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88화
천(天).
하늘이라는 의미기도 하지만 지노의 입에서 나온 천은 천애랑에게 있어서 그 의미가 달랐다.
“설마 기공가의 1대 가주님을 말하는 거요?”
기공가문의 개파조사이자 1대 가주의 이름은 천(天)이었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이가 맞다.”
천애랑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1대 가주님의 역사가 수백 년도 훌쩍 더 되었으니 오랜 지우라는 지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농담을 하는 것 같진 않은데.’
농담이라기엔 지노의 표정이 진지했고, 또한 고작 이런 농담이나 하고자 이곳에 나타난 건 아닐 터였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천애랑의 물음에 지노가 아련한 눈빛을 하며 말했다.
“무림의 역사가 기억되기보다 더욱 오래 전이다. 영기가 가득한 백두산엔 세 명의 신선이 살고 있었다. 아, 물론 지금의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당시의 신선은 속세를 버리고 자연을 탐구하는 이들에 가까웠으니.”
‘신선……?’
뜬금없는 소리에 천애랑과 송소걸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런 두 사람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노의 말이 이어졌다.
“신선들은 산에 오르며 속세의 이름 모두 버렸다. 그리고 각자 천(天), 지(地), 인(人)이라는 도명 같은 걸 사용했다.”
‘천, 지, 인… 설마 지노가 말하는 신선이?’
천애랑은 놀란 눈을 했다. 지노가 말한 신선이라는 이들 중 두 개의 이름이 누구인지 쉽게 유추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기지 않은 내용이기에 천애랑은 지노의 말에 더욱 집중했다.
“신선들은 자연에 대해서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자연지기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
지노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게 자연지기에 대해 탐구하는 오랜 시간 동안 지(地)의 실력이 셋 중 가장 뛰어났다. 지(地)는 이러한 부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지노의 눈이 심중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천(天)이 기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고선 세 신선들 중 가장 강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격차는 점점 벌어져만 갔다. 격차는 거의 백 년에 흐르기까지 무너지지 않았지.”
지노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항상 으뜸이었던 지(地)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언제부턴가 자연의 신비에 대해 탐구하는 것보다 천(天)을 이길 수 있는 방법만을 연구했다.”
천애랑과 송소걸은 숨소리조차 아낀 채 이야기에 집중했다.
지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국 지(地)는 천(天)의 깨달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지. 게다가 어느샌가 인(人)의 깨달음도 높아져 지(地)의 경지를 앞서자 지(地)의 자존심은 크게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요……?”
이야기에 빠져든 송소걸의 반문이었다.
“지(地)는 더 큰 깨달음을 얻어 지우들을 다시 앞서겠다는 각오로 지우들의 곁을 떠났다.”
“아아.”
송소걸의 탄식에 지노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지(地)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地)가 사라지자 천(天)과 인(人)이 지(地)를 찾고자 많은 노력을 했었다더군.”
지노는 목이 타는지 근처에 남은 술병 하나를 허공섭물로 끌어와 마셨다.
“여하간 지(地)가 사라진 후 긴 세월이 흘렀다. 백두산의 신선들의 행적에도 변화가 생겼지.”
“어떻게 말이오?”
“인(人)은 기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들을 모든 인간들에게 널리 알려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었다더군. 그래서 인(人)은 백두산을 떠났다. 그러곤 그는 신선이 아닌 존재들도 자연지기를 느끼고 사용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규범을 만들었다.”
“설마 그게……?”
“그래. 인(人) 덕분에 현재 무림에서 흔히 말하는 단전에 기반한 심법과 무공에 대한 법칙 같은 게 생긴 거지.”
“말도 안 돼!”
송소걸이 입을 떡 벌리며 믿기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놀라운 마음은 천애랑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격한 반응에도 지노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저 해야 할 말을 오늘 다 쏟아내겠다는 사명감이 있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천(天)의 행보는 인(人)과는 또 달랐다.”
천애랑이 움찔하며 귀를 기울였다.
“천(天)은 자신의 깨달음을 더 높이고 견고하게 하고자 백두산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다 우연히 백두산에서 길을 잃어 위기에 처했던 여인과 인연이 됐다더군.”
“헉! 설마 가정을 꾸린 겁니까?”
송소걸의 놀람에 지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天)과 여인의 사랑으로 가정이 꾸려졌고, 그 결실들이 점차 많아져 하나의 가문을 이루게 됐다.”
지노의 시선이 천애랑에게로 향했다. 이에 송소걸도 덩달아 천애랑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천애랑은 평소답지 않게 긴장된 마른침을 삼켰다. 지노의 입이 다시 열리기까지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지노가 말했다.
“천(天)이 세운 가문은 모두가 아는 기공가다. 네 녀석도 잘 알다시피 기공가문 직계의 성씨가 천인 이유가 이것이고 말이지.”
“허어…….”
송소걸이 입을 다물 생각조차 못한 채 가감 없이 놀람을 표현했다.
천애랑 또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지노의 입술만 쳐다봤다.
할아버지를 통해 가문의 역사에 대해서 배웠지만 지노의 입에서 나오는 비사(祕史)는 모두 처음이었다.
