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97화
천마는 대경실색했다.
‘마기가 통제를 벗어났다……!’
과거 천석산의 의지에 따라 단전이 부서지고 죽음을 맞이할 뻔한 그때의 느낌이 확실했다.
“이이익!”
당황한 천마가 급히 천애랑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천애랑의 전신에서 거대한 마기가 뿜어져 나와 천마를 덮쳤다.
“크으윽!”
천마는 전신을 옥죄는 압박감에 천애랑이 어떻게 마기를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내부에서 마기를 폭발시키든 선천지기를 사용하든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끄으으으윽!”
하지만 천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날뛰는 내부의 상황에 어떤 것도 시도할 수가 없었다.
파슥.
천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 단전이……!’
천하를 담고 있던 단전이 부서져가는 느낌은 생경했다. 이어 엄청난 무기력감과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크아아아아아!”
천마가 처절하게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천애랑의 손은 천신(天神)의 것이라도 되는지 도저히 벗겨낼 수가 없었다.
“이젠 끝내자.”
천애랑은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전신의 모든 기운을 천마에게 주입했다. 완벽하게 천마를 소멸시키고자 함이었다.
콰드득.
“끄아아아아아아아!”
천마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기혈이 뒤틀리고 혈도는 불탔으며 단전은 도자기처럼 산산조각 부서졌다.
“아, 안 돼에에에에!”
천마의 단말마 비명이 전장을 울렸다. 이어 천마의 신형이 힘없이 쓰러졌다.
모두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경천동지할 전투에 멀찍이 물러났던 정파무인들도, 언제든지 천마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대기하던 마교의 무인들도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기 어려웠다.
“교주님이!”
“교주님을 뫼셔라!”
빠르게 정신을 차린 마인들이 마기를 피어 올리며 천애랑에게 달려들었다. 천마의 신형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정파 측도 허겁지겁 대응했다.
“마인들을 막아라!”
“천마의 시신과 신룡대주를 지켜!”
“지금이 기회다! 저 악독한 마인들을 죽이자!”
한바탕 소란 속에서 천애랑은 무심히 천마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후련했다. 가문의 오랜 복수를 이루었으니.
‘하지만 생각보다 후련하지도 않아.’
지금 느끼는 후련함의 감정은 주어진 과업을 무사히 완수했다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괴물 같던 천마도 한낱 인간.’
그 얼마나 많은 업적과 위명을 쌓아왔는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을 익혔는지는 싸늘한 죽음 앞에선 그저 허명에 불과해 보였다.
죽음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진리는 천애랑 자신도 피해가지 못할 것을 안다.
천애랑은 급격한 허탈감을 느꼈다.
죽음이라는 인생무상과 함께 인생의 목표가 사라진 기분은 말로 표현 못할 공허함을 주었다.
“…….”
귓가를 왱왱거리는 소리들에 천애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형님!”
“가주님!”
송소걸과 의각원생들이 천애랑을 호위하며 연신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천애랑에 대한 경외와 걱정이 가득했다.
“형님! 괜찮아요?”
“가주님. 어디 다치셨습니까? 살펴봐도 될까요?”
천애랑은 고개를 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정파와 마교가 아비규환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시끄러워.’
천애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상단전까지 차오른 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귀찮고 거슬렸다.
“교주님의 성체(聖體)를 모셔야 한다!”
“가로막는 것들은 다 죽여라!”
“교주님의 복수를 위하여!”
마인들은 배수의 진이라도 친 듯 잠폭단까지 먹어가며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원래도 수적으로 열세였던 정파의 무인들이기에 잠폭단까지 먹은 마인들을 막지 못하고 뚫렸다.
정파의 장벽을 뚫은 마인들이 천마의 시신을 챙기고 복수를 하기 위해 천애랑에게 내달렸다.
“가주님을 지키… 헛!”
천애랑은 자신을 지키려는 설동을 지나치며 마인들을 향해 진각을 밟았다.
콰과과과과과과광!
천애랑 전방으로 대지가 폭발하며 마인들을 덮쳤다.
“그대로 간다!”
마인들은 호신강기를 펼쳐 자신들을 덮쳐오는 토사(土砂)를 강행돌파하려 했다.
하지만 마인들은 제대로 방어를 이룰 수 없었다. 천애랑이 손짓하자 호신강기가 통제에서 벗어나 흩어진 것이다.
