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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171화 (171/200)

기공술사 171화

살수들에겐 저마다의 은신처가 있다.

그 용도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가장 최우선의 의미는 외부로부터의 완전한 은폐다.

이름 모를 숲.

복잡한 보법으로만 출입이 가능한 진법 안에 작은 모옥 한 채가 있다.

신검 백청선의 심복인 녹영은 모옥 안의 공간에 백청선을 모셨다.

“크윽.”

백청선이 고통의 신음을 흘리자 녹영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가능하실 때 몸을 빼셨어야 했습니다.”

백청선이 힘겹게 눕는 것을 거절하고 벽에 기대앉았다. 그러곤 낮게 웃었다.

“크크큭. 천하의 내가 말이냐?”

“네. 천하를 아우를 주인님이시기에 몸을 보중해야지요. 지휘관이 위기상황에 물러나는 것은 도망이 아니라 후퇴입니다.”

녹영의 말에 백청선은 긴 숨을 뱉었다.

“후우. 하지만 수하들이 죽지 않았더냐. 그 상황에서 등을 돌리는 건 도망이다.”

“…….”

대답이 없는 녹영을 보며 백청선은 힘없이 웃었다.

“참으로 강하더구나.”

혈교주를 떠올리는 백청선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오랜 시간을 무인으로 살아오면서 경험한 사람 중 가장 강한 상대였다.

혈교주가 사이한 방법들을 사용했다고 한들 그 또한 능력이다. 그러니 자신은 혈교주에게 패한 것이다.

‘설마 천마보다 강하려나.’

천하에서 진정한 호적수는 오직 천마뿐이라고 생각해왔던 백청선이다.

그래서 이번 정마대전의 주인공은 자신과 천마라고 여겨왔었다. 양측 최고 고수인 두 사람의 승패에 따라 전쟁의 양상이 결정 나는.

이러한 생각은 백청선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무림맹 군사인 제갈청은 물론이거니와 정도 무림의 모두가 생각한 그림이었다.

특히 제갈청은 마교의 큰 방해 없이 백청선이 천마를 죽일 수 있는 작전을 구상 중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그림에 혈교주라는 큰 변수가 끼어들었다.

“군사는? 군사에겐 이 사실을 알렸느냐?”

백청선의 물음에 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인님의 전음을 들은 직후 알렸습니다.”

“그래. 잘했다.”

백청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 상황에 대해 제갈청이 알게 된다면 그 이후의 일 또한 제갈청이 해결할 것이다.

그 사이 백청선이 할 일은 무너진 심기체의 균형을 확인하고 최대한 바로잡는 것이다. 이에 백청선은 가부좌를 틀고 숨을 골랐다.

그 모습에 녹영이 입술을 들썩이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저는 오직 주인님을 위해서만 움직입니다. 정파의 논리나 정의 따위가 아닌.’

모옥에서 나온 녹영은 빠르게 진법에서 벗어나서는 어딘가로 신형을 날렸다.

***

장강수로연맹을 무너뜨린 천애랑의 귀환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항복한 수적들의 처분을 정해야 했다.

‘홍건적의 병사로.’

수적들에게 대뜸 전우들의 등을 맡길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전방에서 화살받이의 역할로는 충분한 포로들이 될 터였다.

혹시 아나. 개중에 특출한 공을 세워 홍건적의 한 자리를 차지할 인물이 있을지.

수적들의 처분 다음의 숙제로는 홍건적의 수군들이 있었다.

담대혁과 함께 움직였던 수군들 중 일부가 포로가 되어 맹주의 수로채에 잡혀 있었다.

천애랑은 이들을 풀어주며 담대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자연스레 수군들은 담대혁의 의형인 천애랑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천애랑은 맹주의 수로채에 쌓인 금은보화들을 챙겼다. 보화들의 양이 어찌나 많더니 군선 하나가 가득 찼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한 천애랑은 장훈과 함께 수로채를 떠났다.

선두에 선 천애랑의 뒤로는 홍건적의 수군들이 수적들을 포위한 형태로 뒤따랐다.

수적들의 반항 같은 것은 없었다.

수로연맹주와 백이 넘는 수적들을 몰살시킨 천애랑의 무위 앞에서 절대항복을 외친 수적들이다. 감히 나서서 죽음을 재촉하고 싶은 이는 없었다.

