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66화
능 노인은 바깥에서 구해온 금창약과 식량들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능숙하게 담대혁과 장훈에게 금창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투박한 대장장이의 손과는 달리 섬세한 손길이었다.
천애랑은 새삼스런 눈길로 능 노인을 보았다.
‘하오문에선 저런 것도 가르치나.’
일정 지역의 정보를 통제하는 하오문도는 모두 모종의 교육을 받는다더니 저런 응급처치법도 포함인가 싶었다.
“정보를 좀 구해왔습니다.”
능 노인이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말을 이었다.
“어젯밤의 일로 무한 전역, 특히 무한을 벗어나 동쪽으로 이동하려던 황군의 발이 멈췄습니다.”
“……?”
천애랑은 의아했다.
몇 개의 전각들을 불태우고 그곳에 있던 고수 하나를 죽이긴 했다.
황군이 기강을 꽉 잡고 있던 관청에서의 일이라지만 그 반응이 조금은 과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 천애랑의 표정을 읽은 능 노인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천 가주님께선 어젯밤에 저지르신 일의 무거움을 모르시는가 보군요.”
천애랑은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죄인 둘 사라지고 불 좀 난 것뿐이지 않소.”
“크크크크큭.”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담대혁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담 아우?”
천애랑의 의아한 시선을 받은 담대혁이 설명했다.
“형님. 지금은 전시상황입니다. 황군이 저희에게서 무한을 탈환한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무한의 규율을 통제하는 관청이 풍비박산 난 겁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서요. 형님한테야 그저 탈출과정에서 벌어진 불장난이겠지만 황군의 입장에선 뒷골이 서늘한 상황인 거죠.”
능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담대혁의 말을 이었다.
“정확한 말입니다. 이곳 무한에 있는 황군은 동쪽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엔 최소한의 방어병력을 두고서 말이죠. 그런 상황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마주했으니 신경이 곤두서겠죠.”
천애랑은 그림이 그려졌다.
이곳으로 몸을 피한 후 담대혁에게 들었던 내용들.
‘홍건적과 황군이 강소성 남경에 총력을 기울인다 했던가.’
자신이 그런 황군의 흐름에 의도치 않게 초를 친 것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던 천애랑이 물었다.
“그런데 아무리 다른 곳에 주 전력들을 모은다 해도 이곳도 중요한 곳. 황군이 최소한의 병력만 남긴다면 홍건적에서 군세를 정비한 뒤 다시 공격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니야?”
천애랑의 시선을 받은 담대혁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 병력들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담대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거지만 병력을 충원해 다시 공격한다 한들 장강에 사는 괴물들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장강오룡?”
담대혁과의 대화를 떠올린 천애랑의 물음에 구석에서 눈치를 보던 채 가장이 기함을 하며 놀라했다.
“장강오룡!”
채 가장의 눈빛엔 격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 모습에 천애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부들 사이에서도 유명한가 보군.”
“유명하지요. 그 놀라운 무력으로나 잔혹한 그들의 악명으로나.”
응급처치를 받던 장훈의 대답이었다.
이에 천애랑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사십 가까이 돼 보이는 장훈은 참으로 과묵한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몇 시진 간 함께하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장훈의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당신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파악이라. 그래서 지금은 파악을 끝냈단 말이오?”
장훈이 주위의 인물들을 훑어보고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움직임에도 상처가 아려오는지 그는 연신 인상을 찡그렸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 했으니 최소한 제가 적대할 인물은 아니겠다 싶을 정도는 파악되었습니다.”
그의 말에 천애랑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적의 적이라. 그대는 황군이나 장강오룡과 원한이 있는 것이오?”
장훈이 순순히 긍정의 대답을 내놨다.
“그렇습니다. 제 가족이 장강오룡에게 모두 죽었습니다.”
모두의 놀란 시선이 장훈에게 모였다.
그중엔 장훈과 알고 지냈던 능 노인과 채 가장의 놀람이 제일 컸다. 그들이 몰랐던 장훈의 개인사였기 때문이다.
