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공술사-181화 (181/200)

기공술사 181화

마교와의 진형을 맞대는 사천성 성도 서쪽에 위치한 무림맹의 전선.

망원구로 그곳을 살피던 제갈청은 경악했다.

‘천마라니!’

언젠가는 나타날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지금, 특히 이곳일 거라 예상치 못했다.

다만 지금 시점을 예상하지 못했다 뿐이지 천마가 나타났을 때의 행동 지시사항은 이미 진형에 전파돼있었다.

‘천마가 나타난다면 무조건 후퇴하라.’

그다지 어렵지 않은 주문이었다. 별달리 진형을 형성할 필요도 없고, 그저 최선을 다해 뿔뿔이 흩어지면 될 일이었다.

물론 후퇴과정에서의 작은 희생은 감내해야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천마는 자연재해 그 자체이니까.’

이러한 제갈청의 지시에 따라 무림맹은 움직였다. 다만 문제는 상황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끄아아아악!”

멀리서도 들리는 비명처럼 전선에 위치한 무림맹의 무인들은 후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천마를 뒤따라온 마인들의 숫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마의 무위를 가늠할 수가 없다.’

제갈청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절대고수들에 대해서 가장 많은 자료를 살펴본 이를 꼽는다면 제갈청은 단연코 자신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천하제일을 다투는 무림맹주를 모신 제갈청이다.

‘설마 현경인가…….’

인간이 무공을 익힌 이래 달마, 장삼봉, 초대 천마, 그 외 극소수의 선택받은 인간만이 도달했다 여겨지는 신의 영역이 현경이다.

제갈청이 기억하기로 근 백 년 동안 무림사에 현경의 경지를 밟은 이는 없었다.

‘설마…….’

부정하고 싶지만 쉽게 부정하기 어려운 천마의 무위에 제갈청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파각!

제갈청의 신형이 뒤로 넘어갔다.

“군사님!”

놀라는 수하들을 향해 제갈청은 손을 저었다. 그러곤 깨진 망원구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제갈청은 급히 안력을 높여 천마를 살펴 찾았다. 이어 그는 대경실색 할 수밖에 없었다.

“…….”

제갈청이 있는 곳에서 천마가 있는 곳까지는 초절정 초입의 경지인 그조차 최대치로 안력을 높여야 간신히 보이는 먼 거리였다.

일반적인 무인들이라면 까마득한 점으로밖에 안 보일 거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안력을 높이는 순간 천마와 눈을 마주한 것이다.

천마는 제갈청의 놀람에 그저 옅게 웃으며 더욱 더 주변을 학살했다.

‘마치 보란 듯이….’

제갈청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번 천마의 경고로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천마는 현경, 즉 탈마가 되었다.’

무림맹주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상대할 수 있을까 감히 우려되는 경지.

‘정도무림에서 그 누가 천마를 상대할 수 있을까.’

그는 소림방장이나 천애랑이 떠올랐지만 전설로만 전해져 오던 탈마 앞에선 역부족이지 않을까 싶었다.

제갈청은 피의 살육이 벌어지는 전선에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사천을 포기한다.”

“사천 전체를 말입니까?”

“그래. 필요에 따라 섬서와 귀주까지도 포기해야 할지 모르니 각 문파들에게 미리 연통을 넣어놓도록.”

군사부 무인들이 놀란 눈을 했다.

사천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그 안에 있는 청성산의 청성파, 성도의 사천당가, 아미산의 아미파 등 문파들의 주요 터전 또한 포기함과 같았다.

반발은 당연했고, 만약 세력 전체의 후퇴를 따르지 않는 문파일 경우엔 마교의 영역 안에 고립될 수도 있음이었다.

그러한 후퇴를 사천과 붙은 섬서와 귀주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제갈청이 말하는 거였다.

원래라면 그 이유를 묻고 명령의 보완점을 따지겠지만 군사부 무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그동안 보여준 제갈청의 판단에 절대적은 신뢰를 보낼 뿐이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

산서 태원평야에서 흑풍대가 섬멸된 후.