그로 인해 선두를 이끄는 작은 어선 한 척과 그 뒤를 따르는 십 수척의 군선들이라는 요상한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자연스레 이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장훈의 말에 천애랑은 느긋하게 시선을 던졌다.

천애랑의 목적지는 지난날 출발했던 무한의 나루터가 아닌 악주(鄂州)의 나루터였다.

무한에서 동쪽으로 200리 길에 있는 악주는 강의 남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그리고 홍건적의 거점이기도 했다.

그곳에선 앞장서 도착한 담대혁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형님!”

천애랑은 표홀하게 뭍에 내린 후 미소를 지었다. 담대혁의 표정에서 짙은 걱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무탈하실 줄 알았습니다!”

담대혁은 천애랑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감탄했다. 그러곤 배를 정박시키고 뒤따라오는 장훈의 손을 잡았다.

“참으로 고생 많으셨소!”

“아, 아닙니다.”

담대혁의 격한 반김에 장훈이 멋쩍게 뒤로 물러났다.

천애랑은 담대혁에게 물었다.

“상황은?”

“형님께서 크게 활약해주신 덕분에 계획 이상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천애랑과 장훈이 장강수로연맹의 심장을 공격하는 사이, 담대혁과 능 노인도 나름의 전쟁을 치렀다.

무한에 위치한 군선들을 모두 불태워 추격의 우려를 지우는 게 첫째.

그 틈을 이용해 악주에 주둔한 홍건적의 수군들을 정비하는 것이 둘째.

하오문과 홍건적의 정보 조작을 이용해 악주와 마주하고 있는 황강(黃岡)의 항구를 장악하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천애랑이 수로연맹의 정예전력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간엔 무한에서 황강 사이에 위치한 수로연맹주의 전력 덕분에 황강의 서쪽 경계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러한 점을 담대혁과 능 노인이 파고들었고 순식간에 황강 항구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젠 수로연맹주와 그를 따르던 정예전력들이 항복했으니 황강과 악주 인근에 산재한 수적들을 와해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강소 남경으로 물길을 이용하려던 황군들의 진군에 큰 지장이 오겠지.’

이는 남경에서의 큰 전쟁을 앞둔 두 세력 간의 균형을 기울게 만들 한 수가 될 것이었다.

담대혁의 표정에서 모든 답을 얻은 천애랑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성공했다는 의미로군.”

“이를 말입니까. 다 형님 덕분입니다.”

“내가 더 해줄 것은?”

천애랑의 물음에 담대혁이 손사래를 쳤다.

“없습니다. 많이 피곤하실 테니 쉬셔야지요. 저를 따라오세요. 작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담대혁이 천애랑과 장훈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

감숙성 난주 인근의 마교 임시지부.

가장 높은 전각 위에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이가 있었다.

찬호.

마교의 소교주이자 현재는 교주 대리인의 직책을 수행하는 이.

쿠르르르르! 콰가가가강!

그의 심상 속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뇌전이 내려치고 섬전처럼 번쩍거리는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찬호의 검도 빠르게 움직였다.

압도적인 쾌검으로 모든 뇌전을 쳐낸 찬호의 검에서 칠흑 같은 마기가 뿜어졌다.

쿠구구구구!

심상에서의 전투가 격해질수록 찬호 그가 위치한 전각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거렸다.

끼긱.

전각의 나무 바닥을 딛는 소리가 찬호에게 들려왔다.

경지가 높은 무인이라면 발소리를 줄이는 것이 무리는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는 철저하게 자신의 다가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에 찬호가 심상의 전투를 멈추며 짙은 숨을 토해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그저 숨을 토해냈을 뿐인데도 다시 한 번 전각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보고입니다.”

“들라.”

찬호의 허락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선 찬호의 수하는 깜짝 놀라며 다급히 부복을 했다.

찬호의 등 뒤에서 짙은 농도의 아수라 형체가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성을 겨, 경축 드리옵니다!”

찬호는 마저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등 뒤의 아수라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직이다. 아직 벽을 넘지 못했어.”

찬호는 혀를 찼다.

극마, 그 너머에 위치한 탈마의 경지가 어렴풋이 보이는데 도저히 손에 닿지가 않는 상황이다.