“어찌…!”
“크악!”
“끄아악!”
토사에 휩쓸린 마인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천애랑은 팔을 펼쳤다.
의지가 곧 내공이 되어 수천 마리의 불꽃 나비를 만들어냈다.
화접탄(火蝶彈). 대난무(大亂舞).
천애랑의 뜻에 따라 전장을 가득 메운 나비가 날갯짓을 했다.
콰과과과광!
천애랑과 가까이 있던 마인들이 수십 마리의 나비에 덮쳐지며 폭사했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남은 불꽃 나비들이 전장에 퍼져있는 마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마인들은 순수하게 경외심을 느꼈다.
그때였다.
부상 때문에 멀찍이 물러나있던 찬호가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애랑---!”
우뚝.
마인들을 마저 쓸어버리려던 불꽃 나비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엄청난 내공 통제력이었다.
천애랑은 찬호를 봤다. 한쪽 팔이 사라지고 드라쿠보다 더 창백해진 찬호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의 전장에서 천마를 죽인 천애랑이 암묵적으로 정파의 대표가, 교주가 죽었기에 소교주인 찬호가 마교의 대표가 된 상황이었다.
그러한 두 사람이 마주하니 지켜보는 모두가 숨을 죽였다.
“찬호.”
“그래. 애랑.”
서로 이름만 부를 뿐이었지만 그 속에서 두 사람은 많은 것을 느꼈다.
천애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인들을 데리고 물러나라.”
말과 함께 천애랑은 허공을 부유하는 불꽃 나비들을 소멸시켰다.
정파 진형에서 반발이 일었다.
“이보게! 그게 무슨 말인가. 마교를 놓아주겠다니!”
“그래. 확실하게 일망타진할 기회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그리고 이런 중차대한 결정을 그대 혼자서 결정할 순 없는 법일세.”
맹의 중진들이 천애랑에게 따졌다.
천애랑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봤다. 그 눈빛에 따지던 중진들이 움찔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천애랑이 서늘하게 말했다.
“그럼 다 죽여야겠소? 누가? 그대들이 죽일 것이오? 아니면 양패구상이라도 하시려고?”
“크흠.”
“아니, 그건.”
“으음.”
날이 선 천애랑의 말에 맹의 중진들이 헛기침을 하며 난색을 표했다.
원래의 성격이라면 배분이나 명분 등을 들먹이며 나무라듯 설득이라도 해보겠지만 왜인지 천애랑 앞에선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최상위 포식자를 마주한 동물들의 본능과도 같았다.
이때 제갈청이 빠르게 다가와 중진들과 천애랑 사이를 가로막았다.
“기공가주.”
제갈청의 부름에 천애랑은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그대도 나를 막고자 함이오?”
제갈청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오늘 맹과 정도무림은 기공가주에게 큰 은혜를 입었네.”
제갈청은 천애랑을 신룡대주라는 맹의 호칭 대신 기공가주로 불렀다.
이는 천애랑을 맹의 일원으로서가 아닌 다시 한 번 무림을 구한 기공가문의 가주로서 존중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은 강호 모두가 알게 될 사실이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자네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시게.”
제갈청은 중진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이에 중진들이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이어서 제갈청은 천애랑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맹의 실권을 잡고 있는 군사가 못을 박듯 선포를 하자 중진들도 마지못해 제갈청의 뜻을 따랐다.
지그시 제갈청의 눈을 바라보던 천애랑은 고개를 돌려 다시 찬호를 봤다.
“다시 한 번 말하지. 수하들을 데리고 물러나라. 그리고.”
천애랑은 천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천마의 시신이 두둥실 떠서 날아오더니 찬호의 앞에 천천히 내려졌다.
찬호는 천마의 시신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공적으로는 마교의 절대자인 교주이자 사사로이는 아버지인 천마의 죽음이었건만 큰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찬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공가주의 배려에 감사를 전한다. 마교는 이대로 십만대산으로 물러날 것이다.”
찬호는 경계심 가득한 정파무인들의 시선을 둘러보고선 마인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모두는 들어라! 오늘 마교는 패배했다!”
찬호의 외침에 마인들에게서 울분이 차올랐다.
쿵! 쿵! 쿵!
