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62화
“태극혜검이오.”
검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기수식을 잡은 진강의 도포가 거칠게 펄럭였다. 동시에 진강의 검에서 푸르른 검강이 서렸다.
지켜보던 장로들이 벌떡 일어났다.
“벌써 태극혜검이 육성을 넘기다니!”
장로들이 진강의 성취를 보며 깊은 감탄을 보였다.
태극혜검.
태극권으로 유명한 무당파지만 실전에서 가장 큰 강함을 보이는 건 역시 검술이다.
그런 무당의 검술 중에서 가장 수련하기 어렵지만 위력이 제일 뛰어난 것은 태극혜검이었다.
태극혜검을 익히기 어려운 이유는 있었다.
우선 태극혜검은 태극검을 극성으로 익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한 검술을 대성한다는 것은 평생을 거쳐도 모자랄 난이도였다.
그런데 태극검이라 함은 무당파 내에서도 상위에 드는 검법. 그렇기에 아무나 태극혜검을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재 무당파에서 태극혜검을 익히는 자는 장문인과 장로들, 그리고 진강을 포함한 일대제자 셋뿐이었다.
그중에서도 태극혜검을 삼성 넘게 익힌 자는 일곱.
오성 넘게 익힌 자는 장문인과 장로 둘, 그리고 대제자 진강뿐이었다.
추가로 태극혜검이 어려운 이유가 있었다.
“태극혜검으로 검강을!”
장로들의 감탄처럼 태극혜검은 그 검식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내공을 소모한다.
이 때문에 태극혜검을 펼치며 검강을 만드는 것은 보통의 검강보다 갑절은 많은 내공이 필요한 행위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당파의 심법이었다.
안 그래도 느린 정도의 심법 중에서도 가장 느린 심법이 무당파의 심법이다.
그 말인즉슨 기본적으로 검강을 만들 만큼의 내공을 쌓는 것만도 한 세월이 걸린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당파의 심법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 있었다.
심법의 경지가 일정 수준 이상을 넘길 때 얻을 수 있는 내공의 기대치가 여타 심법들에 비교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었다.
마치 설산 위에서 눈덩이를 굴리는 것과 비슷했다.
처음엔 작지만 점점 덩치를 불리고 종래엔 걷잡을 수 없이 많은 눈덩이가 되는.
그래서 세간에선 무당파를 ‘대기만성의 문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무당파가 구파일방의 일좌를 소림만큼이나 오랜 기간 유지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느림의 미학을 가진 무당파에서 고작 사십의 나이로 태극혜검을 육성 이상 익히고 검강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단순히 천재라고 치부할 수 없는 깨달음과 성취였다.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오던 진강의 표정이 자신에 가득 차 있더라니.”
“마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구만.”
“무당의 미래가 밝음이야.”
“장문인 경축드립니다.”
장로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감상에 젖어 있을 때, 장문인은 천애랑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반응하려나.’
그가 살피기에 천애랑은 단순히 나이로 가늠할 인물이 아니었다.
‘허공섭물만 보아도.’
상당한 내공의 공부가 이루어진 인물이었다.
‘역시 명불허전 기공가문인가.’
팔십이 넘은 그는 기공가문을 알고 있었다. 아니, 기공가문을 경험한 인물이었다.
지금의 진강처럼 천재라 불리던 양송의 젊은 시절. 막 약관에 올랐을 때였다.
마교와의 전쟁 속에서 지원전력을 요청하러 백두산에 갔던 인물들 중에 양송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엔 기공가문의 존재조차 모르던 그였기에 그저 선배들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그런데 백두산 자락에 진입했을 때 자신들을 쫓아온 마교와 마주했고, 그들 중엔 마교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악귀들도 있었다.
격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함께 갔던 선배들의 대부분이 몰살을 당했다.
양송 자신은 선배들의 희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상태였다.
그러나 더는 살아날 희망이 없을 때 표홀한 움직임으로 십수 명의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러곤 그들은 순식간에 마인들을 몰살시켰다.
고강하던 선배들을 죽였던 악귀들도 그자들 앞에선 추풍낙엽으로 쓰러질 뿐이었다.
목숨을 구해준 미지의 인물들이 기공가문이었음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대단했지.’
