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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198화 (198/200)

기공술사 198화

정마대전.

무림의 패권과 생사를 두고 정파와 마교가 치른 전쟁이 드디어 결착을 맺었다.

“마교가 정도무림맹에 대패하고 십만대산으로 물러갔다던데?”

숭산 자락의 평야에서 시작된 소식은 삽시간에 천하로 퍼져나갔다.

소문의 핵심은 정파가 그간의 열세를 단숨에 역전하고 정마대전을 승리했다는 것. 그리고 승리의 주역엔 기공가의 가주 천애랑이 있다는 것이었다.

“기공가주가 단신으로 천마를 죽였다고?”

“그래. 이 사람아. 천마가 죽은 것 때문에 마교가 패배를 인정하고 십만대산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

“세상에! 천마의 압도적인 무력 때문에 정도무림이 연전연패를 하며 사천에서 하남까지 밀렸다고 들었었는데. 그런 천마를 죽였다고? 기공가주가?”

“그래. 몇 번을 말하나.”

“너무 놀라워 그랬네. 그런데 말이야.”

“……?”

“기공가주가 누구인가? 기공가는 또 어딘데?”

“아, 왜 그 있지 않나. 백두산에 있던 가문이었는데, 거기 가주가 백두신룡이라 불리는.”

“아아아! 백두신룡! 산동의 무신(武神)!”

강호에 백두신룡으로 알려진 천애랑의 명성에 기공가주라는 호칭이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

은신처의 모옥(茅屋).

깊은 주름과 한껏 수척해진 모습의 백청선이 마루에 앉아 놀란 눈을 했다.

“기공가주에 의해 정마대전이 종료되었다라.”

“그렇습니다. 주인님.”

“그리 부르지 말라 누누이 말했거늘 또 그리 부르는 구나.”

“아마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완강한 녹영의 태도에 백청선은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름과 밝은 햇살이 그의 눈을 간지럽혔다.

“정도무림의 미래를 보는 것 같구나.”

밝은 미래를 말하는 것치곤 백청선의 목소리엔 힘이 빠져 있었다.

백청선 그는 스스로 오랜 세월 무림의 일인자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이합집산이 강한 무림의 생태에서 하나의 연맹이라는 것을 창단하고 이를 이끌 수 있었던 건 신검(神劍)이라는 자신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믿었다.

또한 이번 마교와의 전쟁에 있어서도 자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했었다.

‘한데 정작 이 전쟁의 주인공도 아닌 혈교주에게 큰 부상을 당하고 이리 숨어서 몸만 추스르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군.’

게다가 몸을 추스르는 사이, 자신이 없으면 해결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정마대전이 끝났단다.

그것도 새파랗게 젊고 그 누구도 무림을 구원해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기공가주 천애랑에 의해서.

이로 인해 백청선은 자신이 더 이상 정도무림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백청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인생이 무상하구나. 이곳에서 나가거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물러나야겠다.”

“저는 그저 주인님만 따를 뿐입니다.”

백청선은 자신의 충직한 수하 녹영을 바라봤다. 어느새 사십의 나이가 된 녹영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들이 느껴졌다.

‘언제 이리 시간이 흘렀던가.’

백청선은 녹영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흑영(黑影)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백여 명이 어우러져 사는 촌락에 불과한 마을이었지만 실상은 살수들의 집성촌이었다.

외부에선 이곳의 살수들을 부를 때 흑살(黑殺)이라 지칭했다. 이러한 흑살들을 이끄는 촌장이자 지도자의 가문이 있었다.

‘유 씨 가문.’

유비의 후손이자 촉나라의 마지막까지 황제의 그림자가 되었다던 가문이었다. 녹영의 부모는 그런 유 씨 가문의 하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복면을 쓴 침입자들에 의해서 흑영 마을이 불타오르고 흑살이 멸살될 때 백청선은 그곳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 녹영을 데리고 나왔다.

그 후 녹영은 그 은혜를 갚는 명목으로 백청선의 그림자가 되어 30년이 되도록 충성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녹영이 아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백청선은 녹영에게 말 못한 진실이 남아있었다.