그래도 찬호의 현재 경지는 마교 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성장세였다. 현 천마조차 찬호의 나이에는 이루지 못한 경지이었다.

그러니 찬호가 현 천마의 나이가 될 때면 마교는 지금보다 더 강한 주군을 모실 수 있을 것이 확실해보였다.

이에 수하가 깊은 감격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경축 드리옵니다.”

“됐다. 그나저나 보고할 게 뭐지?”

수하가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무림맹주의 심복이라는 자가 정보를 전했습니다.”

“무림맹주? 신검을 말하는 것이냐.”

“예. 맞습니다.”

찬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도의 기둥인 무림맹주, 그런 이의 수하가 우리를 찾아와? 신원은 확실하나?”

“예. 그자의 이름은 녹영. 무림맹주의 그림자로 활동하는 자임을 확인했습니다.”

“흐음.”

찬호가 계속 말을 하라는 의미로 눈짓을 하자 수하가 말을 이었다.

“그자의 말에 의하면 혈교주가 부활했다고 합니다.”

찬호가 놀란 눈을 했다. 혈교주는 자신이 직접 목을 친 이었기 때문이다

“혈교의 잔당들을 대부분 처리했다 여겼거늘. 새로운 혈교주라도 생겼단 말이냐.”

“아닙니다. 믿기 어렵지만 주인님께서 죽이신 혈교주가 새로운 몸으로 부활했다고 합니다.”

“……격체를 했다는 말이더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합니다. 또한 새로운 혈교주의 몸은 화산파 일대제자였던 청상이라는 자라고 합니다.”

“흐음.”

찬호는 팔짱을 끼고선 눈을 감았다.

‘영혼을 다루는 사술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다. 하지만 너무나 불안정한 탓에 함부로 시도할 것은 아니라 알고 있었는데.’

혈교가 이러한 사술들에 일가견이 있었지만 영혼을 다루는 것은 극히 섬세한 작업이라 들었다.

‘혈교주를 보는 앞에서 죽였는데 언제 그 영혼을 다룬 거지. 설마 간자가 있었던가.’

찬호는 간자에 대한 부분을 가볍게 넘겼다. 천하의 마교 안에도 얼마든지 간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마교도 사람 사는 곳이니만큼 무인이 아닌 이들도 머문다. 그런 이들까지 합치면 수십만의 사람들을 마교가 거느리는 건데 어찌 그 안에 간자가 없을까.

아마 새로이 혈교를 흡수하면서 발생하는 관리의 틈이 있었으리라.

뭐가 됐든 수하가 가져온 정보가 사실이라면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고작 끈 떨어진 혈교주가 다시 나타났다는 정보를 주고자 무림맹주의 심복이 찾아와?”

찬호의 의문점이었다. 현재 그에게 있어 혈교주는 아무런 관심대상도 아니다.

혈교의 잔당이 천하 어딘가에 남아있다 한들 혈교의 모든 것은 이미 마교에 흡수된 뒤다.

혈교주가 다시 태어나든 다른 몸으로 부활을 하든 과거의 혈교를 세우기까진 지난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만에 하나 혈교주가 과거의 영광만큼 힘을 회복한다 한들 그때쯤이면 마교가 천하를 일통한 뒤다.’

그때가 되면 손짓 한 번으로도 혈교를 완전하게 지워버릴 수 있을 터였다.

“녹영이라는 자의 말에 따르면 새로운 혈교주의 경지는 화경의 극에 있을 거라 했습니다.”

“……!”

혈교주의 건을 가벼이 여기고 수하를 물리려 했던 찬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화경의 극……?”

“예. 그자의 말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수하는 품에서 작은 천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찬호는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천에는 신검 백청선을 상징하는 자주색의 매화가 수놓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은 피에 젖어 있었다.

“이건 무림맹주의…….”

“예. 무림맹주만 입는 도복입니다. 그리고 혈교주에게 무림맹주가 패했다고 합니다.”

“무림맹주가…?”

“정보의 진위여부에 대해선 현재 부하들이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마냥 경시할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생각에 잠긴 찬호에게 수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녹영이라는 자의 마지막 말에 의하면 혈교주의 다음 목표는 주인님일 것이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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