개개인이 능히 한 문파의 문주나 장로들이어도 무방했던 실력자들.
특히 기공가문의 직계 핏줄을 잇는 이들은 태어나길 천재로 태어난다 했다.
‘진짜 하늘의 재능이라고 불러도 되는 이들.’
양송 자신이 줄곧 들어왔던 단어와는 그 가치와 무게가 다른 진짜 천재들.
‘천하’라는 단어보다 ‘고금’이라는 단어가 쉽게 붙을 수 있는 자들.
재능에 따른 천형인 것인지 자식이 귀한 것이 그들의 유일한 단점이었던 이들.
그들이 기공가문과 직계 자손들이었다.
양송은 그때 천재라는 단어의 허상을 깨달으며 우물 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육십에 가까운 긴 세월이 흐른 뒤 과거의 인연이었던 기공가문의 후손을 만나게 된 거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반가움이 깊었고, 번뜩 그때의 자신이 떠오르면서 이 비무를 부탁한 거였다.
녹림연맹주를 다루는 천애랑의 움직임에서 진신전력을 보진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천애랑이 자신의 제자보다 강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실제로도 천재라 불리며 화경에 발을 들인 진강이 밀리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제자 놈이 스승의 마음을 헤아려준 것 같은데 말이지.’
마치 자신을 상대하듯 진지한 태도를 취하는 진강을 보며 장문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진강아 너도 천재라는 허울과 작은 우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
천애랑은 진강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일반적인 강기가 아니다.’
기(氣).
흔히 검기라고 칭할 때 쓰이는 기는 끝없이 발출하려는 성질을 가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인들은 내기를 얇게 벼려 필요한 순간에 발출시킨다.
‘마치 찬호가 타격 순간에만 기를 발출했던 것처럼.’
물론 찬호처럼 찰나의 순간에 필요한 만큼의 기만 이용하는 건 극강의 내공 운용실력이 필요했다.
끝없이 발출하는 기의 영역에서 더 발전하면 기를 잠시 붙잡아 실처럼 유형화시키는 사(絲)의 단계가 된다.
이러한 실들을 촘촘히, 그리고 켜켜이 중첩시켜 무기에 붙잡을 수 있으면 강(罡)이 된다.
우리가 말하는 검강(劍罡)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진강이 펼치는 검강은 단순히 기의 실들을 뭉친 것이 아니었다.
‘뭉침과 발출이 동시에 일어난다?’
강기 특유의 밀집력을 바탕으로 진강의 검에서 강기가 넘실거렸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움직이는 검강이 눈길을 끌었다.
“흐아아아압!”
진강의 당찬 기합과 함께 검강이 천애랑에게 뻗어갔다.
천애랑은 강기의 궤적에 있는 대기의 결을 뭉쳐 강기의 강도를 가늠해봤다.
콰지지직!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군.’
검기라면 무조건 막고, 어지간한 강기라도 조금은 막아낼 강도의 방어였다.
하지만 진강의 강기는 모든 것을 파쇄하듯 밀고 왔다.
‘조금 더 봐볼까.’
간만에 돋은 흥이다. 천애랑은 더 길게 무당파의 무공을 견식하고 싶었다.
그는 뒤로 미끄러지듯이 훌쩍 물러나 진강의 검을 피했다.
아니, 피했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한 공격범위를 상회해서 회피했으니까.
하지만 진강의 검강는 막대한 거리를 격하고 따라왔다.
“음!”
천애랑은 다급히 호신강기를 펼쳤다.
콰과광!
큰 충돌과 함께 연무장의 바닥이 비산했다.
“사람들을 지켜라!”
연무장 가장자리에 있던 무당파의 제자들이 거센 기파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했다.
위에서 구경하던 장로들 사이에서 ‘비싼 청옥석 바닥이!’라는 말이 얼핏 들려왔다.
꽈지직.
천애랑은 호신강기의 틈을 찾아 꿈틀거리는 검강을 관찰했다.
‘신기하네.’
하지만 내공의 양을 따지는 거라면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천애랑이다. 부서진 호신강기는 곧장 복구시킬 수 있었다.
그러한 기색을 읽은 진강이 검을 더욱 꽉 쥐었다.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의 말과 함께 넓게 퍼졌던 진강의 검강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마치 거대한 도처럼 형태를 이루었다.
