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77화
찬호가 엉거주춤 제자리에 앉자 송소걸은 주섬주섬 나무그릇과 열매 등을 챙겼다.
이어서 열매와 물 등을 섞어 으깨고는 그 그릇을 찬호에게 건넸다.
“좀 드세요.”
찬호는 그릇 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송소걸이 건넨 것에서 시궁창 같은 색과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송소걸이 찬호와 마주 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무조건 드세요. 부상도 심했고 열흘 만에 깨어난 거니 많이 허기질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찬호는 그릇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큭.”
빠르게 다 마신 후 찬호는 재빨리 그릇을 치웠다. 생긴 것만큼이나 고약한 맛이 났다.
그런 찬호의 모습이 재밌는지 송소걸은 낮게 웃었다.
“흐흐흐.”
찬호도 마찬가지로 그런 송소걸이 어이없어 실소를 뱉었다.
잠시 두 사람은 실없이 웃고선 대화의 분위기를 잡았다. 찬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후우. 어찌 지냈더냐.”
서로 튀어나가겠다는 수만 가지 질문들을 삼키며 그가 가장 처음 꺼내는 말이었다.
“잘 지냈죠. 뭐.”
송소걸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적극적인 대화들이 오갈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고 있으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기분은 찬호도 마찬가지였는지 둘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송소걸이 다시 화두를 던졌다.
“형님은 대체 누구랑 싸웠길래 그리 큰 부상을 입은 겁니까.”
천애랑의 특훈 덕분에 어설프게나마 화경의 초입에 발을 걸친 송소걸이다.
말이 어설프다뿐이지 초절정과 화경 초입의 경지 차이는 하늘과 땅의 간극이었다.
송소걸이 화경의 초입에 오르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세상의 흐름이었다.
모든 기의 흐름이 숨을 쉬듯 자연스레 느껴지는 요지경에 송소걸은 경악을 했었다.
마치 자연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만 같은 황홀경에 빠져 송소걸은 주화입마를 입을 뻔도 했었다.
그렇게 발달된 송소걸의 기감은 열흘 전 찬호를 만났을 때 큰 충격에 빠졌었다.
‘찬호 형님의 얼굴이 아니었다면 그저 지상에 강림한 마귀인줄 알았겠지.’
생전 처음 겪는 거대한 마기. 천마를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경험이었다.
그런 찬호가 이렇게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게 송소걸은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천지 어느 누가.’
그런 송소걸의 의문에 찬호가 덤덤히 답했다.
“혈교주였다.”
“예? 혈교주요?!”
“그래.”
“그럼 혈교주는요?”
“죽였다.”
“예?!”
송소걸이 경악을 했다. 천하의 혈교주를 죽였다는 소리를 뭐 저리 담담하게 말한단 말인가.
송소걸은 오랜만에 만난 찬호의 화법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애랑 형님 같으니라고.’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어투는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화산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혈교주를 죽이다니.’
송소걸은 찬호를 새삼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참으로 대단한 형님들과 의형제를 맺었었구나 싶었다.
이번엔 찬호가 송소걸에게 물었다.
“날 어떻게 치료한 거냐.”
혈교주와의 전투로 입은 부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단전이 다 부서진 환자를 치료해본 경험이 있는 마의(魔醫)라 할지라도 절대 치료가 불가할 부상이라 확신했다.
그런 자신을 송소걸이 치료했다고 하니 믿기지 않았다.
“저를 치료해준 곳의 영약으로 살렸습니다.”
“너를 치료해준 곳이라…….”
찬호는 오만가지 감정이 들었다.
자신 때문에 죽을 뻔한 의제다. 그런 송소걸을 살린 곳의 도움으로 되려 자신이 살았단다. 무언가 배덕한 은혜를 입은 느낌이었다.
불필요한 감정을 꾹 누른 후 찬호가 말했다.
“큰 은혜를 입었구나. 그곳이 어디냐 나중에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
“그곳은…….”
