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87화
술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어색한 사이를 빠르게 좁혀주는 것.’
이러한 힘은 천애랑과 찬호, 송소걸에게서도 여지없이 발휘됐다.
한 모금이 두 모금이 되고, 송소걸의 너스레가 더해지며 세 모금, 네 모금으로 이어졌다.
그때부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홀짝이며 마시는 지경이 됐다.
술병이 입에 닿고 바닥으로 내려오는 횟수마다 정마대전이나 복수 같은 복잡한 감정들도 점점 바닥으로 내려놔졌다.
그럴수록 술술 들어가는 술처럼 어색한 기류가 감돌던 의형제들 간의 대화도 술술 풀려만 갔다.
그렇게 천애랑과 찬호, 송소걸의 대화는 밤을 새고 이어졌다.
“아니! 그때 애랑 형님 여장 시켰을 때 말이에요!”
“아아 기억나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기회가 없었을 텐데요. 춤이라도 시켜볼 걸 그랬어요.”
“흐하하하! 그것도 볼만했겠다.”
“그죠?”
송소걸과 찬호의 수다에 천애랑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둘의 농담에 천애랑도 한 수 거들었다.
“그때 완강하게 말해서라도 찬호를 여장시켰어야 했다. 만약 찬호도 여장을 했으면 내 기꺼이 춤이라도 췄을 거야.”
“뭐?”
“으하하하하! 그것 또한 볼만하겠는데요?”
찬호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고, 송소걸은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했다.
즐거워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천애랑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이런 즐거움도 이 자리가 끝이겠지.’
지금이야 술과 추억에 기대 서로 웃음을 공유하지만 세 사람의 위치는 물과 기름과 같았다.
오늘 밤이 지나면 아마 각자의 위치로 향할 것이다. 이건 선택이 아니었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이었다.
이러한 점을 천애랑 뿐만 아니라 찬호와 송소걸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셋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가 꿈처럼 사라질까봐 더 떠들고 더 웃었다.
***
강한 햇살에 천애랑은 두 눈을 비볐다.
‘결국 못 이기고 잠들었었나.’
어떻게 잠든 건지도 모르게 누워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래도 마냥 나쁜 기분만은 아니네.’
부상에서 깨자마자 만들어진 술자리였다. 원래라면 환자가 취할 수 없는 어불성설의 행동이었겠지만 미룰 수 없는 귀한 순간이었기에 무리를 했다.
‘나름 조절한다고 했는데.’
천애랑이 혀를 찼다.
원래 셋 중에선 술이 가장 센 이가 자신이었건만 확실히 부상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애랑은 객잔 안을 둘러봤다.
어지러이 널브러진 술병들과 그 공간 안에서 용케 가부좌를 틀고 있는 송소걸이 보였다.
송소걸이 기척에 눈을 떴다.
“일어나셨어요?”
“그래.”
“찬호 형님은 갔습니다.”
“그래.”
두 사람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공유됐다. 하지만 말도 없이 떠난 찬호에 대해선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둘은 그저 각자가 할 수 있는 것들에, 그리고 해야 하는 것들에 신경 쓸 뿐이었다.
“끄응.”
천애랑은 여전한 고통에 인상을 쓰며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이에 송소걸이 급히 다가와 물잔을 건넸다.
“고맙다.”
“예. 호법 서드릴게요.”
긴 말 없이도 척척 대화가 통하는 둘이었다.
송소걸이 적당히 물러나자 천애랑은 눈을 감고 천천히 내부를 관조했다.
‘혈도들이 다 상했어.’
불에 지져지기라도 한 듯 혈도 내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하게 나쁜 건 아니었다.
‘다행이도 혈도가 꼬이거나 끊긴 곳이 없어.’
찬호가 직접 치료를 했다더니 큰 덕을 봤다. 천애랑은 혈도들을 지나 단전들을 살폈다.
‘중단전은…….’
상처가 있었으나 생각보다 회복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하단전인데.’
