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99화
“이곳에 터를 만들 생각이다.”
천애랑의 말에 가솔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공가문의 역사가 있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리라는 것은 마땅히 예상한 바였다.
또한 이곳 백두산은 절로 기공가의 심법이 반응할 정도로 영기가 가득했기에 기공가문의 터로 적합해 보였다.
“좋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설동이 씩씩하게 나섰다. 다른 의각원생들도 설동처럼 소매를 걷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런 이들을 보며 천애랑을 미소로 말했다.
“터부터 닦자.”
***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많은 손이 필요한 작업이다.
터를 고르고 터를 닦으며, 천년을 버틸 기둥과 대들보를 위한 나무를 구하고, 이를 재단하고 작업할 장인들이 필요했다.
‘장인들은 소걸이가 구해온다 했으니.’
천하의 모든 직업이 모여 있는 곳이 하오문이다. 그런 곳의 소문주가 나섰으니 분명 천하의 명장을 구해오리라.
장인들이 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천애랑은 남은 이들을 데리고 터를 다듬는 일을 시작했다.
“대지의 기운을 온전히 느껴라. 동화를 해야 한다. 땅의 기운이 곧 너희가 되고 너희의 기운이 곧 땅이 되도록. 다함께 기공가의 초석을 세우자.”
천애랑의 말에 따라 의각원생들은 일관된 심호흡을 했다.
신의 경지에 다다른 천애랑이라면 혼자서도 거뜬히 터를 닦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스물에 달하는 가솔들 모두가 힘쓰는 것보다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애랑은 혼자만의 기공가가 아닌 모두의 기공가를 위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솔들과 함께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흘러 송소걸이 장인들을 구해오자 기공가문의 재건을 위한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모두가 분주했지만 그 중에서도 기공가문의 총관이 된 가후가 가장 분주했다.
“가주님께서 계획하신 전각 스무 채, 정원과 연무장, 진법의 주술석 등을 계산해본 결과 금원보 만 개 이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맨땅에서 가문을 세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돈이 필요한 행위였다.
게다가 천애랑은 단순히 건물 좀 세우고 현판을 거는 정도의 가문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최고여야 해.’
천애랑은 선조님들의 희생과 영광이 후대에 더욱 빛날 수 있도록 가장 화려한 초석을 세울 작정이었다. 그러다보니 요구하는 수준이 매우 높았다.
가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연신 계산을 했다.
“이것도 최소입니다. 가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의 주술석이 너무 비쌉니다. 아니, 비싼 게 문제가 아니라 구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솔들과 후손들을 위해선 꼭 필요하다.”
천애랑이 주술석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진법은 가히 고금 제일을 논할만한 수준이었다.
과거 자연지기를 갑절의 밀도로 높인 천단호의 진법, 화란과 송소걸을 치료하기 위해 자연지기를 세 곱절로 높였던 진법보다 더 강한 진법을 천애랑은 원하고 있었다.
‘많이도 안 바래. 네 곱절이면 된다.’
만약 천애랑이 의도한 대로 진법이 완성된다면 기공가에선 무공을 수련한지 20년도 채 되기 전에 절정의 고수들이 흔하게 육성될 것이다.
‘드물지 않게 초절정, 더 나아가 화경의 경지도 가능하겠지.’
천애랑 또한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뭐가 됐든 이러한 진법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전대미문의 최강 가문이 탄생할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강력한 진법을 만들 주술석이었다. 심지어 가문 전체를 하나의 진법으로 만들 생각이니 주술석의 양도 많이 필요했다.
고민을 하던 천애랑이 말했다.
“주술석은 내가 구해볼 것이다. 그러니 다른 문제들에 우선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가후는 깊게 인사를 하고선 분주하게 물러났다.
천애랑은 머릿속으로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화란에게 말했다.
“잠시 출타를 다녀올 것이다. 화란 네게 이곳을 일임할 테니 무리하지 말고 있어.”
“예. 조심히 다녀오세요.”
화란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
백두산을 벗어난 천애랑은 하남성 낙양을 다시 찾았다. 제갈청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세상이 변하긴 했군.’
정마대전 이후 마충의 장례와 가문의 재건을 위해 2년의 시간을 보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 상태였다.
“만세! 만세! 만세!”
“대명제국 만세! 홍무제 폐하 만세!”
