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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176화 (176/200)

기공술사 176화

“마, 말도 안 되는…….”

혈교주가 품은 그 어떤 기운으로도 찬호의 기운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마치 과거처럼 만마복종에 속박된 듯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혈마현신을 이루는 기운도 점점 통제에서 벗어갔다.

혈교주가 핏발 선 눈으로 찬호를 보았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절대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런 눈동자는 본좌의 것이어야 한다.’

혈교주의 부활은 고금을 통틀어도 다시없을 술법의 성공이었다.

극마를 넘어 탈마의 경지가 확실시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젊은 몸이라면 탈마 그 너머의 경지도 넘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혈교주 본인은 고금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무인이 될 터였다.

“그런, 그런 내가! 천하를 오시할 내가!”

혈교주가 이가 부서지도록 악 다물며 용을 썼지만 결국엔 압력에 못 이기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끄으윽! 본좌는……!”

촤아악!

혈교주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과거의 죽음처럼 다시금 찬호의 검에 의해 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혈교주의 몸에서 내재돼있던 독의 기운이 피와 함께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찬호는 독의 분수를 고스란히 맞았다.

짙은 농도의 극독이 닿는 즉시 모든 것을 녹일 듯한 연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온몸을 감싸고 있던 아수라의 마기가 독기를 태워버렸다.

찬호는 천천히 검을 들어 바닥을 구르는 혈교주의 머리를 찾았다. 그러곤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치이이이이익!

찬호를 감싼 아수라의 검은 기운이 검으로 밀려들어가며 혈교주의 머리를 불태웠다.

검은 마기에 불탄 혈교주의 머리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가루로 변했다. 찬호는 혈교주의 몸에도 마찬가지의 행동을 했다.

세상에서 혈교주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린 찬호는 그제야 모든 기운을 거두었다.

“쿨럭!”

찬호가 검은 피를 토해냈다. 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금세 찬호의 앞에 피의 고랑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찬호에게 잠폭단과 무리한 내공운용, 그리고 경지에 맞지 않는 무공의 사용에 후유증이 급격하게 찾아왔다.

우선 급격하게 빠져나간 피로 인해 찬호의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이어서 모든 근육들과 혈도들이 찢긴 듯한 격통이 임했다.

“끄어어억.”

찬호의 두 눈동자가 까뒤집어졌다. 그럼에도 찬호는 걸음을 옮겼다. 현재 위치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무의식의 발현이었다.

***

찬호는 기절을 한 채 알 수 없는 산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온몸이 부서지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지만 그의 무의식은 안전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하나로 모든 것을 조종했다.

그의 걸음 앞에 산속짐승 등의 위험요소들은 없었다.

터벅터벅 걷는 찬호의 발자국과 몸 주위로 이따금씩 선천지기에 녹아든 마기가 흘러나오며 주위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 마기의 경계심은 매우 날카로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나무나 돌들도 다 부숴버렸다.

그렇게 이름 모를 숲을 하염없이 걷던 찬호의 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찬호가 익히 알고 있으며 하염없이 그리워했던 인물 중 하나. 송소걸이었다.

“찬호 형님……?”

송소걸이 놀란 눈으로 찬호를 봤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과 그에 따른 오만가지 감정이 들기도 전에 찬호의 부상이 눈에 띄었다.

송소걸은 다급히 찬호에게 다가갔다. 이에 찬호의 주위를 맴도는 마기는 송소걸을 공격했다.

“뭐야 이건?!”

두꺼운 나무나 큰 돌들도 산산조각 내는 마기였지만 송소걸은 연기 쫓듯 손을 저어 마기를 치워냈다.

치이이익!

송소걸의 손길에 마기가 저항했지만 송소걸의 압도적인 내공 앞에서 제압당한 뱀 마냥 꿈틀거릴 뿐이었다.

마기를 치우며 찬호의 코앞까지 다가간 송소걸이 외쳤다.

“형님! 찬호 형님!”

송소걸의 애탄 부름에도 찬호의 정신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찬호의 신형이 앞으로 무너졌다. 송소걸은 자연스레 찬호를 안아 받았다.

“형님!”

송소걸은 경악을 하며 찬호를 불렀다. 가까이서 파악한 찬호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치료가 시급해.”

송소걸은 현 상황을 해결할 경우의 수들을 떠올렸다.

‘의각원은 너무 멀어서 시간이 부족해. 그렇다고 인근 의원은… 말도 안 되지.’

의형제인 찬호가 마교의 소교주라는 사실이 불과 일 각 전까지만 해도 믿기지 않았던 송소걸이었다.

하지만 찬호의 마기를 직접 마주하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마교의 소교주를 의원에 데리고 가면 분명 무림맹이 알아챌 거야.’

의원에게 치료를 받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마땅치 않은 상황.

입술을 짓씹던 송소걸은 어쩔 수 없이 찬호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러곤 오면서 봤던 동굴로 신형을 날렸다.

***

찬호는 꿈속에서 온갖 악귀들과 전투를 벌였다.

끝나지 않는 전투에도 찬호의 몸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베고 또 베고.

마치 어린 시절의 훈련처럼 검의 궤적이 완벽해질 때까지 휘두른 것처럼 그는 악귀들을 베었다.

수천, 수만 악귀들을 벤 찬호는 누군가의 칭찬을 기대하듯 시선을 돌렸지만 주위엔 그저 까마득한 어둠과 끝나지 않는 악귀들뿐이었다.

찬호는 자신이 끝없이 악귀들을 베어야하는 지옥에라도 빠졌나 싶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에게 숨을 쉬는 것만큼 당연했고, 자연스러운 행위였으니까.

그래서 찬호는 그저 할 수 있을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자 했다.

