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78화
북부 초원.
그곳으로부터 흑풍대는 무너진 장성을 넘어왔다. 그 수가 무려 1천.
그것도 일반 기병들이 아닌 흑풍대의 정예교육을 마친 이들의 숫자만 1천이다.
북해빙궁에서 대다수의 전력을 잃었던 흑풍대가 이리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정예를 보충하고 키워내는 것은 원래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북방황실군과 함께 북부초원의 반동세력들을 제압하면서 그 병력들을 고스란히 흑풍대로 편입했기에 이러한 증원이 가능했다.
또한 북부초원의 무인들은 걸음마보다 말을 타는 것이 더 빠르다 할 정도로 기마술이 뛰어난 이들이었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강인함이 있었기에 흑풍대의 정예훈련을 빠르게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과거 북해빙궁에서보다 강력해진 흑풍대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학살하며 진격했다.
“우리의 임무는 공포다. 그러니 어느 하나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존명!”
지금도 흑풍대는 그들의 행선지 앞에 마주한 마을 하나를 제거하고 있었다.
“크아악!”
“으악!”
“아, 아이만은……!”
“안 돼!”
“사, 살려… 컥!”
양민들의 처절한 비명에도 흑풍대주는 거대한 전마 위에 앉아 무심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침 바람이 살랑이며 펄럭이는 자신의 왼팔을 보았다.
“쯧.”
천애랑에 의해 잘려나갔던 왼팔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잠시의 상념을 지운 흑풍대주는 피에 물들어가는 마을을 바라봤다.
인간이란 어쭙잖은 공포엔 저항하기 위해 밀집하는 존재들.
‘하지만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는 그러지 못하지.’
그래서 그가 받은 명은 무림에 압도적인 공포를 선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정도 무림이나 양민들이 감히 마교에 저항할 의지조차 갖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대주님. 끝났습니다.”
학살을 마친 흑풍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었다.
이천여 명이 살던 마을의 숨이 완전히 꺼지는 데엔 불과 일 각도 걸리지 않았다.
흑풍대주는 수하들을 보며 예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동한다.”
“존명!”
***
흑풍대의 움직임은 자연재해와 같았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메뚜기 떼라도 지난 듯 풀 한 포기 하나 온전치 못했다.
불과 일주일의 시간 동안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이들의 수만 2만을 넘겼다.
이러한 흑풍대의 진격은 섬서성 북부를 초토화시키고 현재 산서 태원에 이르렀다.
산서 태원(太原).
산서성에서 가장 큰 대도시이자 섬서와 하북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길목이다.
이곳 태원엔 태원 후량가, 태원창가 등의 이름난 무가들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산서무림이 힘을 합쳤다.
일명 산서무림연합.
이들은 내심 이번 흑풍대와의 전쟁을 하나의 기회로 생각했다.
그 이유는 명성.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중원 곳곳에 위치해 있었고, 그들이 있는 도시들도 함께 명성과 번영을 얻어왔었다.
그런데 구파일방, 오대세가 그중 하나도 없는 지역이 산서성이었다.
서쪽으로는 화산파의 섬서, 동쪽으로는 팽가와 개방의 하북, 남쪽으로는 소림사의 하남이 있는 것과는 많은 비교가 됐다.
심지어 중원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요녕성에서조차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세가가 위명을 떨치는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산서무림은 은연중에 자격지심에 가까운 분노들이 쌓여있었고, 이번 흑풍대의 만행을 저지해 중원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고자 했다.
특히나 섬서 무림인들이 흑풍대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는 소식은 산서 무림인들에게 하나의 도전처럼 다가왔다.
‘우리가 흑풍대를 막아낸다면 산서무림이 섬서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
이러한 기치 아래 모여든 산서무림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기세는 흑풍대를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산서무림연합은 기마대의 기동력을 제한시킬 수 있게 태원 인근 산에 함정을 준비하고 흑풍대를 유인했다.
그리고 이들의 계획대로 흑풍대가 움직여주자 산서무림연합은 흑풍대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흑풍대의 말발굽이 지나지 못하는 곳은 없었다. 그게 산이든 늪지대가 됐든 말이다.
