을 든 무인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마음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가 말했다.
“헌데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겁니까? 그때부터 쭉…… 인가요?”
“바로 이곳으로 왔죠.”
“아!”
“현음자의 기관진도는 유실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명…… 성주에게서 성주에게로 일인전승(一人傳承)되고 있습니다.”
검왕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허나 그 말을 들은 누강은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성주에게서 성주에게로.
검성 성주만이 현음자의 기관진도를 알고 있다.
하나, 검왕은 기관진도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그러니 검왕이 이곳을 은거지로 택할 수 있었던 데는 검성 성주의 입김이 작용했다.
둘, 귀선부가 이곳을 들이친 것 역시 검성 성주의 묵인하에 이루어졌다.
현음자의 기관진도는 아무도 풀지 못한다. 지난 백여 년간 수많은 석학들이 도전했다가 포기했다. 동서고금 어느 학문에도 거론되지 않은 신비기진이다.
그런 기관진을 귀선부 이령이 단숨에 풀었다.
기관진도를 알지 못하는 한, 할 수 없는 움직임이다.
셋, 그렇다면 성주는 마군이 귀선부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은 안다. 마군 이외에 다른 마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정도 무림의 우상, 검성에 마인들이 득실거린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검왕이 말했다.
“이곳에 온 후로 편안했는데……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는군요.”
“제가 온 것은 알았습니까?”
“후후! 봤습니다.”
검왕이 웃었다.
누강의 검왕의 웃음에서 그의 심정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는 웃기도 한다.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오직 세월만이 치료약이라더니…… 그렇게 아팠고, 통분했고, 절규해야만 했던 상처도 세월이 지나니 어느 정도 씻겼나 보다.
“보고도 모른 척하셨습니까?”
누강이 짐짓 화난 듯 말했다.
“일초십사변을 일초십오변이라고 우기시는 것은 여전하시더군요.”
“그게 어떻게 십사변입니까! 십오변이지!”
“하하! 십사변입니다.”
“십오변입니다!”
두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지난 세월, 어색함이 이 한순간으로 무너졌다.
그들은 다시 숙부와 조카가 되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옛날처럼 웃으면서.
“저 여자는?”
검왕이 눈짓으로 한쪽 구석에서 잠들어 있는 누미를 가리켰다.
검왕은 누미에게 ‘소저(小姐)’라는 말을 쓰지 않고 ‘여자’라는 말을 썼다.
누미에 대해서 대충 짐작한다는 뜻이다.
“후후! 제가 얻은 딸입니다.”
“딸…… 딸이라…… 딸…… 후후! 조카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자질이 저희 검문 무공에 적합해서 거뒀는데…….”
누강이 말끝을 흐렸다.
검왕은 더 묻지 않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즉시 알았다.
적벽검문에는 엄격한 문규(門規)가 있다.
그 중 첫 번째가 사제(師弟), 사형제(師兄弟)의 불인정이다.
적벽검문에는 입문(入門)이라는 말이 없다. 그 대신에 혈연식(血緣式)이 있다. 사부와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비와 자식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검왕과 누강 같은 오묘한 관계도 성립되는 것이다.
적벽검문이 이런 조항을 둔 것은 검문의 검공이 매우 난해해서 수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백 명이 뜻을 두면 열 명이 통과하고, 열 명 중에 한 명만이 검을 쥔다.
적벽검문의 검공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검문의 검공은 매우 어렵다. 보통 마음을 가지고는 입문단계를 넘어서는 데만도 십 년이 걸린다. 입문 너머에 있는 검공은 더욱 난해해서 깨우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초십오변? 입문 무공이다.
누강은 오직 입문 무공만으로 무림의 우상이라는 검성의 당주가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적벽검문의 무공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많아도 배우는 사람은 없다. 입문을 청한 사람도 일이 년 수련해 보고는 떠나가 버린다.
혈족(血族)은 이런 연유로 생겨났다.
적벽검문의 모든 문도는 성을 누(縷)씨로 바꿔야 한다.
자식을 받아들이는 부(父) 또는 모(母)는 강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자식을 평생 아끼고 보살핀다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누군가와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 받아들인 자식을 위해서는 친부모가 친자식에게 하듯이 목숨이라도 던져줄 수 있어야 한다.
자식은 부모에게 성과 열을 다해야 한다.
부모의 말에 절대 복종하고, 시키는 일은 어떤 것이 되었든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일반적인 혈연관계보다 더욱 심한, 거의 한 몸이나 다름없는 관계를 요구한다.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적벽검문의 무공을 깨우칠 수 없다.
누강에게 전혀 모르던 딸이 생겼다는 것…… 누강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제자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 얘 가슴이……?”
“이름이 누미라고요?”
“그렇습니다.”
“조카님께서 딸을 잘못 들인 듯합니다. 누미…… 저희 무공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저 애는 벌써 일초십오변을…….”
“마고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검왕이 누강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그런데도 누미는 마기를 받아들였어요. 그것도 상당히.”
