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93화
무림맹 본부. 집무실.
천애랑, 송소걸, 제갈청이 자리를 가졌다.
극구 함께 자리를 하고 싶다던 남궁수검은 내상이 심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치료를 받으러 갔다.
제갈청은 천랑의 앞에 직접 찻잔을 놓아주었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다과를 준비하진 못했네.”
“괜찮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무림맹 본부가 분주한 지금이다. 이렇게 차를 마시는 것도 사치인 상황이다.
호록.
제갈청이 차를 음미하며 깊은 숨을 뱉어냈다. 그의 표정엔 피로감이 가득했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제갈청이 입을 열었다.
“신룡대주. 정말 대단했네. 덕분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함 받았어.”
제갈청은 천애랑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찌 그러지 않을쏘냐.
무림맹 그 누구도, 심지어 천하의 남궁 가주도 어쩌지 못한 괴물을 죽여줬으니.
‘심지어 이렇게 멀끔하게 말이지.’
제갈청은 천애랑을 살폈다.
피에 젖었지만 그 피는 천애랑의 것이 아니었다. 전투에 따른 외관의 지저분함을 빼고는 딱히 부상도 없어보였다.
‘그래. 정도무림의 희망은 신룡대주밖에 없어.’
호록.
제갈청은 차를 홀짝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곤 천애랑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신룡대주. 천마와는 어떻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나.”
제갈청은 천애랑과 천마의 실종 의미에 대해서 천애랑의 죽음, 천마의 부상이라고 상정했었다.
한데 천애랑은 매우 건강한 모습, 심지어 더욱 강해진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천마의 실종 이유가 부상 또는 죽음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제갈청은 천마의 상황을 알고 싶었다.
탁.
천애랑은 찻잔을 내려놓고선 말했다.
“싸웠고, 다쳤고, 회복을 했소. 그게 나의 상황이오. 그리고 아마도 천마도 크게 다르진 않을 터. 현재 보이지 않는다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오.”
“으음. 역시 그러한가.”
제갈청이 턱을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천애랑의 강함을 보고 나니 내심 천마가 죽었기를 바랐던 제갈청이었다.
천애랑이 말했다.
“안 그래도 천마와 관련해 할 말이 있소.”
“응? 편히 말해주시게.”
제갈청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애랑은 송소걸을 불렀다.
“소걸아.”
“예. 형님.”
송소걸이 앞으로 나서며 제갈청에게 인사를 했다.
“하늘이 내린 두뇌, 제갈세가의 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송소걸을 바라보는 제갈청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천애랑과 함께 나타나 남궁수검과 창궁검대를 구한 인물.
천애랑이 드라쿠를 상대할 때 전투의 여파에 휩쓸리는 민가를 살피던 의협.
결정적으로 천애랑과 의형제로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
‘하지만 그 신분을 확인할 수가 없었어.’
제갈청은 한 때 천애랑과 함께 다니는 송소걸의 신분이 궁금해 개방에 의뢰를 넣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방주가 직접 거절을 했지.’
어쩔 수 없이 제갈청은 하오문에도 의뢰를 했었다.
‘여기선 하오문주가 직접 거절을 했었고.’
대체 눈앞의 미공자가 누구이기에 천하의 정보를 다루는 개방과 하오문이 숨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랜 의문을 오늘에서야 직접 마주했으니 제갈청은 송소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안달이 난 제갈청의 표정을 보며 송소걸이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실 수 있겠군요.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하오문의 소문주 송소희라고 합니다.”
“……!”
제갈청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하니 송소걸이 하오문주의 자식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다들 의뢰를 거절했던가.’
지난 거절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송소희? 좀 전에 신룡대주가 부를 땐 분명 소걸이라 했는데…….’
제갈청과 송소걸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상엔 비밀이 많은 편이죠.”
송소걸에게서 은은한 기운이 제갈청을 옭아맸다. 쓸데없이 비밀을 들추지 말라는 의미였다.
‘세상에……!’
제갈청은 자신이 오늘 여러 번 놀란다 생각했다.
‘이립도 안 되어 보이는데 벌써 화경이란 말인가!’
제갈청은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봤다.
