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60화
“도우께선 멈춰 주시오!”
천애랑에게 다가온 도인은 천애랑과 눈에 띄는 거대한 관을 보았다. 이내 도인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
“본도는 무당파의 일대제자 진성이라 하외다.”
그의 소개에 줄을 서있던 사람들에게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해검지에 일대제자라니!”
“무당파가 손님 안내에 진심이로구만.”
진성이라 소개한 이는 삼십 후반으로 보이는 무인이었는데, 그 기세가 잘 벼려진 칼과 같았다.
그리고 우수(右手)의 검수인 것인지 오른손이 습관적으로 허리춤을 매만지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언제든지 발검을 할 것 같은 자세였다.
‘쾌검이 주를 이루는 자인가. 제법이로군.’
감탄하는 천애랑에게로 진성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은 해검지이외다. 무당산을 오르거나 무당파를 방문할 모든 이들은 이곳에서 존경을 표해야 하오.”
말인즉슨 다그치기 전에 알아서 신분을 말하고, 병장기 풀어놓고, 관에 든 것이 무엇인지 밝힌 후 안내를 따르라는 의미였다.
천애랑의 묵묵부답에 진성의 눈빛이 불편하게 변해갔다.
하지만 천애랑은 섣불리 말을 할 수 없었다. 주위에 불필요한 시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성에게 전음을 날렸다.
[무림맹의 임무를 수행 중이오. 해서 무당파의 장문인과의 만남을 원하오.]
진성이 놀라하며 천애랑과 관을 번갈아 봤다. 말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진성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이가 나타나 무림맹을 거론하며 장문인을 만나겠다고 하는 상황이다.
무당파의 입구를 지키는 제자로서 좀 더 확실한 확인이 필요했다.
“오늘은 무당파에 있어서 매우 경건한 날이오. 혹여나 생길 불미스러운 일들을 사전에 점검하는 것이 나의 임무. 그러니 도우께서는 제게 좀 더 자세히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구려.”
천애랑은 잠시 고민을 했다. 진성의 태도가 생각보다 단호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천애랑은 다시 전음을 날렸다.
[본인은 무림맹 신룡대의 대주 천애랑이라 하오. 여기 관에 담긴 자는 녹림연맹의 맹주 거산악이고. 무당파엔 이 자의 신변을 무림맹으로 호송시키는 걸 부탁하고자 왔소. 됐소이까.]
진성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녹, 녹림연……!”
“말을 삼가는 게 좋겠소.”
천애랑이 빠르게 기막을 치면서 진성의 말을 잘랐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일견 백이 넘는다.
한 마디의 말이 천리도 간다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입이라면 어쩌겠는가.
‘수로연맹주가 알아채고 몸이라도 숨기면 일이 복잡해진다.’
아직은 녹림연맹주가 잡혔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가 아니었다.
놀란 진성이 빠르게 신색을 회복했다. 놀라운 말들을 들었지만 무턱대고 믿을 수 없는 사안이기도 했다.
“크흠. 확인해볼 수 있겠소.”
쉽게 넘어가지 않은 진성을 보며 천애랑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품에서 패를 살짝 꺼냈다.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의 은밀한 움직임인지라 진성만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무림맹을 상징하는 패를 확인한 진성이 깊은 감탄을 하고선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많았소이다. 아무래도 맡은 임무가 임무인지라.”
“이해하오.”
“헌데 혹시 무기는 없으신 것이오?”
이곳은 해검지. 황제가 와도 병장기를 풀어놓아야 하는 절대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허리춤에 매인 천선이 있었지만 천애랑은 고개를 저었다.
“없소. 적수공권을 주로 사용하는지라.”
진성의 시선이 천애랑 허리춤의 천선에 닿았다. 고급재질로 보이는 쥘부채가 무기인지 장신구인지 판가름이 안 됐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천애랑의 물음에 진성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안내해줄 이를 붙여 드리겠소. 따라가시면 될 것이외다. 인유!”
“예! 사형!”
진성의 외침에 방문객들을 통제하던 이가 표홀하게 뛰어왔다.
이십 줄로 보이는 순박한 얼굴의 사내였다. 날카로운 검처럼 느껴지던 진성과는 정반대의 인상이었다.
진성이 전음으로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인유 도인이 천애랑에게 놀란 시선을 보냈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애랑에게 미소를 보냈다.
“인유라고 합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천애랑은 진성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인유 도인을 뒤따랐다.
도인을 따라 오르는 무당산의 풍광은 가히 일품이었다.
화산이 깎아내리는 기암괴석들과 절벽들의 웅장함이 일품이었다면 무당산은 다소 부드러운 선을 가진 곳이었다.