태산압정.
도(刀)식의 가장 기본이자 가장 강력한 공격.
그것을 진강이 검으로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검강으로 도를 만들어서.
“허어!”
“검으로 펼치는 도식이라니! 놀라운지고!”
무당파 장로들의 놀람을 보니 무당파에 존재하는 무공이 아니고, 진강이 창안한 형식인 듯했다.
‘무공이란 원래 자유로운 법이니까.’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말이 떠오른 천애랑은 기꺼운 마음으로 손을 저었다.
그러자 여의주처럼 전신을 두르고 있던 호신강기가 손끝에 모였다. 마치 작은 여의주를 손바닥에 쥔 모양새였다.
이내 진강의 공격과 천애랑의 수비가 충돌했다.
이번엔 좀 전처럼 거대한 충돌음이 발생하진 않았다.
우우우우우웅------!
거대한 기의 공명음이 둘 사이에서 벌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공명음은 하나의 음공처럼 펼쳐져 주변에 뻗어갔다.
“이런! 기막을 펼쳐 사람들을 보호해라!”
다시 한 번 무당파의 도인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일반적인 기파보다 음공은 영향의 범위가 커서 장로들도 신형을 움직였다.
객석들 사이사이에 자리한 무당파 도인들이 어지러이 검을 휘두르자 얇은 검막이 펼쳐졌다.
그러한 검막은 다른 검막과 이어져 거대한 장벽처럼 관중들을 보호했다.
파지직! 파지지직!
내공의 파편들에 부딪힌 검막이 거칠게 흔들거렸다.
“크윽.”
“모두 집중하거라! 긴장을 놓치면 사람들이 다친다!”
장로들의 분주함이 극에 달했을 때 천애랑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쿠웅!
거대한 소리에 비해 다소 잠잠한 상황이 이어져 모두가 의아한 시선을 보낼 때였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지진이라도 난 듯 연무장이 크게 떨리더니 이내 연무장의 바닥 모두가 하늘로 높게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
다량의 파편들과 모래바람에 천애랑과 진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천애랑은 진강의 도를 밀쳐내며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흡!”
위기감을 느낀 진강이 빠르게 대처하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천신(天神)의 손바닥에 잡히기라도 한 듯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룡군림보.
거대한 압력으로 진강을 붙잡은 천애랑이 진강의 급소들을 겨냥하기만 할 뿐 공격을 끝까지 펼치진 않았다.
그렇게 천애랑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때마침 파편들과 모래바람이 걷히면서 천애랑과 진강의 모습이 드러났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이긴 거야?”
“뭐가 보였어야지.”
관중들은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모래바람 내부의 상황을 볼 수 있었던 장문인과 몇 장로들은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강도 멍하니 천애랑을 바라보다가 차분히 검을 거뒀다. 그러곤 미소 지으며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 감사드리오. 많이 배웠소이다.”
“저 또한.”
천애랑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두 사람의 포권에 장문인이 일어나 상황을 정리했다.
“장강후랑추전랑이라더니! 이 노부는 깊은 감명을 받은 비무였소이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소이까!”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
지난 50여 년간의 무당을 이끌어온 장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라 그 무게가 사뭇 남달랐다.
누가 승패의 주인공들인지는 모르나 무당의 미래가 밝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이를 느낀 관중들은 묘한 감동을 느끼며 환호성을 질렀다.
“멋있다! 역시 무당이다!”
“이에 맞선 백두신룡은 또 어떻고!”
“태어나서 이런 대결은 처음이야!”
“이것이 말로만 듣던 고수들의 싸움 아니겠는가!”
가실지 모르는 흥분을 가만히 지켜보던 장문인은 다시금 크게 외쳤다.
“귀한 걸음을 해주신 여러분들과 지금의 흥을 나누며 잔치라도 벌이면 좋겠지만 무당은 전쟁을 앞두고 있는 바! 그 기회는 승전 후 여러분들과 다시 나눔이 어떨까 싶소!”
“좋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관중들이 장문인의 말에 열렬한 호응을 보냈다.
말을 마친 장문인은 장로들과 제자들에게 뒷정리를 부탁하고 천애랑과 진강에게 눈짓을 했다.
이에 천애랑과 진강은 장문인을 뒤따라 연무장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