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89화
천애랑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마기도 자연지기로 받아들이라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천애랑은 멍하니 생각에 잠기었다.
‘혹시 내가 지금까지 본능적으로 마기를 거부하고 있었단 건가. 그래서 단전에서 내공을 꺼낼 수 없던 거였고?’
현재 단전이나 혈도의 상태는 부상이 있다 해도 기능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공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에 천애랑은 큰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 이유가 마기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달리 말하면 자연의 기운을 의심해서였다라.’
기공술의 기본 중 기본인 자연지기의 교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였다.
‘그렇다면 마기도 하나의 자연지기로 받아들인다면 되는 건가.’
시시각각 변하는 천애랑의 표정을 보며 지노가 말을 더했다.
“빛이 있다면 어둠도 있는 법. 자연에 어찌 빛만 가득할 수 있겠느냐. 모든 것을 편견 없이 보아라.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해라. 그것이 자연이다.”
“아아.”
천애랑의 입에서 깊은 경탄이 나왔다. 깨달음의 확신을 얻은 천애랑은 이내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송소걸은 천애랑이 깊은 심상에 빠진 것을 보며 지노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잘 들었고, 형님에게 준 도움은 감사합니다만 지금부터는 물러나주시면 좋겠습니다.”
송소걸의 단호한 행동에 지노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 깨어나거든 이곳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오라고 전해주거라.”
말과 함께 지노의 신형이 사라졌다.
‘귀신이 따로 없네.’
화경의 경지로도 파악하지 못할 존재가 있다는 것에 송소걸은 혀를 내둘렀다.
송소걸은 천애랑을 바라봤다.
고통 때문인지 일그러진 표정을 한 천애랑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들과 함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형님…….’
천애랑의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좋은 방향이길 기도하며 송소걸은 호법을 섰다.
***
천애랑은 오랜만에 할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애랑아.’
멸문 후 혈혈단신으로 어린 손자를 키우며 가문의 모든 것을 인계하고자 노력한 인물, 천단호가 어릴 적 함께 지내던 초옥에 앉아 천애랑을 부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천애랑은 과거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할아버지의 곁에 앉으며 함께 지냈던 진법 안의 풍광을 둘러봤다.
백두산 천애자연의 기운을 한가득 붙잡아 놓은 터라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단전에 내공이 충만해지는 공간이었다.
이런 곳에서 20년을 생활한 천애랑은 기함할 무공의 성장을 이룩했고, 반대로 천단호는 건강이 악화되었다.
건강이 악화되기 어려운 장소에서 천단호가 그리 된 것은 천애랑의 진일보를 위해 몸에 부담되는 진법을 추가로 펼쳐서였다.
부상당한 본인의 몸보다는 천애랑의 성장과 안위만을 생각했던 그때의 할아버지를 보며 천애랑은 반가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할아버지…….’
‘애랑아.’
하염없이 자신을 부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천애랑은 가슴이 떨려왔다.
꿈이라서 그런지 조금 전만 해도 건강해보이던 할아버지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져갔다. 죽기 전, 자신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던 때와 같았다.
‘애랑아.’
‘예. 할아버지.’
천애랑의 대답에 천단호는 미소를 보였다. 그러곤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공가를 위해 많은 애를 썼구나.’
짧은 표현이었지만 천애랑은 그간의 고생을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서 인정받은 기분을 느꼈다.
‘어린 네가 홀로 짊어질 짐이 너무 많았어. 그런 너를 먼저 두고 떠난 나를 원망했느냐.’
천단호의 물음에 천애랑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이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아 입술을 강하게 짓씹으며 말했다.
‘전혀요. 제가 할아버지를 어떻게 원망해요. 그런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언제나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는걸요.’
‘그렇다고 벌써부터 이 할애비를 만나러 오지 않아도 된다.’
울먹이던 천애랑은 천단호의 말에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알겠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그래. 그나저나 그간 예쁜 여식들은 좀 만났더냐.’
‘할아버지…….’
천단호의 농담에도 천애랑은 함께 웃지 못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천단호의 안색이 마기에 잠식된 듯 검게 물들어갔기 때문이다.
꿈인걸 알면서도 가슴이 무너져만 내렸다.
‘이 할애비는 예나 지금이나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말을 끝으로 천단호의 눈이 감겼다. 이내 천단호의 신형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천애랑은 스러져가는 천단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깊은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천애랑은 몸을 움직이고자 내공을 일깨웠다.
크그그그그!
폭발적인 내공이 전신세맥과 혈도들을 내달리자 천애랑은 몸을 조금은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천단호에게는 닿지 못했다.
‘할아버지!’
더 흐릿해져만 가는 천단호를 보며 천애랑이 자연지기들을 끌어 모았다.
대지의 기운, 물의 기운, 바람의 기운, 불의 기운 등 이곳 진법 안에서 느끼고 습득했던 기운들을 받아들였다.
쿠구구구구구구!
그러자 몸이 보다 수월하게 움직여지며 천단호에게 거의 닿아갔다. 하지만 마지막 한 치가 모자랐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는 법. 자연도 이와 같으니 모든 기운에 음과 양이 공존하며 서로에게 작용한다. 그러니 마기도 이젠 나의 기운이라.’
주문과도 같은 천애랑의 읊조림과 함께 그의 몸을 구속하던 모든 것이 풀어졌다.
파아앗!
‘할아버지!’
자유를 얻은 천애랑은 한줌의 희미함만 남은 천단호를 빠르게 끌어안았다.
천단호는 미소와 함께 천애랑의 볼을 어루만졌다.
‘대견하구나.’
마지막 말을 남긴 천단호는 하나의 빛이 되어 사라졌다.