현재 천마와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신룡대주 천애랑과 그를 의형으로 따르는 하오문의 소문주.
천하제일에 가까운 무력과 천하제일에 가까운 정보력의 조합이 절로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거기에 천애랑을 따르는 다른 세력과 무인들까지 고려한다면?
‘어쩌면 정도무림의 제일 세력은 무림맹이 아니라 신룡대주, 아니 기공가주였는지도 모르겠군.’
천애랑을 과소평가한 적은 없지만 매번 의도치 않게 과소평가가 되는 상황을 마주하니 제갈청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건가.’
제갈청은 송소걸을 향해 말했다.
“하오문의 소문주를 보게 되어 나 또한 반갑네. 하오문주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를 알겠군. 그나저나 내게 할 말이라는 게 뭔가?”
“천마가 잠적한 지금. 그를 찾고자 사람을 푸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렇지.”
제갈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려 탈마의 경지에 이른 천마다. 숨고자 작정한 그를 쉽게 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괜히 찾겠다고 나섰다간 정보원들만 쥐도 새도 모르게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송소걸이 말했다.
“그래서 무림맹, 하오문, 개방 전체의 정보원들을 이용해 전 무림에 천마를 향한 형님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모든 정보력을 이용해 신룡대주의 말을 전하자? 혹 무슨 말을 전할 생각이기에……?”
이에 대해선 천애랑이 직접 입을 열었다.
“나 기공가주 천애랑은 천마와의 대결을 원한다.”
“……단기접전(單騎接戰)으로 무림의 흥망을 결정짓는 건곤일척 승부를 보자는 말이로군.”
제갈청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에 잠기었다. 오래지않아 제갈청이 입을 열었다.
“천마를 이길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수보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효과적일 테지.”
다만 제갈청이 말한 것처럼 이겨야 유효한 작전이었다. 만약 천애랑이 천마에게 지기라도 하는 날엔 정도무림은 온갖 사기저하와 전력부진으로 정마대전의 패배가 확실해질 것이다.
제갈청이 천애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이 있는가?”
천애랑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
어느 마을의 객잔.
한 탁자에 둘러앉은 보부상 사내들이 사담을 나누었다.
“그 이야기 들었는가? 천마가 기공가주라는 이에게 부상을 입고 잠적을 했다던데?”
“아! 오다가다 들었네. 안 그래도 마을 어귀에 보니까 천마를 향한 기공가주의 선전포고문이 붙어 있던데? 못 다한 승부를 보자고.”
“아아! 자네도 보았는가. 한데 기공가주가 누구이기에 천하의 마교주를 부상 입혔다는 거지?”
“그 있잖는가. 백두신룡이라 불리던.”
“헉! 산동의 무신(武神)? 그 분이 기공가주셨다고?”
놀라던 사내는 납득을 하며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천하의 천마를 누군가 부상 입혔다는 게 쉽게 믿기질 않았는데 산동의 무신 백두신룡이라면 이해가 되는구만.”
“그렇지. 과거 기공가문에 의해 마교의 중원일통이 막힌 적이 있다고 하더니 또 그러려나보이.”
“과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천마나 마교가 겁을 먹지 않을까?”
조용히 듣고 있던 사내 하나가 대화에 주의를 주었다.
“에끼 이 사람들아! 말조심해! 마교 무인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사내의 제재에 다른 사내들이 뜨끔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객잔 안은 이미 이들이 아니어도 기공가주와 천마에 대한 이야기로 북적이고 있었다.
무림맹, 개방, 하오문이 힘을 합친 결과였다.
천하의 객잔, 나루, 시전, 표국 등 사람이 다니는 곳이라면 기공가주의 선전포고문과 이와 관련된 소문들이 항시 자리했다.
마교 또한 이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감히 교주님을 비방하는 곳의 주축, 기공가주를 척결하기 위해 위치를 추적했다.
그들은 이내 기공가주 천애랑이 무림맹 본부에서 나타났다는 첩보를 얻어냈다.
이런 상황에 맞춰 무림맹은 움직였다.
목적지는 무림맹 본부가 있던 하남성 낙양에서 남동쪽. 소림사가 자리한 숭산(嵩山) 자락의 평야였다.
