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공술사-190화 (190/200)

기공술사 190화

가볍게 시작했던 천애랑과 지노의 비무는 점점 격해지더니 이틀 주야를 보내고서야 멈췄다.

“좀 쉬자꾸나.”

여명이 비추는 산속의 아무 바위에 지노와 천애랑이 걸터앉았다.

“대단하구나.”

“덕분에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과례는 되었다. 나도 덕분에 지우의 모습을 추억할 수 있었으니.”

천애랑은 지노를 보았다. 연이은 전투에 피곤해 보이면서도 어떠한 후련함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이젠 어떻게 하십니까.”

천애랑의 질문을 받은 지노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애랑의 등 뒤에서 솟아나는 해가 지노 자신에게로 어둠을 미뤄내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 것을 자연이 알려주는 듯했다.

지노가 입을 열었다.

“등선을 하려 한다.”

놀라운 말이었지만 내심 짐작을 하고 있던 천애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백두산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야지. 오랜 지우들과의 추억이 있는 곳이자 시작이던 곳이니까. 끝도 그곳에서 맺는 것이 좋겠지.”

지노의 목소리엔 한 줌의 미련도 없었다. 그런 지노를 보며 천애랑은 생각에 잠기었다.

‘나도 원하는 바를 다 이루고 나면 저리 후련할 수 있을까.’

부러울 정도로 평온한 지노를 보고 있노라니 세상사가 부질없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네 녀석은 이제 어떻게 할 셈이더냐.”

지노의 물음에 대한 천애랑의 답은 곧장 나왔다.

“저는 오랜 숙원을 정리하러 가야죠.”

***

지노와 헤어진 천애랑은 서신을 작성하고자 했다.

“아버지와 무림맹 군사에게 보내는 겁니까?”

송소걸의 물음에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제 천마를 찾으러 갈 것이니 이와 관련해 두 사람의 조언이 필요하다.”

“하긴 그렇지요. 현재 천마의 행방이 묘연하니까요. 그런데 형님. 좀 더 조용히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말이냐.”

“현재까지 확인한 바로는 형님은 무림에서 사라진 존재입니다. 동귀어진의 수로 형님은 죽고, 대신 천마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소문이 나있더군요.”

천애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딱히 목격자는 없었는데 그런 소문이 어떻게 난 거지?”

“제 생각엔 아마 맹의 군사가 그러지 않았나 싶어요.”

“제갈 군사가?”

송소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도무림 정예들을 지원하러 가는 게 형님이 제갈 군사에게 보낸 마지막 서신이었죠, 아마?”

“그랬지.”

“제갈 군사 정도라면 아마 거기서 형님이 천마를 쫓았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천마와 형님의 행방이 묘연한 것을 보고 곧장 소문을 냈겠죠.”

송소걸이 말을 이었다.

“제갈 군사는 아마 이 수를 통해 무림맹의 사기를 고양시키고 마교의 반응을 살피고자 했을 겁니다. 보아하니 현재의 전황이 제갈 군사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같더군요.”

“허어.”

천애랑도 시전에 나도는 소문을 듣긴 했다.

연전연패 밀리던 무림맹이 하남에서부터 마교를 역공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보면 그 시점이 나와 천마가 격전을 벌인 직후.’

시기상으로 보면 모용단이나 별도의 조사대가 나와 천마의 전투를 확인하고, 보고를 거쳐 소문으로 이어지는 것보다 빨랐다.

이는 송소걸의 말마따나 제갈청이 직감에 의존한 추측으로 곧장 소문을 냈다는 것과 같았다.

천애랑은 혀를 내둘렀다.

항상 느끼지만 두뇌가 뛰어난 이들은 하늘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천애랑은 송소걸에게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우선 무림맹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림맹? 그냥 정보를 기다리면서 직접 찾아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어?”

송소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간 천마와 마교의 행보를 보면 다음의 수를 예측 가능하니까요.”

“그게 뭔데?”

“우선 천마와 마교의 핵심 계략을 말씀드릴게요.”

“그래. 마교의 핵심 계략이란 게 뭐지?”

송소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정도무림의 분열, 그리고 고립.”

“분열과 고립?”

“예. 과거부터 마교는 비동의 보물이나 암살을 이용해 정도문파들을 분열시켰습니다.”

“흐음.”

천애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런 일들이 있었지.’

전국에 우후죽순 드러나는 비동의 존재와 암살에 의한 쟁투. 이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중소문파들의 분열이 심각했었다.

‘심지어 제갈세가와 남궁세가의 자제들이 암살되어 두 가문도 큰 전투를 치렀다고도 했고.’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증좌가 명확하진 않았지만 서로간의 불신은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그런데 그 배후에 마교가 있다 생각하면 생각보다 앞뒤가 맞는다.’