마인들이 하나의 북소리처럼 일제히 진각을 밟아대자 순식간에 전장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정파무인들은 바짝 긴장하며 경계를 했다.
찬호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를 패배시킨 이는 기공가문의 천애랑 가주이며! 마교는 이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마교 패배의 원인이 정파에게 있는 것이 아닌 천애랑이라는 초월자에게 있음을 강조하며 마교의 자존심을 챙긴 찬호였다.
그 뜻을 이해한 마인들이 정파 무인들을 노려보며 좀 전처럼 발을 굴렸다.
쿵! 쿵! 쿵!
분위기만 봐서는 당장이라도 다시 전쟁을 치를 것만 같았다.
찬호는 천애랑에게 마지막 시선을 던지고는 말을 마무리했다.
“교주님의 성체를 뫼시어라! 물러날 것이다!”
부상을 입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기백이었다.
“존명!”
찬호를 위시한 마인들이 빠르게 진열을 정비하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인들이 시야의 끝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긴장감이 가득했던 전장에 작은 황량함이 찾아왔다.
“후우.”
누군가의 한숨소리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정파 무인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천애랑이 제갈청을 보았다.
“전쟁은 끝났소. 그러니 이제 좀 쉬고 싶소만.”
제갈청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뒷정리는 걱정 말고 쉬시게. 다시 한 번 고맙네.”
천애랑은 제갈청의 인사를 가볍게 받고선 가솔들과 맹우들을 살폈다.
“빙궁주와 야수왕, 그리고 당가주는 위급한 건 지났습니다. 요양만 남았습니다.”
맹우들을 살피던 의각원생들의 설명이었다.
“화란은?”
“외상보다는 내상이 심한 편입니다.”
의각원생들의 안내를 받은 천애랑은 정파 진형 막사에 누워있는 화란을 보았다.
잠시 물끄러미 화란을 보던 천애랑은 자세를 낮추고 화란의 하단전과 중단전에 손을 얹었다.
“받아들여라.”
천애랑의 몸에서 빛처럼 밝은 기운이 나와 화란에게로 들어갔다.
“으음.”
기절해있던 화란이 신음을 뱉었다.
지켜보던 의각원생들은 놀란 눈을 했다.
‘지금 가주님께서 본인의 선천지기에 생기를 더해 전달한 거 맞지?’
‘그런 거 같은데?’
‘와! 화란 언니 봐봐! 혈색이 바로 돌아온다.’
‘세상에. 우리 가주님은 이제 신선의 반열에 오르신 건가.’
화란에게서 손을 뗀 천애랑은 의각원생들의 숙덕거림을 뒤로 하고 말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모두 허튼짓 말고 가만히 있어라.”
말과 함께 천애랑의 신형이 사라졌다.
***
전장에서 크게 벗어나 숲속 어딘가로 달리던 천애랑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쓸데없이 숨지 말고 그만 나와.”
아무도 없는 숲이었지만 천애랑의 말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송소걸이었다.
“역시. 형님은 못 속이겠네요. 그나저나 찬호 형님에게 가보시게요?”
“…….”
천애랑은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을 띠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 아우도 못 속이겠구나.”
“헤헤. 척 하면 척이죠. 같이 가요. 조용히 있을게요.”
“그래.”
그렇게 천애랑과 송소걸이 은밀히 도착한 곳은 후퇴하던 마교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숲속 어딘가였다.
밤은 깊었고, 부상에 신음하는 마인들의 거친 호흡이 야영지를 맴돌고 있었다.
[조용히.]
천애랑은 송소걸을 끌어안고선 환영유령보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예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쉽게 자연에 동화됐다.
천애랑과 송소걸은 마인들의 경계를 쉽게 뚫고선 찬호가 쉬는 곳으로 향했다.
찬호는 진형의 중심에 있었으며 호법을 받으며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송소걸과 함께 한참 찬호를 바라보던 천애랑은 품속에서 작은 환약을 꺼냈다. 그러곤 은밀히 찬호의 무릎 위에 던져 놓았다.
천애랑과 송소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마교 진형을 벗어났다.
천애랑과 송소걸이 완전히 사라진 후.
찬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곤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환약을 물끄러미 봤다.
이어 찬호는 누군가가 서있었을 법한 위치를 바라본 후, 환약을 입에 털어 넣고 다시 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