무림맹의 움직임에 따라 인근에 위치했던 마교가 천애랑을 척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게 마교의 척살대 몇 개가 천애랑을 노렸다.
하지만 천애랑의 활약에 마교의 척살대는 모두 전멸했다.
이어 숭산 자락의 평야에 자릴 잡은 무림맹과 천애랑은 높게 기치를 걸고 천마를 기다린다고 천하에 공표했다.
이 모습에 마교는 척살대를 보내 전력을 소모하는 선택 대신 무림맹과 마주하며 세를 규합했다. 천하 곳곳에 퍼져 국지전을 치르던 마교 무인들마저 모두 불러들였다.
이에 질 세라 무림맹도 정도무림의 모든 힘을 규합했다.
너른 평야를 가운데에 두고 두 세력은 끝없이 세를 규합하는데 힘을 썼다.
마교의 세는 어느새 3만 명이 다 되어갔고, 그보다는 못하지만 무림맹은 정도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한 자리에 이렇게 많은 전력이 모인 적이 없을 상황을 마주했다.
특이하게 그간 봉문하거나 은거하던 절강 주산군도의 보타문이나 해남도의 해남검파, 산동의 황보세가, 산동악가 등도 전장에 합류했다.
이는 정마대전이 끝을 향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림 역사에 다시없을 천마와 천애랑의 건곤일척 승부를 보고자 함도 크게 작용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무림맹으로선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전쟁의 분위기가 가득 무르익을 때 귀주에서 마교를 상대하던 의각원과 그 외 인물들이 천애랑을 찾아왔다.
“가주님!”
천애랑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설동과 의각원생들을 보았다. 의각원에서 지낼 때보다 많이 그을린 피부가 눈에 띄었다.
천애랑은 미소를 지으며 가솔들을 반겼다.
“모두 무탈했더냐.”
설동이 대표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가주님의 오른팔인 저 설동이 마교 놈들을 아작 냈지요!”
천애랑은 흐뭇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림자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살막은 상황이 어떠하지?]
[마교의 장로들을 암살하는 상황에서 특급살수 한 명을 잃은 것 외엔 특이사항 없습니다.]
유소소의 대답이었다.
[고생이 많았다.]
[감사합니다.]
천애랑이 유소소와 전음을 주고받는 사이 사천당가의 가주 당정아가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오.”
천애랑은 당정아를 보았다.
더운 지역에서의 길어진 전투 때문인지 의각원생들처럼 그녀도 상당히 그을려있었다.
그리고 터전을 두고 몸을 물릴 수밖에 없던 지난 시간의 고생들이 그녀의 얼굴에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굳세고 밝게 빛났다.
“참으로 고생 많았소.”
천애랑의 격려에 당정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맹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천 가주!”
“아! 야수왕. 오랜만이오.”
천애랑과 남림야수왕 맹건은 서로 반가운 표정으로 마주했다. 이내 맹건이 놀란 눈을 하더니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이것 참. 못 본 새 더 괴물이 되었네? 무슨 깨달음이라도 있었나?”
“그런 일이 있었지.”
“아아. 시간 좀 남으면 대련이라도 해보고 싶은데.”
맹건이 뚜둑뚜둑 소리가 나게 근육을 풀었다. 이때 송소걸이 나서며 한 마디를 했다.
“그 근육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을 향해 써주세요.”
송소걸은 마교의 진형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맹건은 송소걸을 보며 씨익 웃었다.
“천 가주가 그토록 살리고자 했던 녀석인가 보군. 천 가주 말대로 딱 봐도 까불까불하게 생겼어.”
“뭐요?”
송소걸이 눈을 부라리자 맹건이 으르렁거렸다.
“경지가 제법인 거 같은데 아쉬운 대로 네놈이 내 상대를 해줄 테냐?”
장난조차도 강한 호전성을 보이는 남림야수왕 맹건이었다.
그런 맹건에게 북해빙궁의 궁주 설엄이 다가왔다.
“히야! 저 자가 천 가주가 말하던 남림의 근육이구나.”
“남림의 근육? 이 자는 또 뭐야?”
맹건이 새로운 자극에 입꼬리를 올리며 설엄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