낙양 시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대명(大明)이라는 깃발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이들을 본 사람마다 저리 외쳤다.
‘주원장이 황제가 됐다라.’
백두산을 떠나오기 전 간략히 송소걸에게 듣긴 했으나 그 사실을 실제 목도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대단한 전투들을 했었다지.’
정마대전이 절정에 치다를 때, 주원장은 황실군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남경을 재탈환하고선 곧장 진우량을 공격했다.
홍건적을 삼 분하는 진우량, 장사성 군벌들을 모두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진우량과 주원장. 두 군벌은 파양호에서 적벽대전을 능가하는 규모의 전투를 치렀고 결국 주원장이 승리했다. 여기엔 장강의 수군을 지배한 담대혁의 공로가 컸다.
진우량을 이긴 주원장은 곧장 장사성을 공격했고, 1년 동안의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가깝게 지내던 소명왕 한림아까지 사망하니 주원장은 완벽히 홍건적과 강남을 평정했다.
그렇게 주원장은 남경(南京)을 수도로 천명하고 황제에 등극했다.
‘국호는 대명(大明), 연호는 홍무(洪武)라.’
주원장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달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20만 대군을 북상시켜 북경을 공격했다.
제대로 국가를 정비할 틈도 없이 치르는 전쟁이었지만 주원장이 그리 행동한 이유가 있었다.
‘마교의 패배 때문.’
그간 원나라 황실을 지원하던 마교가 모든 지원을 끊고 신강으로 완전히 물러나자 원나라 황실 재정이 빠르게 무너졌다.
심지어 황제마저 죽어버렸다.
곧장 토곤 티무르 황제가 등극했으나 원나라 황실은 매우 어수선한 상태.
주원장은 이 틈을 노려 대규모 북진을 강행한 거였다.
그렇게 1년 만에 남경에서 출발한 주원장의 대군이 토곤 티무르 황제를 쫓아내고 끝내 북경을 탈환했다.
“만세! 만세! 만세!”
“대명제국 만세! 홍무제 폐하 만세!”
사람들은 황실의 깃발을 보며 연신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진정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로구나.’
새삼스러웠다.
작지 않은 인연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은 묘한 감상을 주었다.
‘태평성대가 오려나.’
무림도 나라도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는 세상에 평화가득한 일만 남은 게 아니겠나.
천애랑은 흐뭇한 마음을 안고서 무림맹 본부로 직행했다.
***
“어서 오시게!”
천애랑의 갑작스런 방문이었지만 제갈청이 천애랑 환대했다.
“잘 지냈소?”
“덕분에. 그나저나 그렇게 떠나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아는가. 혹시 이제라도 마음이 바뀌었다면 편히 말하시게. 아직 맹주 자리는 공석이라네.”
임시 무림맹주의 자리에 앉을 생각 없냐는 제갈청의 물음이었다.
정마대전 이후 수많은 공석과 셀 수 없는 일거리들이 생긴 무림맹이었다.
거기에 신검 백청선의 실종까지 장기화되자 제갈청은 천애랑에게 임시 무림맹주 직을 제안했었다.
천마를 홀로 죽이고, 마교를 물러나게 한 영웅.
그러한 천애랑을 통해 사분오열 힘을 잃은 정도무림을 다시 결집하고자 하는 제갈청의 의도였다.
하지만 천애랑은 제갈청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가솔들과 함께 백두산으로 향했었다.
‘가문의 재건이 우선이야.’
이러한 천애랑의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였다.
“그런 거엔 관심 없소.”
“그런 거라니. 허허.”
제갈청이 헛웃음을 뱉었다.
“무림맹주 자리 때문이 아니라면 어인 일로 여기까지 행차를 한 겐가.”
제갈청의 물음에 천애랑은 직접적으로 말했다.
“주술석이 필요하오. 그것도 가장 강력한 것들로.”
진법에 능한 제갈세가, 제갈청은 그곳의 가주다. 당연히 제갈세가에선 수많은 주술석들을 다루고, 그에 대한 기록들이 있을 터였다.
이는 천애랑이 주술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곧장 제갈청을 찾은 가장 큰 이유였다.
“주술석이라.”
제갈청이 학우선을 살랑이며 생각에 잠겼다.