송소걸이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한 마교의 계략은 전쟁과정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사분오열한 정도무림의 틈으로 녹림연맹과 장강수로연맹이 파고 들었죠.”

“그래. 산적과 수적들 때문에 무림맹 전선의 보급에 큰 차질이 있었었지.”

“맞아요. 원래라면 마교는 녹림, 장강수로연맹을 통한 산길과 물길의 차단으로 무림맹을 고립시키려 했을 겁니다. 서서히 말려 죽이는 거죠.”

송소걸의 해석에 천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우리가 해결한 거고.”

“네. 이는 마교 입장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하긴.”

“그래서 마교는 어쩔 수 없이 시기상조의 수를 뒀습니다.”

“시기상조? 지금처럼 총공세를 펼친 걸 말하는 건가? 그런데 시기상조라기엔 무림맹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거 같은데.”

마교의 공세가 성공적이니 결과적으로 시기상조의 수가 맞느냐는 물음이었다. 이에 대해 송소걸이 수긍했다.

“예. 맞아요. 고전을 면치 못했죠. 하지만 원래 이는 표면적인 현상이었어요.”

“고전을 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천애랑의 물음에 송소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천마라는 절대 존재의 등장이 모든 판을 뒤집어 엎어버렸어요. 천마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제갈 군사와 무림맹은 별동대를 조직해 마교의 심장을 도려내고자 했을 거예요.”

“별동대…?”

“예. 구파일방의 최정예들이 신강의 십만대산에 침투해 마교의 근본을 파괴하는 계획이었죠. 이는 제갈 군사가 제 아버지에게도 도움을 요청했기에 확실한 정보에요.”

“허어! 그런 수를 짜고 있었다고?”

천애랑이 놀란 눈을 했다.

‘만약 저대로만 실행됐다면 꽤나 과감한 수가 아닌가!’

마교의 근간을 날려버리면 제아무리 마교가 중원을 차지한다 한들 사상누각의 형국이 될 것이었다.

모래 위에 쌓인 전각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터.

그 이후부턴 조용히 숨을 죽이고 와신상담을 하던 정도무림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 마교의 잔재들을 완전히 뿌리 뽑겠다는 전략이었다.

천애랑이 물었다.

“하지만 천마라는 존재 하나에 그 계획이 다 틀어졌다는 거군. 혹시 그 정예가 천마와 호법들이 이끌던 부대와 맞붙은 그들인가?”

“예. 별동대 원래의 전력에 못 미치지만 그래도 3에서 4할의 전력이었을 겁니다.”

“그럤군.”

송소걸을 설명을 듣고 나니 천애랑은 제갈청과 무림맹의 고뇌가 보다 쉽게 이해됐다. 그리고 마교의 다음 행보가 어렴풋이 그려졌다.

천애랑이 말했다.

“마교의 다음 행선지가 무림맹의 본부가 되겠구나.”

정답을 말한 천애랑을 보며 송소걸이 미소를 지었다.

“네. 정파가 마교의 심장인 십만대산을 노렸듯 마교는 정파의 심장인 무림맹 본부를 노릴 겁니다.”

“그게 정도무림을 분열시키고 혼란을 야기하는데 가장 효과적일 테니까.”

“그렇죠.”

“그래서 무림맹으로 가자는 거였구나. 굳이 힘들여 찾아다니는 것보다 기다리고 있는 게 나타날 확률이 높을 테니?”

“예. 맞아요.”

“대단하다. 소걸아.”

천애랑은 송소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송소걸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소를 지은 천애랑이 말했다.

“그럼 당장 무림맹으로 가자.”

***

무림맹 본부가 위치한 하남 낙양의 시전.

해가 어둑해지는 시간에 시전에선 대량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범인은 단 한명.

“마교의 장로 드라쿠다! 양민들을 지켜라!”

드라쿠.

흡혈을 통한 체력과 내공회복의 이능을 가진 이종이자 마교의 장로.

드라쿠는 하북팽가에서 모습을 드러낸 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거였다.

“녀석은 혼자다! 겁먹지 말고 합공을 해!”

드라쿠의 손가락이 빛날 때마다 하루를 마무리하던 시전의 상인들과 행인들이 죽어나갔다.

이를 막고자 급히 달려온 무림맹의 무사 수십도 마찬가지로 쉽게 죽음을 맞이했다.

단순한 수적 우위가 전혀 먹히지 않는 상대.

맹의 군사부에서 보고서와 계락들을 정리하던 제갈청은 다급히 뛰쳐나와 상황을 살폈다.

“백호단과 청룡단, 현무단은 적을 막아라!”

무림맹 본부가 공격당하는 상황을 대비해 제갈청이 맹에 상주시킨 정예 무력단들이 나섰다.

무력단 단주들의 경지는 초절정의 극, 그 단원들도 모두 일류 이상의 고수들이다. 그 숫자가 무려 80여 명.