흑풍대의 바람 앞에서 산서무림연합의 계책은 무너졌으며 비명은 비산했다.
“으아악!”
“크윽!”
“괴, 괴물들 같으니라고!”
“후퇴하라! 후퇴해!”
끝까지 용맹하게 싸우던 산서무림연합은 결국 후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흑풍대를 상대하기 위해 뭉친 이천여 명의 산서무림연합 중 살아남은 이는 고작 이백.
대패(大敗)였다.
“성으로 후퇴한다!”
이들은 태원의 성 안으로 후퇴해 강제적으로 수성을 하든 시가전을 하든 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흑풍대와 전장을 이룬 산과 태원까지의 사이가 들판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산서무림연합은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 산 아래에 후퇴용 말들을 준비했었다.
“모두 말을 타고 후퇴한다!”
“진열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후퇴한다!”
후퇴를 향한 산서무림연합의 준비성과 움직임은 기민했다. 일반 기병들이 상대였다면 충분히 안전하게 후퇴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황실 기병들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죽음의 바람들.
흑풍대의 추격은 한줄기의 바람과 같아서 순식간에 산서무림연합은 들판에서 발이 묶여버렸다.
“이런…….”
드넓은 들판에서 흑풍대에 포위된 산서무림연합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산에서도 괴물 같던 움직임의 기마술이 이런 평야에선 어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 죽을 거야…….”
산서무림연합 사이에서 나온 누군가의 읊조림에 공포의 감정이 빠르게 전염되어갔다.
그들은 흑풍대에 의해 죽어간 동료들처럼 자신들도 곧 죽겠구나 생각했다.
이들의 용맹함도 한 번 전염된 공포 앞에선 바람 앞의 등불에 불과했다.
이렇게 의지를 잃어가는 산서무림연합을 보며 흑풍대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지루하군.’
숱한 전투를 치른 그에게 있어 전쟁자체도 그렇지만 약자들의 발버둥은 지루함의 대상이었다.
‘산서도 별 볼 일 없군.’
흑풍대주는 혀를 찼다.
앞서 산서무림의 최고수라고 나타난 태원창가의 누군가는 십초지적이 되지 못했다.
또 다른 산서무림의 고수라고 등장한 누군가도 오초지적조차 되지 못하고 쓰러진 상황이다.
더는 산서무림연합에게서 찾을 여흥거리는 없는 셈이다.
이에 흑풍대주는 명을 내렸다.
“일 각 주겠다. 모두 죽여라.”
“존명!”
명령을 내린 흑풍대주가 무료한 전장을 관망하고자 진형에서 살짝 물러날 때였다.
흑풍대주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가며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잠시 후 흑풍대주는 놀란 눈을 했다.
“천애랑……?”
북해빙궁에서 쓰러진 후부터 매일같이 곱씹으며 기억하던 그 날의 기운.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기운이 존재감을 뿜어내며 지평선 너머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흑풍대주가 펄럭이는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봤다.
으득.
지난날의 치욕에 흑풍대주가 이를 갈았다. 흑풍대주에게서 무료함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애랑…….”
흑풍대주는 창대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러자 그에게서 숨 쉬듯 자연스러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한 필의 기마가 가까워질수록 흑풍대주의 살기가 점차 짙어졌다.
구구구구구구구.
흑풍대주의 거대한 살기는 점차 유형화 되더니 거대한 떨림을 동반했다.
이에 수천 기의 말이 동시에 달리는 것처럼 대지가 울리기 시작하더니 종래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 애. 랑!”
흑풍대주가 사자후를 터트리며 창을 내질렀다. 거대한 기운이 창을 통해 전방으로 쏘아졌다.
콰과과과!
기운은 눈앞에 위치한 모든 것을 부수며 천애랑에게 도달했다.
이를 마주한 천애랑은 천선을 뻗어 이화접목의 수를 펼쳤다. 흑풍대주의 기운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그저 방향을 바꾸고자함이었다.
이건 마치 거대한 풍랑을 인간의 힘으로 바꾸겠다는 것과 같았지만 천애랑은 자신했다.