이어 천애랑은 깊은 충만함과 공허함을 함께 느끼며 꿈에서 깨어났다.
***
천애랑과 송소걸이 머물던 마을로부터 북쪽에 위치한 산.
사람의 발길이 없는 산길을 따라 천애랑과 송소걸은 하염없이 걸어 올랐다.
“형님. 확실히 몸이 괜찮은 거 맞죠?”
걷는 내내 송소걸은 천애랑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간 운기조식을 하던 천애랑이 눈을 뜨자마자 이곳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물론 송소걸의 눈에 천애랑이 건강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긴 했다.
‘우선 잘 걷긴 하는데.’
송소걸은 천애랑의 보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형님의 보법이 왜 이래?’
보법이 모든 무공의 기본인 만큼 무인들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보법이 잘 벼려진다. 이는 천애랑의 걸음걸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천애랑의 보법은 그런 고수들의 걸음과는 사뭇 달랐다.
‘암살자 같다가도 무공을 모르는 시정 상인 같다가도.’
송소걸의 혼란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과거엔 허점이 전혀 없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송소걸의 눈에 지금의 천애랑은 빈틈 투성이었다. 당장 저 빈틈으로 검을 찌르면 의각원에서 그토록 원하던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는 순간 천애랑에게서 빈틈이 완전히 사라졌다.
‘알 수가 없네.’
혼란스런 마음에 송소걸은 고개를 흔들고는 천애랑을 다시 살폈다.
‘형님의 기운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어.’
부상 전의 천애랑은 항상 기운을 잘 갈무리하며 다녔었다.
그런 천애랑을 송소걸이 기감을 높여 바라볼 때면 거대한 바다를 보는 듯 끝을 알 수 없는 경외감 같은 것을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의 천애랑은 기운이 잘 갈무리된 게 아니라 오히려 들쭉날쭉한 느낌이었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눈앞의 나뭇잎처럼 느껴졌다.
‘자연……?’
송소걸의 의문 가득한 눈빛을 뒤로 하고 천애랑은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둘이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착하자 그곳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지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지노와 천애랑의 시선이 허공에 교차됐다.
지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왔느냐.”
이에 천애랑은 지노를 향해 깊게 포권을 취했다.
“어르신의 도움으로 큰 깨달음과 성취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부상에서도 회복했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심어린 천애랑의 말에 지노는 미소를 지었다.
“내게 과례는 필요 없다. 그저 내 기대 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놀라울 뿐이다.”
지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애랑과 마주했다.
“가까이 마주하니 더 대단하군. 당장 움직일 수 있더냐.”
“예.”
천애랑은 짧게 대답하고선 지노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곤 송소걸에게 주의를 주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뒤로 물러나 있어라.”
“조심하세요 형님.”
천애랑과 지노가 비무를 벌이고자 함을 알기에 송소걸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어디 한 번 보자.”
지노가 손을 까딱이자 천애랑이 기운을 개방했다.
“어어?”
구경하기 편하게 적당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갔던 송소걸이 급히 나무를 붙잡았다.
천애랑의 기운에 감응하듯 산봉우리가 거세게 뒤흔들렸기 때문이다.
쿠구구구구구구구.
“제법이다!”
천애랑의 기운이 기꺼운 듯 지노가 마주 기운을 개방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쩌저저적.
산봉우리가 더욱 거세게 흔들리더니 땅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서로 기운만 개방했을 뿐인데…….’
기함할 광경에 송소걸은 마른침을 삼켰다.
콰드득! 콰드득!
두 기운의 충격에 나무둥치가 갈라지고 나무들이 넘어지기 시작했다.
송소걸이 올라타 있던 나무도 기운의 여파를 피할 수 없어 기우뚱 쓰러져갔다.
송소걸은 다급히 몸을 피하며 두 사람을 관찰했다. 그러다 더욱 놀라운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쩌저적! 쩌저저저적!
땅의 갈라짐이 더욱 심해지더니 결국 산봉우리를 이루던 거대한 암석과 땅이 갈라지며 산사태를 만들어냈다.
쿠구구구구구! 콰과과과과과과과!
요란한 굉음와 함께 무너지는 산.
이러한 사태를 만든 장본인들은 태연하게 산사태로 흘러내리며 바위와 나무들을 오가며 연이어 기운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다만 예기치 못하게 산사태에 휩쓸린 송소걸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이런 미친!”
한참 산사태의 토사들을 폴짝이며 산 아래로 내달리던 송소걸은 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형님! 영감님!”
송소걸의 외침과 동시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천애랑과 지노의 신형이 산 아래로 쏘아졌다.
경탄할 경공술과 함께 마을 어귀에 도착한 천애랑과 지노는 산사태를 바라보며 동시에 진각을 밟았다.
토룡지와(土龍之臥).
용천혈을 통해 빠져나간 두 사람의 기운이 대지의 결을 조정하며 거대한 산사태로 달려갔다.
두 사람의 기운에 의해 광범위하게 솟구친 땅거죽이 산사태와 충돌했다.
쿠드드드드드드득------!
콰드드드드드드득------!
거대한 충돌이 한참을 이어진 후 두 사람의 기운에 의해 산사태가 멈추었다.
경천동지할 소란에 마을사람들이 놀라 뛰쳐나왔다.
산사태를 막아내는 과정을 목격한 마을사람들이 천애랑과 지노를 마을을 지켜낸 영웅으로 칭송했다.
몇몇은 지노를 보며 신선이 강림했다고 절을 했다.
이러한 소란 속에서 천애랑과 지노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마음껏 맞부딪쳐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마을에서 멀리 신형을 날렸다.
덩그러니 남게 된 송소걸이 고운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소리쳤다.
“뭐야! 수습은 이게 끝이에요? 같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