그건 흑살을 죽인 복면인들이 당시 화산파의 장로들과 대제자였던 백청선이라는 거다.

화산파가 정예전력을 데리고 직접 흑살을 멸살시킨 이유가 있었다.

‘흑살이 화산파 장문인을 죽였다.’

당시 화산파의 장문인이 객사를 당했는데, 그 범인으로 흑살이 지목됐다.

그것만으로도 화산파는 복수를 위해 칼을 들 명분이 충분했었다. 백청선의 입장에서도 스승님이 시해 당했으니 검에 자비를 둘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흑살의 죄명에 한 가지가 더해졌다.

‘흑화의 자금줄.’

화산파의 어두운 과거이자 언젠간 해결해야 할 책무와도 같던 범죄 집단.

흑살이 그런 곳의 자금줄로 사용된다하니 화산파의 입장에서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흑살을 멸할 것을 작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몸을 숨기는 것에 능한 흑살을 어떻게 찾느냐였다.

그것을 해결해준 것이 녹영의 부모였다.

흑영 마을의 위치를 알려주는 대가로 자식인 녹영에게 번듯한 무공의 제공과 양지 세계로의 안내를 약조했다.

흑영이 사라지는 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유 씨 가문에서 녹영의 부모를 죽였고, 녹영은 사전에 부모가 숨겨 준 덕으로 마지막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를 죽인 게 지금까지도 복면인들의 소행이라고 알고 있고.’

여하간 이렇게 생존한 녹영을 백청선이 사전의 약속대로 거둔 거였다.

‘쯧.’

그 날을 떠올린 백청선이 속으로 혀를 찼다.

‘너무 성급했었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화산파 장문인의 시해엔 흑살의 연관성이 없었다.

한 마디로 화산파는 잘못된 정보로 한 마을을 몰살시킨 거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 피해의 대상이 음지에서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살수들이었기에 화산파는 큰 죄책감 없이 사건을 무마시켰다.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한 기억은 흐르는 강물처럼 막을 수 없이 백청선의 머리를 괴롭혔다.

백청선은 유 씨 가문에서 봤던 어린 남매를 떠올렸다.

남매 중 누나로 보이던 여아는 예닐곱 살이나 됐을까. 그리 어린 나이임에도 백청선 자신을 부모를 죽인 원수라고 소리치며 공격해왔었다.

제법 무재의 싹수가 보였으나 그래봐야 아이인지라 백청선에게 위협이 될 리는 없었다.

백청선은 이 남매를 기절시킨 후 흑영 마을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남기었다.

아무리 복수라지만 정파인으로서 이런 아이까지 죽이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추가적으로 거두고자 결심한 녹영이 어린 남매와 강한 친분이 있어보였기에 차마 녹영 앞에서 죽일 수가 없는 이유도 있었다.

‘이제와 그날을 떠올리고 복잡한 심경을 느껴봐야 무엇 하겠는가.’

백청선의 수척한 얼굴이 더욱 그늘 질 때였다.

백청선과 녹영, 두 사람이 몸을 숨기던 은신처의 진법이 흔들거렸다. 이는 외부에서 진법을 강제로 부술 때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그렇기에 녹영이 급히 백청선을 호위하며 경계를 했다.

쿠구궁!

이내 진법이 무너지며 수십 명의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모두 흑색 일변도의 복면을 하고 있었다.

“…….”

백청선은 눈을 좁혔다.

포위하듯 다가오는 이들의 발걸음은 귀신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살수인가.’

풍진강호에서 칠십이 넘게 살면서 어찌 은원관계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

문제는 현재 백청선의 몸 상태였다.

최대한 부상을 회복했다곤 하지만 아직은 6할 정도까지밖에 회복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청선의 두 눈엔 당황이나 두려움 따윈 없었다. 그저 적의를 드러내는 이들을 침착하게 살피며 검을 챙길 뿐이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녹영이 검을 치켜들며 크게 외쳤다.

녹영의 날 선 외침에도 복면인들의 걸음은 확실한 목적이 있는 듯 멈추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정체를 밝혀라!”