그때, 한 줄기 빛이 어두운 공간의 너머에서 길게 다가왔다.

빛이 가까워질수록 찬호 주위의 악귀들이 허둥지둥 물러났다.

이에 찬호가 의아한 시선을 할 때 빛은 하나의 인영이 되었다. 이어서 빛의 인영은 찬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당장 검을 휘두르면 닿을 거리. 확실하게 벨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찬호는 왠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빛의 인영이 팔을 벌려 자신을 안으려 했지만 찬호는 저항할 의지도, 이유도 상실한 채 그대로 빛의 인영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이내 찬호는 포근함을 느꼈다.

산산조각 부서질 것만 같던 온몸의 통증이 오간 데 없어졌다.

그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따스함에 옅은 미소가 지어지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찬호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동요에 당황하며 몸에 힘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찬호는 꿈에서 깨어났다.

“허억!”

찬호가 가쁜 숨을 토해냈다.

눈을 뜬 그는 상황파악을 위해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동굴?’

다소 안락해 보이는 동굴 중앙엔 모닥불이 켜져 있었고, 자신은 모닥불의 온기가 닿는 곳에 있었다.

동굴 이곳저곳의 흔적을 보니 누군가가 머무는 공간이었다.

심지어 그가 위치한 자리 곁엔 누군가 오랜 시간 앉아있었던 듯 다져진 바닥과 온기가 느껴졌다.

‘누군가 날 치료해 준 것인가?’

찬호는 마른세수를 했다. 혈교주의 최후를 확인한 직후부터가 기억이 안 났다.

‘누구지.’

동굴 안의 상황을 보니 마교 수하들의 솜씨는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치료된 몸 상태가 말이 안 됐다.

‘다 죽어가는 몸이었을 텐데…….’

솔직히 찬호도 본인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살아남더라도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큰 장애를 얻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빠르게 관조한 내부는 예상외였다. 대부분의 부상이 치료돼있었다.

찬호가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동굴 입구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에 찬호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고수다.’

찬호가 있는 위치에서 동굴입구까지 거리는 불과 삼 장(9m). 찬호가 상시 느낄 수 있는 기감의 범위 안이었다.

그런 거리 안까지 누군가 접근하도록 느끼지 못한 것이다.

찬호는 경계자세만 취했다.

적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자신을 치료해준 어느 고인일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비추는 아침햇살을 등지며 한 인물이 나타났다.

“어? 형님! 일어나셨어요?!”

꿈에 아른거리듯 익숙한 목소리와 모습에 찬호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역시! 마 할아버지의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만병통치약에 준하는 약을 개발하셨다더니.”

송소걸이 열매 같은 거를 조심스레 한쪽에 펼쳐 놨다. 찬호는 몸이 굳은 채 눈동자만 송소걸을 따라갔다.

“천만다행이었어요. 애랑 형님이 저를 걱정해서 마 할아버지가 만든 약을 챙겨줬었거든요. 애랑 형님 눈엔 아직도 제가 물가에 내놓은 아기 같은가 봐요. 하하!”

찬호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어때요? 형님? 몸은 좀 개운해요? 열흘 만에 깨어나시는 건데 어찌 머리에는 이상 없어요?”

마뇌도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손을 놓던 게 송소걸의 증상이었다.

거기에 더해 오랜 시간 소식 하나 없는 송소걸의 행방 때문에 찬호는 결국 송소걸이 죽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송소걸이 나타나 재잘거리니 그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길이 없었다.

“꿈인가.”

찬호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송소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예요? 진짜 머리에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원래도 안 좋은 머리여서 더 안 좋아지면 안 되는데.”

찬호가 조심스레 한 걸음씩 송소걸에게 다가갔다.

“제발 생시여라.”

“형님. 아무리 자다 깼다지만 오랜만에 보는 의제에게 인사 한 마디 없나요.”

찬호가 사지 멀쩡히 잘 걷는 걸 보며 송소걸이 안도의 말을 뱉었다.

작은 동굴 안.

금세 송소걸에게 다가간 찬호가 양 볼을 감싸듯 송소걸의 얼굴을 붙잡았다.

“정녕 생시인 것인가…….”

“이 횽님이?”

볼이 짓눌린 송소걸이 붕어마냥 입을 뻐끔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 찬호의 입가에 미소가 앉았다. 미소는 점차 넓어지더니 큰 웃음로 번졌다.

“으하하하하하!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찬호가 와락 송소걸을 껴안았다.

이에 깜짝 놀란 송소걸은 찬호를 밀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타고 느껴지는 찬호의 눈물에 송소걸은 밀치려던 손을 찬호의 등으로 가져갔다.

“끄으으. 네가 정녕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생경한 찬호의 눈물에 송소걸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찬호의 등을 토닥였다.

“아따 형님. 안 본 새 그 지랄 맞은 성격이 많이 바뀌었네요. 제가 알던 찬호 형님이라면 생시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다짜고짜 절 공격할 줄 알았는데.”

“크큭.”

송소걸의 너스레에 눈물을 흘리던 찬호는 실소가 터졌다.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소걸이가 맞구나.”

찬호는 놓칠세라 꽉 안았던 송소걸을 놓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묻고 싶은 게 많다.”

송소걸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부상의 고통이 아프진 않았는지. 어떻게 송소걸이 자신을 구하게 된 건지. 어떤 묘술로 다 죽어가던 자신을 살려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동안 내가 보고 싶진 않았는지.’

찬호는 송소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마찬가지로 송소걸 또한 찬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물론 송소걸의 입장에선 마교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고, 의형 천애랑과 원수지간이기에 껄끄러운 질문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송소걸은 찬호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의 속내를 듣고 싶었다.

송소걸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자리를 권했다.

“앉아서 이야기 나누죠,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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