“재건한다는 가문에 진법을 설치하려는 걸 테고. 자네가 이 정도로 말을 꺼내는 것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진법이겠구만. 얼마나 강력한 진법을 꾀하는지 물어도 되겠나.”
“자연지기의 네 곱절을 붙잡을 수 있는 진법.”
“……!”
제갈청이 놀란 눈을 했다. 그의 심경처럼 학우선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놀랍구만 놀라워. 그런 엄청난 진법을 유지하려면 어지간한 주술석으로는 턱도 없겠구만.”
“그렇소. 그래서 군사를 찾은 거요. 이러한 주술석은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
“허어.”
제갈청의 고심이 깊어졌다. 한참을 고민하던 제갈청이 입을 열었다.
“자네의 부탁인 만큼 구해주곤 싶네. 하지만 현재 무림맹의 사정이 좋지 못하네. 아니, 무림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네.”
“그게 무슨 말이오.”
천애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림맹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니. 마교 같은 세력이라도 새로 나타난 건가.’
제갈청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 황명이 떨어졌네. 무림인들의 병장기 사용을 금한다고.”
“……?”
천애랑은 제갈청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황명? 왜?’
지금의 대명(大明)이 건국되는데 있어 정도무림맹의 기여도가 컸다.
‘무림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면서 왜 제약을 가하는 거지?’
천애랑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제갈청이 말했다.
“그래. 나 또한 황명을 처음 접한 날 자네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네. 우리 모두가 그랬었지.”
천애랑은 한 고사를 떠올렸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 사냥 후 사냥개가 쓸모없어지면 사냥개도 삶아 먹는다는 의미였다.
제갈청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생각도 그러하네. 아마도 무림의 힘이 새로운 황권을 위협할까봐 걱정하는 게 아닌가 싶네.”
“흐음. 그럼 무림맹은 어찌할 생각이오?”
무림인에게 병장기를 금한다는 것은 손을 자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처사였다.
이를 무림인들이 손 놓고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원래라면 생존을 위해 강력히 건의했을 것이네. 하지만 지금은 정마대전으로 정도무림이 난도질된 상태라네. 황명을 제지할 힘이 모이지 않는 실정이네.”
“그럼 이대로 황명을 따를 생각이오?”
제갈청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우리에겐 조금의 시간이 있네. 그 사이 묘책을 찾아봐야지.”
“시간이라니?”
“정보에 따르면 개국공신들에 대한 황제의 견제가 심해지는 것 같네. 그 유명한 4대 선생도 찬밥 신세를 면하기 어려워 보이더군. 아마 황제도 내부의 칼부림이 끝나고서야 무림을 신경 쓰지 않을까 싶다네.”
천애랑이 놀란 눈을 했다.
“4대 선생을? 혹시 홍건적의 군사로 있던 이는 어떻게 됐소?”
4대 선생은 담대혁과 함께 강남의 선비들을 규합하고 주원장이 강남을 제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왔던 핵심 선비들이었다.
개국공신 중에서도 최상위에 들어가는 이들일 텐데 토사구팽의 위기에 놓여있다 하니 천애랑은 의제(義弟) 담대혁이 걱정됐다.
“담가의 장자를 말함인가?”
되묻는 제갈청의 표정이 좋지 못하자 천애랑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황제와 담 군사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듯하네.”
“논쟁?”
“승상 제도에 관한 것이었지. 담 군사는 황제에게 직언할 수 있고 훗날의 폭군을 견제할 수 있는 승상 제도를 추진했고, 황제는 반대했네.”
“그래서 어찌 됐소?”
“결국 승상 제도는 폐지됐고, 육부와 대도독부 모두 황제에게 직속됐네. 일련의 과정에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담 군사는 황제의 명에 따라 감금되었다네. 그간 고생했으니 잠시 머리를 식히라는 말과 함께 말이지.”
“……담 아우가 감금되었다?”
천애랑의 목소리에 진득한 내기가 흘러나왔다. 천마의 도발을 마주했던 때와 비슷한 천애랑의 분위기에 제갈청은 절로 마른 침을 삼켰다.
동시에 제갈청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자네. 설마 아니지?”
“무엇을 말이오?”
태연하게 되묻는 천애랑의 눈빛이 북해의 밤처럼 어둡고 차가웠다. 일견 살기마저 보이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그 모습에 제갈청은 식은땀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