지노가 술을 홀짝여 목을 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지(地)의 이야기로 돌아오지. 지(地)는 자신의 깨달음과 성장을 막고 있던 것이 질투라는 지독하고도 하찮은 감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폐관수련을 중단하고 오랜만에 지우들을 만나러 갔다.”
지노가 어두운 표정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지우들은 이미 모두 이 세상에 없었다.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흐른 탓이겠지. 그리고 지(地)는 지우들이 남긴 것들을 보며 또다시 지우들에게 패배감을 느꼈다.”
“왜요?”
송소걸이 자라처럼 앞으로 목을 빼고 다음 말을 재촉했다.
“인(人)이 남긴 유산으로 무림이라는 세상이 천하를 이끌고 있더군.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지(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아.”
천애랑과 송소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地)가 천(天)의 유산을 바라볼 때도 비슷했다. 사랑이라는 알 수 없는 감정의 결실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지. 특히 기공가의 후손들이 지우의 외모나 행동들과 비슷한 것을 보면 그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지노가 이어 말했다.
“지(地)는 욕심에 사로잡혀 긴 세월을 허비한 본인보다 더 큰 업적을 이룬 지우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들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지(地)는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다 어딘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다만 그곳이 주인이 있는 곳인 줄 몰랐던 거지.”
“설마 그게 혈교…….”
천애랑의 의문을 지노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地)는 지우들이 없는 세상에 낙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대우해주고 쉬게 해주는 곳에 별 불만 없이 머물렀다. 물론 머물게 해준 곳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도 큰 감흥은 없었다.”
“흐음.”
천애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찬호가 마교의 소교주인 것을 알게 됐고, 송소걸이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심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이들이 없었다면 나 또한 어떻게 행동했을지 몰랐을 터.’
그때의 들끓었던 분노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천애랑은 내심 지노의 생각과 행동이 이해되었다.
이때 송소걸이 의문을 표했다.
“보아하니 정황상 어르신께서 지(地) 신선이신 것 같은데 맞아요?”
“믿으라고 할 생각은 없다.”
지노의 대답은 담담하고 간결했다.
“믿기지 않은데 보고 있자니 안 믿을 수도 없고.”
송소걸은 눈을 좁혀 지노를 살피고는 혀를 찼다.
‘경지가 가늠되지 않아.’
이제는 명색이 화경의 경지인 송소걸이다. 그럼에도 지노의 경지가 가늠되지 않으니 그의 말을 마냥 거짓으로만 치부하기 어려웠다.
지노가 송소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천애랑을 향해 천천히 물었다.
“그런데 내가 목이 아프도록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뭘까.”
“으음……. 모르겠소.”
고심을 하던 천애랑은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함께 고민하던 송소걸이 손뼉을 쳤다.
“혹시 지우의 마지막 후손에게서 지우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천애랑은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며 송소걸을 흘겨봤다. 그러나 혹시나 싶어 쳐다본 지노의 표정은 생각과는 달랐다.
“진짜입니까?”
어느새부턴가 지노를 대하는 천애랑의 말투가 변해있었다.
‘선조님의 지우가 맞는다면…….’
나이 차이가 어찌 됐든 다른 문파의 가주들에겐 하오체를 사용했지만 차마 가문의 큰 어른과 비슷한 격인 분에게까지 본능적으로 그러기가 어려웠다.
지노는 천애랑을 보며 말했다.
“맞다. 오랜 세월을 지낸 내게 있어 이제 세상에 남은 단 하나의 미련이나 욕심이라고 한다면 그건 지우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아.”
천애랑은 지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땐 혈교의 고수가 나를 왜 살려두나 했더니.’
아마도 살아남아 옛 선조님만큼 강해지길 원하지 않았나 싶었다.
이내 천애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보다시피 현재 제 몸으로 무공을 펼치기가 어렵습니다.”
천애랑도 지노와 다시 대결을 해보고 싶었다.
‘그땐 속수무책 당했지만 지금이라면.’
특히 기공가의 무공을 알고 있고 선조님과 함께 공부를 했던 지노와의 승부이기에 호승심이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이래서야 어찌 그런 대결이 가능하단 말인가.
“안 그래도 내 말하면서 네 녀석의 몸 상태를 살폈다. 마기가 있더군.”
상태를 정확히 짚는 지노의 말에도 천애랑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지노의 말에 천애랑은 놀란 눈을 했다.
“아마 치료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
천애랑이 놀라 되묻자 지노가 설명을 했다.
“지금 보이는 네 녀석의 가장 큰 문제는 자연지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천애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멸문을 겪었기에 배움의 환경에 제약이 있었다지만 천애랑은 내심 할아버지로부터 기공가의 대부분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특히 기공가의 공부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자연지기를 느끼는 것이기에 자연지기에 대해선 스스로를 잘 파악하고 있다 자신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가 기공가문의 개파조사인 선조님과 지우이기에 그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연의 기운엔 무엇이 있더냐.”
선문답 같은 질문에 천애랑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 바람, 대지, 불, 번개 등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처럼 다양하지 않습니까.”
“다양하다라.”
천애랑은 지노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며 무언가 틀린 답을 내놓았는지 되짚어봤다.
‘설마.’
무언가가 떠오른 천애랑은 지노에게 물었다.
“혹시 마기 또한 자연지기 중 하나라고 말씀하시고자 하는 겁니까?”
지노는 대답 대신 만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