하단전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천애랑은 좀 더 감각을 기울여 하단전을 살폈다.
‘……단전이 깨졌었나?!’
기공가의 심법으로 그 누구보다 크고 강한 하단전의 그릇을 가진 천애랑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릇 한쪽이 이질적인 무언가로 메워져있었다. 정순하지만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이게 찬호의 선천지기인가.’
평생 기를 연구하는 기공가, 그 지식들을 배운 천애랑이다.
깨어진 하단전을 선천지기로 메운다는 것은 처음 봤지만, 만약 시도한다 해도 성공확률이 거의 없다는 걸 잘 안다.
환자의 단전이 반발하는 영향도 크지만 무엇보다 선천지기를 적당히 뽑아내는 게 어렵기 때문이었다.
‘생명을 거는 행위지.’
그럼에도 이렇게 성공했다는 것은 찬호의 능력이 하늘에 닿았음과 함께 그가 목숨을 걸고 이를 실행했다는 의미였다.
‘찬호…….’
천애랑은 지난 밤 찬호의 마지막 미소를 떠올렸다.
천애랑은 하단전에선 낯선 기운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빠르게 상념을 지우고 마저 하단전을 살폈다.
‘이건! 왜 마기가……?’
하단전 내부를 살핀 천애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찬호가 마신단이라는 마교의 영약을 사용해 치료를 했다고만 들었다. 이렇게 하단전에 마기가 자리하고 있을지는 몰랐다.
천애랑은 조심스레 하단전의 기운을 자극했다.
꿈틀.
천애랑의 자극에 기존 내공과 새로이 자리한 마기가 출렁이며 하단전에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커헉!”
천애랑은 격통에 피를 토하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
천애랑은 방의 창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아침햇살 가득한 작은 도시의 거리엔 사람들의 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천애랑의 표정엔 활기가 없었다.
‘운기를 할 수가 없어.’
내공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단전이 깨질 뻔했지만 그릇 자체의 기능이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운기조식을 하려고 하단전에서 기운을 뽑을 때가 문제였다. 이럴 때면 엄청난 격통과 함께 기절하기가 일쑤였다.
‘대체 왜.’
짐작컨대 하단전에 들어찬 마기가 문제일 것 같았다.
‘하지만 하단전 자체가 아픈 건 아닌데.’
운기를 하지 않는 동안에는 딱히 아픈 게 없었다. 말인즉슨 하단전 안에 마기가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을 일으키는 건 아니라는 의미기도 했다.
‘혈도는 상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일은 아닐 테고. 하아. 모르겠네.’
천애랑은 답을 구할 수 없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고민할수록 마음이 타들어 갔다.
‘설마 이대로 천마에 대한 복수를 이룰 수 없는 것인가.’
평생을 쌓아온 내공을 잃고 필부로 살아가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철천지원수인 천마에 대한 복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형님. 너무 심려치 마세요. 지금 마차를 구해놨으니 의각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면 해결될 겁니다.”
걱정 어린 송소걸의 말에 천애랑은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는 얼마나 걸리려나.’
남들보다 뛰어난 회복력을 가진 천애랑이다. 하지만 단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음을 송소걸을 통해 익히 알지 않은가.
게다가 치료가 끝이 아니었다.
‘다시 회복한다한들 천마를 이길 수 있을까.’
탈마, 즉 현경의 경지는 가히 신의 영역이라 할 수 있었다.
화경이 자연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 한다면 현경은 자신의 의지에 자연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경지였다.
그러다 보니 같은 무공, 같은 초식을 사용해도 가히 화경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력을 내는 듯했다.
천마와의 결투를 떠올리자 천애랑은 등의 상처가 욱신거려왔다.
천애랑이 창가에서 시선을 떼곤 송소걸을 쳐다볼 때였다.
“형님!”
천애랑은 송소걸의 눈이 화등잔만 해지면서 검을 출수하는 게 보였다. 동시에 귓가에서 병장기가 충돌하는 듯한 굉음과 기파가 울려 퍼졌다.