무심코 의각원에 대해서 말하려던 송소걸은 입을 다물었다.
의각원의 이름 자체가 대단한 비밀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의각원은 천애랑의 가문에 속해있었다.
‘찬호 형님에게 말했다는 것을 알면 애랑 형님이 대노할지도.’
그 누구보다 찬호를 믿었기에 가장 큰 배신감을 느끼던 천애랑이었다.
그런 천애랑을 떠올리며 깊게 고민하던 송소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애랑 형님의 가문입니다.”
송소걸은 천애랑과 찬호가 다시 관계를 회복했음 했다. 그게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말이다.
“애랑의…?!”
찬호가 놀란 눈을 했다. 그는 소림사에서 천애랑과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다시는 좁힐 수 없는 관계의 간극을 느낀 그날. 찬호는 밤새워 술을 마셨었다.
“애랑은 잘 지내나?”
찬호는 흑의폭군, 백두신룡 등 천애랑과 관련된 소식들은 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문과 보고에 의한 소식일 뿐. 그는 의제를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
“잘 지내는지는 형님이 직접 만나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애랑과 나는 다시는 만날 수도, 가까워질 수도 없는 운명이다.”
찬호의 말을 들은 송소걸은 미간을 좁혔다.
“왜요? 형님이 마교의 소교주라서요?”
“…….”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찬호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런 찬호를 보며 송소걸이 말했다.
“마교가 애랑 형님의 가문과 제게 어떤 짓을 했는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찬호 형님이 개입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궤변이다.”
“아닙니다. 우리 의형제들 사이에 어떤 시련이 있든 그건 우리가 일으킨 갈등이 아닙니다. 그러니 의형제가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저는.”
“아니다. 아무런 개입이 없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소걸이 네가 죽을 뻔한 건 나 때문이다.”
말을 하는 찬호의 표정이 일그러져갔다. 죄책감이 그의 얼굴에 그늘처럼 드리웠다.
송소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 의형제가 갈라지던 그 날. 애랑 형님에게서 등을 돌린 형님이 눈물을 흘린 걸 압니다.”
찬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그걸?”
“그 눈물의 의미는 뭐였죠? 설마 저를 못 죽여서 그런 것은 아닐 거지 않습니까.”
“…….”
“형님은 그날에 그러한 일이 벌어질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형님은 그 누구보다 의형제를 생각하는 사람이고요. 그렇지 않나요?”
“…….”
“대답해보세요, 형님! 제 말이 틀렸나요?”
찬호가 마른세수를 하고선 힘겹게 대답했다.
“……네 말이 맞다.”
“그렇다면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 의형제들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똑똑한 네가 더 잘 알 텐데. 그나저나 소걸아.”
“예. 형님.”
찬호는 자세를 바로 하고 송소걸을 곧게 쳐다봤다.
“내게 와라. 너를 해친 곳으로 오라는 나의 말이 고깝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내 약속컨대 다시는 네가 다치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
“불안하더냐. 네 말대로 나는 마교의 소교주다. 게다가 현재는 교주 대행의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니 내 확실하게 네게 안전을 장담하겠다.”
“…….”
입술을 짓씹으며 대답 없는 송소걸의 모습에 찬호가 다급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불안하더냐? 그럼 약조하마. 나는 교주보다 강해질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어느 누구도 내 사람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할 것이야. 그때가 되면 애랑과의 관계도 내 권한으로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송소걸이 안타까움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에 찬호의 목소리가 갈라지며 더욱 다급해졌다.
“소걸아…… 나는 다시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다.”
“…….”
송소걸은 찬호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에 찬호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무겁게 고개를 떨궜다.
두 사람 사이에 지친 침묵만이 맴돌았다.
그렇게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송소걸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형님. 예전에 적벽의 비동을 갔을 때 기억나요?”
답답함에 빠져있던 찬호는 송소걸이 말하던 때를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기억나지. 그때도 이런 동굴이었었는데.”