장훈은 덤덤하게 말했다.
“한쪽은 홍건적의 간부인 걸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장강오룡에게 앞장서 맞서 싸우던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으니까요.”
담대혁을 말함이었다.
“대장간의 능 노인께선 왠지 또 다른 신분이 있으신 듯하고.”
능 노인이 헛기침을 했다.
“채씨 아저씨는 뭐, 그냥 붙잡혀 온 것 같고요.”
채 가장이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분위기에 말은 못했지만 내내 가시방석인 그였다. 드디어 자신을 챙겨주는 이를 만난 듯하자 반가움이 일었다.
마지막으로 장훈의 시선이 천애랑에게 머물렀다.
“신비한 조합들이긴 한데 가장 신기한 건 눈앞의 당신입니다.”
천애랑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장훈을 쳐다봤다. 장훈은 그 시선을 덤덤하게 받으며 말을 했다.
“여기 홍건적의 간부도 그렇고 능 노인께서도 존칭을 쓰시는 걸 보니 꽤나 높은 신분인 듯합니다. 저를 관청의 깊은 곳에서부터 구해주신 것을 보면 무력은 말할 것도 없는 것 같고요.”
이내 장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윽.”
고통에 오만상을 찌푸린 장훈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천애랑에게 절을 했다. 그 모습이 거의 오체투지에 가까웠다.
“은인께 감히 부탁드립니다. 혹시 장강오룡을 죽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장훈의 행동과 말에 놀란 시선을 했다. 천애랑만이 다소 무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천애랑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장훈의 바짝 마른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말했다.
“제 아내와 딸이 장강오룡에게 농락당하며 죽었습니다. 제 눈앞에서 말이죠. 그들은 슬픔에 울부짖는 저를 놀리려는 듯 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는 장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저는 한낱 필부인지라 복수를 꿈꾸어도 그 꿈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대신 제 복수를 이룰 수 있는 이를 고용하고자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었습니다.”
“아.”
능 노인과 채 가장이 탄식을 뱉었다.
어부임과 동시에 배를 모는 솜씨로 각종 의뢰를 받던 장훈이다.
적잖은 돈을 벌 텐데도 장훈은 어딘가에 사치를 부리는 법이 없었다. 일절 소비를 하지 않는 듯했다.
어부들끼리 상시로 모여 고된 하루를 달래던 흔한 술자리에도 장훈은 참여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던 당시엔 장훈에게 숨겨둔 정인이 있다는 등의 소문이 어부들 사이에서 돌곤 했었다.
“그런 이유가… 그런 줄도 모르고…….”
장훈과 가장 가까이서 지내왔던 채 가장이 미안하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통한 섞인 장훈의 말은 이어졌다.
“그렇게 상당량의 돈을 모은 후엔 홍건적에게 부탁해볼까도 생각했었습니다. 황실에선 역도들이라고 하지만 홍건적을 향한 강남의 민심이 좋다는 걸 들었거든요.”
장훈이 절절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황군이 무한을 장악하면서 홍건적에게 부탁할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희망을 잃어가던 찰나 우연히 여기 홍건적 선생님을 구했습니다. 새롭게 복수를 의뢰할 수 있겠다 싶은 희망으로 말이죠.”
“그래서 구해줬음인가.”
담대혁의 조용한 읊조림에 장훈은 부정하지 않았다. 천애랑을 바라보는 장훈의 눈빛이 더욱 불타올랐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두꺼운 동아줄을 발견했습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부디 제 복수를 이뤄주십시오! 그리만 해주신다면 저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게 돈이든 목숨이든 무엇이든지요!”
절절한 장훈의 목소리에 채 가장은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이 불쌍하고 미련한 사람 같으니라고…….”
담대혁과 능 노인은 천애랑이 어찌 행동할지 궁금한 표정으로 천애랑을 보았다.
천애랑은 장훈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장훈의 신형이 두둥실 일으켜 세워졌다.