“크윽!”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기에 천애랑은 기파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으며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내공을 잃었다고 무공의 식을 잃은 것은 아니기에 천애랑은 금세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이명의 잔재에 휘청거렸다.
이에 송소걸이 재빠르게 다가와 천애랑을 보호하듯 부축했다.
“형님! 괜찮으세요?”
“어어.”
크게 고개를 흔든 천애랑은 눈을 좁히며 상황을 살폈다. 그러곤 놀라운 눈을 했다.
창가엔 선풍도골의 노인이 고고히 서있었다. 이는 천애랑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지노……?
지노는 과거 담가의 남매를 구하기 위해 음살단과 다툴 때, 음살단주였던 요향의 신변을 확보해 갔던 노인이었다. 그리고 기공가의 무공을 펼쳤던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다.
“기억하는군.”
지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형님. 아는 자입니까?”
송소걸이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물어왔다. 이에 천애랑은 미간을 좁혔다.
현 장소는 하오문에서 제공하는 은밀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악연일지 모르는 인연이 등장했다.
어떻게 이곳을 알았는지의 의문을 떠나서 절대고수인 지노의 등장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하필 몸이 성치 않을 때.’
천애랑은 송소걸 혼자서 지노를 상대할 수 있을지를 가늠했다.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송소걸이 화경의 초입이라지만 지노는 그 이상인 존재.’
아무래도 송소걸 혼자서는 무리이지 않나 싶었다.
“긴장해라. 대단한 고수다.”
천애랑의 말에 송소걸이 마른침을 삼켰다.
‘애랑 형님이 고수라고 하다니!’
천하에 손꼽히는 존재들을 쉬이 만나면서도 대단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던 천애랑이었다.
심지어 고수이니 긴장하라고 경고하는 천애랑의 말 자체가 낯설었다. 그렇기에 송소걸은 더욱 경계를 높이며 지노를 바라봤다.
지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치고자 온 게 아니다.”
말을 증명하듯 지노가 내기를 죽인 채 뒷짐을 지었다.
그러나 지노는 절대고수다. 언제든지 숨 쉬듯 내기를 끌어올리고 출수할 수 있는 실력자란 의미다.
“그렇다면 어쩐 일이오.”
천애랑의 물음에 지노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좀 전까지 천애랑이 앉았던 자리였다.
“앉아서 이야기를 좀 하면 하는데?”
지노는 경계 가득한 천애랑과 송소걸에게 손짓을 했다.
고민을 하던 천애랑은 천천히 의자를 당겨와 자리에 앉았다. 눈치를 보던 송소걸은 천애랑의 곁에 시립했다.
그런 송소걸의 모습에 지노는 더는 권유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천마와 붙었다지.”
“……!”
천애랑이 놀란 표정을 짓자 지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무림맹의 거점들을 중심으로 소문이 퍼지고 있더구나. 기공가의 마지막 후예인 백두신룡 천애랑이 천마에게 죽었다고 말이지. 소문이 어찌나 빠른지 이곳 근방 저잣거리에서도 들려오더군.”
송소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형님이 신경쓰실까봐 억지로 함구한 내용인데 이 노인이!’
송소걸은 천애랑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천애랑의 표정은 덤덤했다.
“고작 그런 소문이나 전하자고 온 것이오?”
내공을 쓸 수 없음에도 절대고수를 마주한 천애랑의 눈빛은 굳건했다.
그 모습에 지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선풍도골의 모습으로 짓는 미소는 마치 신선을 떠올리게 했다.
“소문을 전하는 게 아니라 소문을 듣고 너를 찾아왔다. 더 늦기 전에 말이지. 하지만 다행히도 늦지 않은 것 같구나.”
“나를 말이오? 왜……?”
“그건 네가 기공가의 마지막 후예임과 동시에 나의 오랜 지우(知友)인 천(天)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천애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는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