“그러니까요. 그때 형님이 목마를 잘 태워줬으면 그 고생을 안 했을 거예요.”
“뭐? 그건 네 녀석이 야명주를 험하게 떼서 그런 거였잖아!”
“아 몰라요! 다 형님 잘못이라고요.”
“아니, 내가 무슨….”
“몰라요 몰라! 아무튼 그때 형님 때문에 고생한 겁니다.”
강짜를 부리는 송소걸의 모습에 찬호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송소걸도 마주 웃었다.
“하하하하!”
“흐흐흐흐.”
그 뒤로도 두 사람은 무거운 주제는 잠시 내려놓은 채 추억을 공유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
“군사님! 사천에서의 보고입니다!”
“군사님! 감숙에서의 보고입니다!”
“군사님! 섬서에서의 보고입니다!”
“군사님! 하북에서의 보고입니다!”
“군사님……!”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청은 끝없이 밀려오는 보고에 미간을 좁혔다.
‘결국 저들도 승부수를 띄웠음인가.’
천애랑 덕분에 녹림과 수로연맹이 와해된 후 무림맹의 전선은 단단해졌다.
마교와의 전선을 이루는 사천과 감숙으로의 보급이 원활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무림맹은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닌 역으로 마교를 공격할 계책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교는 그런 무림맹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틈을 주지 않고 총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 맹주님의 부재를 저들도 눈치챘음이겠지.’
쏟아지는 보고서를 읽으며 제갈청은 생각을 이어갔다.
마교정도 되는 적을 마주하며 완전한 비밀이 있을 거란 생각은 오만이다. 얼마든지 무림맹 내에 마교의 첩자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제갈청은 항시 최악의 가능성을 상정했다.
‘감숙과 사천은 어려울 수 있겠어.’
마교가 감숙과 사천으로만 공격을 해온다면 지금의 무림맹 방어선으로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교의 총공세는 기다렸단 듯이 천하 곳곳에서 발생했다.
제아무리 최강의 세를 구가하는 마교라지만 천하 곳곳으로 정예와 전력을 나누면 그들의 심장부인 신강과 중원진출의 교두보인 사천을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그럼에도 마교가 광범위적인 공격을 감행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제일 강한 치명타를 날릴 고수, 즉 무림맹주의 부재를 확신했다는 것이 제갈청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번의 총공세가 마교가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하급마인들의 인해전술은 중요하지만 급하진 않아.’
제갈청은 보고서에 적힌 사건의 경중을 구분했다.
‘흐음. 마교의 장로급이 참전한 곳이 중요하고 급한데.’
마교의 장로들이라면 최소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
그런 이들이 정예 수하들을 이끌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자연재해와 같았다.
그렇기에 제갈청은 마교 장로들이 향했을 전장을 추려내기에 바빴다.
한참 전략지도에 표시를 하던 제갈청은 감숙과 섬서의 북쪽에 위치한 초원지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감숙의 전선이 뚫린다는 가정하에 정도무림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경로.’
북쪽 초원지대를 통한다면 감숙, 섬서, 산서, 심지어 하북의 북경까지 내달릴 수 있었다.
‘흐음.’
제갈청은 턱을 쓸어내렸다.
섬서엔 화산파와 종남파가, 하북엔 팽가와 진주언가, 그리고 개방이 그곳 정도무림의 중심축으로 있다.
‘현재 화산파와 팽가는 참전이 어려운 상태고, 다른 문파들은… 마교 정예를 상대하기엔 부족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진주언가는 강력한 무력이 유명한 곳이 아니었고, 종남파는 인원수가 너무 적었다.
그나마 개방이 무력이나 인원수가 좋은 편이었으나 천하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밀집력이 부족했다.
특히 무림맹의 눈과 귀가 돼주고 있는 지금 시기엔 더욱 더 하북 개방에 무력까지 의존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나.’
고민을 마친 제갈청은 종이를 꺼내 일필휘지로 적어 내렸다. 서신의 대상은 신룡대주, 천애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