천애랑은 며칠 동안 몸을 추스르고 나서야 모용세가주 및 북해빙궁주와의 대화 자리를 마련했다.

“어떻게 지냈나.”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냈소.”

“으하하! 그래그래! 소문을 듣자하니 아주 잘 지낸 거 같더구만!”

모용단, 천애랑, 설엄의 대화였다.

이들은 흑풍대를 섬멸했다는 것에 큰 고양이 된 듯 한껏 기분이 좋아보였다.

‘전우(戰友)라는 느낌이 이런 걸까.’

천애랑은 두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지만 더할 나위 없는 반가움을 느꼈다.

모용단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이젠 백두신룡이라고 불린다지? 그리고 신룡대? 무림맹에서 그런 전서를 받은 기억이 나는구만.”

“천 가주가 누군가의 밑에 들어갔다는 상상은 잘 안 되지만 어련히 잘 하겠지.”

“빙궁주. 그건 모르니까 하는 소리요. 가문의 정보에 따르면 신룡대는 무림맹에서 독립적인 부대라 하더이다. 뭐랄까. 천 가주가 언제든 필요에 따라 탈퇴도 가능할거라던가?”

“호오. 그런가? 역시 우리 사위가 어디 가서 휘둘릴 사람은 아니지. 으하하하!”

모용단과 설엄의 대화가 꽃일 피웠다.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천애랑이 물었다.

“아니 근데. 아까부터 왜 나를 사위라 부르는 거오?”

질문을 받은 설엄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설화가 전서로 그리 말하던데?”

“…….”

“그나저나 내 딸은 잘 지내던가?”

“……그걸 왜 내게 물어보는 거오?”

“딸의 서신을 보니 자네랑 만나고서 자네 집으로 들어간다던데?”

설엄과 천애랑,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천애랑이 뭐라 추가 설명을 하려던 때 모용세가의 무인 하나가 다급히 다가왔다. 그러곤 모용단에게 서신을 건넸다.

모용단은 어지간하면 서신을 물리고 담소 이후에 읽으려 했다. 하지만 급보를 알리는 서신의 붉은 끈을 보고선 양해를 구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소.”

서신을 읽어 내리던 모용단의 표정이 굳어갔다. 서신을 집은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무슨 내용이길래?’

천애랑과 설엄은 의아한 표정으로 모용단을 보았다.

잠시 후 서신을 접은 모용단이 말했다.

“무림맹에서 가문을 거쳐 온 소식이오만 마교가 사천을 지나 진격중이라 하오. 그 선두엔 현경으로 추정되는 천마가 있다 하오.”

***

섬서성 종남산의 인근.

콰과광!

굉음과 함께 날아간 무림맹의 마지막 무사를 보며 천마는 손을 털었다.

천마 그가 행차한 전장은 무림맹이 아무리 저항해도 채 한 시진을 버티지 못했다.

천마와 함께하는 마인들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100명. 그럼에도 무림맹은 이들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무위.

제갈청이 그 어떤 신묘한 계책을 내놓더라도, 제갈가가 자랑하는 진법이나 기관진식으로 함정을 파더라도 천마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천마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부수며 전진했다.

문제는 천마의 존재만이 아니었다.

우호법 지휘웅과 좌호법 천살편마(擅殺鞭魔).

두 사람은 무림에서도 손에 꼽히는 완숙한 화경의 절대고수다. 그런 이들이 천마를 수행 중이다. 과연 이들의 앞을 막을 존재가 있을까 싶은 조합이었다.

그러다보니 전장에서의 전투보다 이동에 시간이 더 걸리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시하도다.”

시산혈해를 내려다보며 천마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의 전장에 흥분하기도 잠시, 마땅한 적수를 만나지 못하자 전쟁 자체에 흥미를 잃어가는 그였다.

“흐음.”

천마는 뒷짐을 지었다.

“마뇌.”

“예. 하늘이시어.”