드라쿠가 화경의 경지로 알려져 있으니 방진을 이용한 합공을 한다면 드라쿠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제갈청은 생각했다.

무림맹을 위해 제갈청이 만든 방진은 무림맹주가 평가하기로도 소림의 백팔나한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했었다.

그를 방증하듯 실제로 제갈세가 진법의 묘리가 담긴 무력단들의 방진은 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드라쿠의 신형이 번쩍이고, 단원들의 시신들이 늘어갈수록 무력단이 무너지는 속도는 빨라졌다.

“크아악!”

“단주님!”

특히 무력의 주축을 담당하던 단주들이 드라쿠에게 죽은 뒤로는 불과 반 시진을 버티지 못하고 무력단의 방진이 무너졌다.

제갈청은 식은땀을 흘렸다. 드라쿠에게서 천마의 절대적인 무위가 보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드라쿠를 상대할 무림맹의 전력이 없다.’

물론 무림맹 무사들이 있었지만 나서봐야 드라쿠의 제물이 될 뿐일 터다.

제갈청의 수심이 깊어질 때였다.

“어쩐 일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제갈청의 도움요청을 수락한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수검이 제갈청에게 다가왔다.

제갈청의 얼굴에 반색이 돌았다.

“고맙소! 시간이 없어 자세한 설명은 어려우나 지금 남궁의 힘이 절실하오!”

지난 전쟁으로 서먹해진 제갈세가와 남궁세가다.

개인적 감정으로는 다신 마주하고 싶지 않은 둘이지만 정도무림의 존망이라는 하나의 기치 아래 어렵게 힘을 합칠 수 있었다.

“본인은 사사로움이 아닌 정도무림의 대표로서 이 자리에 온 바. 악을 징치하러 나가야지.”

대협의 풍모를 보이는 남궁수검의 말에 제갈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를 했다.

“드라쿠 장로는 마교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절대고수요. 저 자에게 팽가주도 당했다고 하니 조심하시오.”

제갈청의 당부에도 남궁수검의 표정엔 자신감이 충만했다.

“괜한 걱정은 넣어두시지. 창궁검대!”

“충!”

남궁수검이 남궁세가의 정예 창궁검대를 이끌고 나섰다.

15명밖에 되지 않는 무력대이지만 모두가 절정 이상에 초절정의 고수가 4명이나 포함된 남궁세가의 최정예였다.

게다가 이를 이끄는 남궁수검은 완숙한 화경의 고수.

남궁수검은 자신들이 드라쿠를 잡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전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시진.

앞선 무력단보다 나았지만 결국 남궁수검과 창궁검대가 무너졌다.

드라쿠가 붉은 입술을 혀로 적시며 말했다.

“제법인 녀석들이군.”

드라쿠의 손아귀엔 창궁검대 대원 하나의 목을 틀어쥐어 있었으며, 대원은 피가 빨리며 목내이처럼 말라 비틀어졌다.

그와 동시에 드라쿠의 상처들이 회복됐다.

“크윽.”

멀쩡하게 회복하는 드라쿠와는 다르게 내상과 모든 기력을 소진한 남궁수검이 신음을 뱉었다.

그는 남궁의 정예를 홀로 상대하면서 지칠 기세를 보이지 않는 드라쿠에 대경실색을 했다.

‘이 정도면 장로를 넘어 천마에 준하는 것 아닌가!’

단일 세력으로서 끊임없이 고수를 배출하는 마교에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드라쿠가 말했다.

“그간 봤던 검술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뿐. 이젠 끝을 보자.”

“어떻게 흡혈 따위로 그리 강해질 수 있는 거지?”

남궁수검의 물음에 드라쿠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정파 녀석 아니랄까 봐 오만한 생각을 갖고 있구나. 네가 이해하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여기는 건가? 그저 네 녀석이 더 높은 하늘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약한 것일 뿐이다. 그런 녀석에게 내 굳이 무얼 더 설명할까.”

“크윽.”

드라쿠의 비아냥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남궁수검은 이를 악다물었다.

그 모습을 비웃은 드라쿠가 말했다.

“남궁 녀석들의 피 맛이 제법이었기에 네 녀석의 피 맛도 심히 궁금하구나.”

말과 동시에 드라쿠가 손을 뻗었다. 기함할 기운이 남궁수검을 감싸며 드라쿠에게로 끌어당겼다.

‘이 상황에서 저자의 손에 잡히면 죽는다.’

남궁수검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죽음이 두렵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순 없다!’

남궁수검은 중단전을 때려 자신의 선천지기를 자극했다. 동귀어진의 수라도 이루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그때.

하나의 손길이 남궁수검을 붙잡으며 드라쿠의 힘으로부터 떨쳐냈다. 동시에 또 다른 신형이 드라쿠를 공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