놀란 눈을 하는 장훈을 보며 천애랑이 입을 열었다.
“좋소. 그 복수 대신 해드리겠소. 수로연맹이라면 어차피 쳐들어갈 생각이었으니.”
“……!”
너무나 손쉬운 대답에 장훈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그는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장훈이 다시 절을 하며 감사를 표하려 하자 천애랑은 손을 저어 그를 제지했다. 이어서 천애랑은 담대혁을 보았다.
“담 아우. 혹시 생각해놓은 작전은 있어?”
천애랑의 질문이 반가운 듯 담대혁이 곧장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있긴 합니다.”
***
담대혁의 계획에 현지 일행들의 의견이 보태져 작전이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그렇게 다듬어진 작전은 이튿날 새벽, 여명이 일기 전 지독히 어두운 시간인 인시 말(寅時, 05시)에 시작됐다.
천애랑은 어둠을 틈타 조용히 관청의 담벼락을 넘었다.
‘여길 다시 올 줄이야.’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관청의 건물들을 불태우는 것. 특히 군량미로도 이용될 식량창고를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었다.
‘경계병들이 많아졌네.’
앞서 담대혁과 장훈을 구할 때보다 족히 갑절은 병사들이 많아보였다.
확실히 일전의 사건이 이들에게 큰 경각심을 심어준 듯했다.
그 때문에 경계를 서는 병사들의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하지만 환영유령보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천애랑에게 큰 제약은 아니었다.
천애랑은 화롯불들의 일렁이는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식량창고를 찾아냈다.
‘그럼. 시작해볼까.’
쉬시시식!
귀신과도 같은 천애랑의 움직임에 창고를 지키던 관병 열이 조용히 쓰러졌다.
이어서 천애랑은 식량창고의 잠긴 문을 열고선 허리춤에 챙긴 항아리를 들었다.
‘재주가 많은 노인이란 말이지.’
항아리는 능 노인이 이번 작전을 위해 긴급히 만든 것이었다.
충격을 받으면 쉽게 깨지도록 설계한 도자기 항아리 안엔 기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는 담대혁의 의견이 반영된 사항이었다.
‘기름을 먹여야 화마 속에서 적들이 건사할 수 있는 식량을 최소한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지.’
천애랑은 가볍게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이 식량들을 탈취해 가난한 민가에 나눠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도 현실성도 없는 상황이었다.
천애랑은 항아리 몇 개를 골고루 던졌다.
째재쟁.
도자기가 깨지는 작은 소음과 함께 차곡하게 쌓여있는 식량들에 기름이 젖기 시작했다.
이어서 천애랑은 천선을 휘둘렀다. 화접탄들이 살랑거리며 곡식들로 날아갔다.
천애랑은 곧장 다른 창고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화르르르르륵!
조금 전까지 천애랑이 있었던 창고에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의 창고 세 개에도 불이 붙었다.
“부, 불이야!”
갑작스런 불을 발견한 병사들이 기겁을 했다.
“어서 불을 꺼라! 날씨가 건조해서 불이 붙은 것이다! 어서 불을 꺼라!”
식량창고 네 개가 동시에 불이 나고, 창고를 지키는 병사들이 쓰러진 상황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상황을 지휘하는 간부들은 방화범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앞서 전임자들처럼 책임을 물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그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천애랑은 다소 마음의 여유를 벌 수 있었다.
‘역시 대단한 의제야.’
천애랑은 이런 상황을 예측한 담대혁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고수 간의 전투에선 무공만큼이나 중요한 게 심리싸움이었다.
그런데 담대혁이 짜준 전략이 마치 고수들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너도 성장했구나.’
천애랑 자신을 포함한 의형제들 모두가 성장했음에 깊은 흡족함을 느꼈다. 그러다 문뜩 찬호가 떠올랐다.
‘마교…….’
천애랑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절대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곳을 떠올리자 천애랑의 흐뭇했던 마음이 차게 식어버렸다.
천애랑은 어두워진 얼굴로 마저 관청에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신형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