천마가 직접 움직임에 따라 마뇌도 더는 후방에 있지 않고 천마를 곁에서 수행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라 했지?”

“종남파를 멸하신 후 하남의 소림사로 가실 예정이십니다.”

“아아. 그랬지.”

현 무림맹주가 화산파의 장문인이라 하지만 진정한 정도무림의 정신적 기둥은 소림사였다.

그러니 만약 소림사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정파의 연결고리들을 보다 쉽게 끊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 길목에 위치한 종남파 정도는 식전 운동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가 없을 때 소교주와 우호법이 소림사를 공격했었다지?”

“예. 드라쿠 장로도 함께였습니다.”

“그래? 그런데도 실패했었다고.”

“크흐흠.”

가만히 듣고 있던 우호법 지휘웅이 불편한 기색을 표했다. 이에 천마가 낮게 웃으며 마뇌의 대답을 기다렸다.

“예. 기공가문 가주의 훼방 때문이라 합니다.”

“기공가의 가주라…….”

천마는 천애랑을 떠올렸다.

천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은 과거 기공가문에서의 패배뿐이었다.

마교의 최정예 수백과 스승인 태상교주까지 함께했는데도 불구하고 천마 그만 살아남았던.

그 때문에 마도천하를 이루지 못했던 그 날의 수모.

그래서 천마는 기공가문의 마지막 후예인 천애랑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치욕의 기억을 정정할 기회라 생각했다.

다시는 천하가 기공가에 대한 마교의 패배를 언급하지 못하도록 기공가의 마지막 후예를 철저하게 밟아줄 요량이었다.

다만 과거의 천애랑은 작은 별호조차 없는 애송이일 뿐. 천마가 복수랍시고 나서기엔 급이 맞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림에서 천애랑의 명성이 진동하니 사냥의 때가 무르익었다.

“기공가주 애송이는 현재 어디에 있지?”

“파악 중에 있습니다.”

현재 그들은 흑풍대의 전멸소식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찾는 즉시 보고하도록. 내 직접 찾아 갈 것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천마가 고개를 들었다. 전장의 정리가 끝났으니 이젠 종남산을 오를 시간이었다.

“이동을 명해도 되겠습니까?”

마뇌가 눈치껏 물었고, 천마는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천마는 눈을 크게 뜨고 종남산 자락의 능선 너머를 바라봤다. 이어 지휘웅도 천마와 같은 곳을 바라봤다.

잠시 후 능선 너머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정예인 양 일사분란 했으며 그 수가 무려 천이 넘었다.

“호오.”

까마득히 먼 거리임에도 천마는 또렷하게 상대들을 구분했다.

“종남파에 화산파라.”

천마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곳이 종남산이고 화산과도 멀지 않은 위치니 종남파와 화산파의 행차는 예상가능 범위였다.

“그런데 소림사, 개방, 무당파도 함께라.”

소림사와 개방은 무려 소림방장과 개방의 방주가 함께하고 있었다. 상당히 진심으로 뭉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천마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재밌겠군.”

드디어 전투다운 전투가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뒤이어 천마처럼 상대를 파악한 좌호법 천살편마가 자신의 독문병기인 채찍, 일명 칠금사를 매만지며 웃었다.

“제 칠금사가 피를 맛보기에 좋은 상대들이로군요.”

우호법 지휘웅도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얌전히 소림사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먼저 찾아오다니. 소림 땡중이 묏자리를 직접 찾아왔나봅니다.”

“그러게 말이다. 수고를 덜었군.”

천마는 고개를 끄덕이곤 명을 내렸다.

“마도천하의 거름이 될 귀한 손님들이시다. 모두 진형을 정비하고 손님을 맞이함에 부족함이 없게 하도록.”

“존명!”

흩어졌던 마교의 진형이 순식간에 정비되었다. 그와 동시에 정파의 일천 정예들이 마교 진형과 적당한 거리를 마주하며 멈춰 섰다.

이어서 소림방장인 오각대사가 마교 진형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