기란 자연지기의 흐름.
거대해지고 거세진 기라 할지라도 결국엔 흐름과 흐름의 조화가 이루어낸 결과물일 뿐이었다.
그러니 흐름을 읽을 수만 있다면 기를 뭉치게 할 수도, 반대로 흩어지게 할 수도 있는 법이다.
파앗! 쿠콰아아앙!
천애랑의 손짓에 따라 틀어진 흑풍대주의 기운은 한참 전투를 치르는 흑풍대원들에게 향했다.
“커억!”
“피해라!”
“대주님의 기운이다! 맞서기보단 피해라!”
갑작스런 상황에 흑풍대가 흩어졌고, 이 덕분에 산서무림연합에게 작은 활로가 생겼다.
활로가 보임에도 어리둥절해 하는 산서무림연합을 향해 천애랑이 외쳤다. 품에서 무림맹 신룡대주를 뜻하는 명패를 꺼내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림맹 신룡대의 대주 천애랑이 명하오! 모두 즉시 피하시오!”
산서무림연합에게 있어서 천애랑은 단기필마로 나타난 갑작스런 인물이다.
“천애랑……?”
흑풍대주와 맞서기에 적은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그럼에도 정확한 신원파악이 되지 않은 상대인지라 산서무림연합 안엔 의아함이 가득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내 천애랑의 이름을 곱씹던 이들에게서 놀람이 터져 나왔다.
“흑의폭군?”
“백두신룡?”
“헉! 설마 북해빙궁에서 흑풍대를 패퇴시켰다는?!”
새롭게 신설된 신룡대라는 이름보단 산서에서 유명한 천애랑의 별호들이 이들에게 익숙했다.
그리고 이러한 별호의 힘은 산서무림연합이 일순간에 천애랑을 신뢰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또한 자신감과 구심점을 잃은 산서무림연합에게 반가운 동아줄이었다.
문제는 눈앞의 청년이 진정 백두신룡이 맞느냐는 건데.
‘흑색 비단 무복과 수려한 용모, 그리고 엄청난 무위.’
너무나도 익히 알려진 천애랑의 용모파기인지라 산서무림연합은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산서무림연합은 분기탱천한 마음을 담아 크게 외쳤다.
“백두신룡을 따르자!”
“따르자!”
“동료들의 복수를 이루자!”
“산서무림연합의 자긍심을 보이자!”
와아아아아아!
산서무림연합의 생존자 백여 명은 일사분란하게 천애랑이 만든 활로를 통해 빠져나왔다. 그러곤 천애랑의 주위로 진형을 형성했다.
이를 보며 천애랑이 인상을 썼다.
‘도망치는 게 도와주는 것인데.’
흑풍대주와 흑풍대는 누군가를 지키며 싸울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에 산서무림연합에게 후퇴를 명하려던 천애랑이었지만 결사항전의 불씨를 피어올린 산서무림연합인들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그때 흑풍대주의 명이 떨어졌다.
“아직 일 각이 지나지 않았다. 명을 수행하라. 내가 앞장서겠다.”
“존명!”
히랴아아아앗!
흑풍대가 횡으로 크게 펼쳐졌다. 그러곤 거대한 흑색 물결을 만들며 산서무림연합을 향해 달려왔다.
그 선두엔 거대한 흑색 전마를 탄 흑풍대주가 있었다.
‘더더욱 도망치라기엔 늦었군.’
여기서 어쭙잖게 흩어진다는 것은 흑풍대에게 손쉬운 사냥감으로 전락할 뿐일 터였다.
꿀꺽.
산서무림연합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천애랑의 등장으로 죽어가던 용기를 회복했다지만 흑풍대의 위엄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며 천애랑은 크게 기운을 일으켰다.
후우우우우!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산서무림연합 무인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도망칠 수 없다면 맞서 싸울 뿐.’
천애랑은 크게 외쳤다.
“기공가문의 가주 천애랑! 백두신룡으로 불리며 현잰 무림맹 신룡대주로서 이곳에 구원을 온 내가 선두에 설 것이오! 그러니 모두 정신 차리고 나를 따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