복면인들이 가까워질수록 백청선은 눈을 좁혔다. 기억에 남아있는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흑살……?’

좀 전까지 떠올리던 과거의 망령들이 어떻게 눈앞에 나타난 건지 백청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히야. 이런 곳에 꽁꽁 숨어있으니 찾을 수가 있겠나.”

복면을 하고 있어 얼굴이나 나이를 짐작할 순 없지만 목소리를 통해 삼십 줄의 젊은 사내라는 것을 백청선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경거망동 말거라.”

여인의 목소리에 백청선의 눈이 좁혀졌다.

‘설마.’

잠시 고심하던 백청선이 입을 열었다.

“혹 흑살이더냐.”

백청선의 물음에 복면인들이 놀란 듯 움찔했다.

대답과도 다를 바 없는 반응에 백청선도 놀란 눈을 했다. 그 명맥이 끊어진 흑살이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목소리를 내었던 여인과 사내가 복면을 내리며 말했다.

“정체를 맞출 줄은 몰랐는데.”

“누님. 오히려 잘 됐습니다. 본인의 과오를 기억도 못 하면 어쩌나 했는데 말이죠.”

두 목소리의 주인공 유소소와 유소호였다.

복면을 벗은 유소소와 유소호의 모습에 녹영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소……?”

녹영의 알음에 유소호가 인상을 썼다.

“변절자 녀석이 기억력은 좋구나. 그리고 감히 누님에게 그딴 눈빛이라니. 당장 그 눈깔을 파버릴라.”

유소호의 분개를 뒤로 하고 유소소가 백청선에게 말했다.

“거의 30년이 돼가던가요. 제대로 기억하시지 못할 수 있으니 정식으로 소개를 드리죠. 흑살의 적통 계승자이자 현 살막(殺幕)의 막주인 유소소가 신검을 뵙니다.”

유소소가 기품이 느껴지는 태도로 인사를 했다.

녹영은 여전히 놀란 눈이었고, 백청선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흑살의 명맥을 잇고 있는 것도 놀랍지만 이런 경지라니. 초절정의 끝? 거의 화경에 발을 딛기 전인 느낌이지 않은가.’

부상이라지만 한때는 천하제일을 논하던 백청선이다. 그는 유소소를 보며 경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다른 녀석들도 만만치가 않아. 이 정도면 구파일방의 최정예에 손색이 없겠는데.’

오히려 더 강하지 않나 싶었다.

은신술은 뛰어나지만 무공은 약하다는 살수들의 편견이 깨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세력을 꾸린 유소소의 능력에 화산파를 이끄는 장으로서 순수한 감탄이 일었다.

백청선이 말했다.

“그래. 살막의 막주를 만나게 되어 반갑구만. 한데 이곳엔 어쩐 일인가.”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은원을 해결하고자 함인가.”

유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저희 둘을 살려둔 공을 생각해 유언을 남길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건방진!”

녹영이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다.

죽은 줄 알았던 오랜 인연의 등장에 크게 놀라긴 했지만 현재 자신은 백청선을 지켜야 할 유일한 수신호위였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잠시 깊게 눈을 감았다 뜬 백청선이 검을 뽑았다. 오랜 시간 그와 함께한 명검이 청아한 소리를 내었다.

“강호의 은원에 무슨 긴 말이 필요할까. 오게.”

“알겠습니다.”

유소소가 손짓하자 살막의 살수들이 백청선과 녹영의 방위를 점하며 공격을 시작했다.

유소소와 유소호도 곧장 백청선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유소소의 양손엔 천애랑 덕분에 완성을 시킨 유 씨 가문의 귀보, 쌍고검이 들려있었다.

***

정마대전이 끝난 후 천애랑은 가솔들과 함께 백두산을 찾았다. 마충의 장례를 위해서였다.

마충의 시신을 모시고 이동하는 것엔 빙궁의 얼음과 진주언가의 도움을 받았다.

마충의 묘는 천단호의 봉분 옆에 자리했다.

고인을 기리는 마음으로 내공 없이 순수한 힘으로 모든 장례를 마친 천애랑은 가솔들을 불러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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