“그럴 리가!”
누강이 눈을 부릅떴다.
검왕이 그의 불신을 종식시키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누미는 습(襲)…… 체질이 마습(魔襲)하기에 딱 알맞습니다. 우리 무공보다는 마공 쪽에서 탐낼 기재입니다.”
“그럼 저 얘 가슴은?”
“침습한 마기를 봉인해 놨습니다. 당장 빼낼 수가 없는 것이라서 봉인만 해놨는데…….”
“그렇군요.”
누강이 잠들어 있는 누미를 쳐다봤다.
누미의 무공 진전은 무척 빠르다. 일초십오변을 배운지 이 년이 채 안 됐는데, 벌써 십이변을 펼쳐내고 있다.
이는 적벽검문 역사상 가장 걸출했다는 검왕보다도 반년이 빠르다.
“그럼…… 방법은 있겠습니까?”
“본인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요?”
누강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본인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은…… 내력으로 배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외부적인 시술이나, 타인의 도움은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자신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검왕이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상당히 심각하다.
검왕의 내력은 적벽검문 제일이다. 검왕을 찾아낸 숙조(叔祖)도 검왕만큼 강하지 못했다. 누강의 조부이자 현 적벽검문주인 조부(祖父)도 검왕에게는 한 수 양보한다.
그런 검왕이 어쩔 수 없다고 포기했다.
누미…… 계속 가슴에 대침을 꽂고 살아야 하나.
스읏!
검왕이 일어섰다.
어둠 속이라서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검왕이 말했다.
“푹 쉬십시오.”
* * *
누미는 잠들지 않았다. 그녀는 벽을 향해 누워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숙조의 음성이 젊고 낭랑하다.
나이를 들어서인가? 음성에서 같은 나이 또래의 밝음, 활발함을 감지한다.
검왕!
무림에서 이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나이가 쉰, 예순이 되어도 듣지 못한다. 오직 하늘이 내린 천하의 기재만이 이 소리를 듣는다.
검왕이 가슴을 만졌다.
마기를 봉인하기 위해서라지만…… 옷섶을 열고 가슴을 봤다. 그곳에 대침을 찔렀다.
‘부끄러워.’
누미는 생각만 했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낯선 사내가 가슴을 보고 만졌다. 그가 비록 숙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젊은 사내인데.
숙조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니, 느끼기는 했다. 징그럽고 흉측했다. 뱀이 살 위를 기어갈 때처럼, 가슴을 만질 때마다 소름이 쫙쫙 끼쳤다.
검왕의 얼굴은 시커먼 때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동굴 속이라서 더욱 보지 못했다. 허나 두 눈…… 들개의 눈처럼, 광기(狂氣)에 번들거리는 눈을 보면 소름부터 돋는다.
그런 사람이 가슴을 만지는데 무슨 감정을 느끼랴.
치료 목적이 아니었다면 당장 반격했을 것이다. 치료라고 해도 검왕이 아니라 외인이었다면 결단코 거절했을 게다. 뺨이라도 후려쳤을까?
- 나, 검왕이다.
그 말 한 마디에 꼼짝하지 못했다.
- 치료한다.
그 말에 순순히 옷섶을 내줬다.
검왕의 음성에는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나왔다.
거절할 수 없었다. 반항할 수 없었다. 여자로서 백 번, 천 번 마다할 일인데,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검왕을 안다. 적벽검문 사람들 중에 검왕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가슴을 만지도록 내버려둔 게 아니다. 뭔지 모르겠는데…… 꼼짝할 수 없었다. 깎지 않아서 길게 자란 손톱이 살을 건드릴 때는 소름이 쫙쫙 돋았는데…… 그저 눈 감고 있었다.
헌데 그런 검왕이 신축년 스물넷…… 젊은 청년이다.
나이를 생각하고 들으니 음색이 다르다. 검왕의 음성이 매우 젊다. 낭랑하고 강하다.
아비는 ‘방법이 없다’는 검왕의 마지막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누미는 오히려 가슴이 쿵쾅거린다.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오른다.
가슴에 뭐가 침습했는지 모르겠다.
검왕은 마기라고 하는데, 솔직히 아무런 느낌도 없다.
괜히 대침이 꽂혀 있어서 그 부위가 곪는다는 생각만 든다. 침을 꽂지 않아도 아무 이상이 없을 것 같다.
검왕은 이틀에 한 번씩 침을 새로 갈아준다.
검왕이…… 가슴을 만진다. 그리고 그 일은…… 지금 대화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내력을 충분히 키워서 스스로 마기를 몰아내기 전까지는 계속 지속될 것이다.
‘숙조…….’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어쩐지 검왕이 사내로 여겨진다. 숙조가 아니라 같은 또래의 젊은 청년 고수로 느껴진다.
누미는 자신의 생각이 들킬까봐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몸을 뒤척거리지도 못했다.
“휴우!”
귓가로 누강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누강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녀는 검왕을 만난 것이 꿈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