나무와 물, 그리고 봉우리들의 굴곡은 부드러움 속의 강함을 추구하는 무당파와 닮아 있었다.
또한 72개의 봉우리와 수십 개의 바위산이 운무를 뚫고 솟아있는 풍경은 절로 신묘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절경이었다.
화산을 오를 때도 느꼈지만 도를 추구하는 것은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건 아닐까 싶었다.
줄을 지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그러했다. 힘들어하면서도 표정만큼은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한참의 산길과 계단을 오른 후에야 무당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유는 수많은 방문객들을 가로질러 무당파의 안쪽으로 천애랑을 안내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무당파 도인들이 인유 도인과 함께 등장한 천애랑에게 시선들을 모았다.
“장문인. 인유입니다.”
한 전각 앞에서 인유가 말하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호오.’
천애랑은 열리는 문을 보며 감탄했다.
웅혼한 기운이 방 내부에서 뻗어오더니 마치 손을 사용한 것처럼 문을 열었다. 그 흐름이 지극히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경험한 허공섭물 중 단연 최고였다.
열린 문으로 먼저 들어간 인유가 잠시 후 나오더니 천애랑에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하오.”
천애랑도 마주 인사를 하고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엔 탁자를 중심으로 네 명이 앉아있었는데 모두가 선풍도골의 노인들이었다.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이들이 수염을 매만지면서 시선을 모아왔다.
그들 중 탁자의 중심에 있는 이가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게. 본도는 이곳의 장문인인 양송이라 하네. 무림맹에서 오셨다고?”
뒷말을 잇진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천애랑의 손으로 향해 있었다.
이에 천애랑은 관을 내려놓고선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 신룡대를 이끌고 있는 천애랑이라 하오. 녹림연맹주의 신병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고, 무당파의 도움을 받고자 왔소.”
“그래. 간략히 이야기는 들었다네. 녹림연맹주라니. 확인해볼 수 있겠는가.”
천애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섭물로 관을 열었다. 앞서 장문인이 보여준 허공섭물에 대한 보답이었다.
“허허허.”
“세상에.”
“대단하구만.”
“소문 자자한 기공가주의 무위가 역시 범상치 않고만.”
일순간 장문인과 노 도인들에게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눈에 이채를 띠며 열린 관 안을 살폈다.
그 성정만큼이나 거친 수염을 기른 녹림연맹주가 죽은 듯이 있었다.
그때, 녹림연맹주가 벌떡 일어나더니 천애랑을 공격했다.
“애송이 새끼! 죽어라!”
이동 중 귀식대법으로 죽은 척을 하고 있던 녹림연맹주였다.
귀식대법은 거북이처럼 극히 느리게 숨을 쉬어 오랜 시간 동안 그 기척을 완벽하게 지울 수 있는 무공이었다.
녹림연맹주는 관이 열리기만을 꾹 참고 기다렸다가 때가 되자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그동안 시체처럼 참아왔던 울분을 토하듯 녹림연맹주의 기세가 태풍처럼 포악했다.
“이런!”
노 도인들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때.
천애랑의 손이 사량발천근의 수로 녹림연맹주의 공격을 흘려냈다.
작은 힘으로 거대한 힘을 상대하는 방법이자 무당파에서 깊게 공부하는 무학이었다.
“허어!”
“저건……!”
천애랑의 유능제강을 알아본 노 도인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천애랑에게 일격을 맞은 녹림연맹주의 신형이 날아갔다. 문제는 그 방향이 노 도인들이 있는 곳이었다.
녹림연맹주는 날아가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노 도인들에게 살수를 펼쳤다.
“이놈!”
좁은 공간임에도 노 도인들의 신형이 갈대마냥 움직이면서 녹림연맹주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녹림연맹주의 비겁한 수에 노 도인들이 당황하며 조금씩 밀려났다.
노 도인들은 상대가 눈이나 낭심을 찔러오거나 탁자 위의 차를 발로 차서 날리는 등의 수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지러이 움직이던 녹림연맹주는 탁자를 강하게 밟아 부러뜨리곤 그대로 노 도인들을 후려쳤다.
빠아아악!
“크윽!”
“억!”
생전 처음 겪는 수법에 노 도인들이 낭패를 느끼며 크게 물러났다.
“네놈이 장문인이렷다!”
녹림연맹주는 시종일관 고고하게 지켜보는 마지막 노 도인에게 신형을 날렸다.
산채에서 자신을 제압한 천애랑이라는 애송이는 괴물이었다. 모든 수를 동원해도 통하지 않는 괴물.
조금 전도 보라.
혼신의 힘을 다한 기습공격에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되려 역습을 한다.
총채에서와 같이 다시 한 번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노 도인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공격이 성공함에 따라 자신감을 얻었다.
이 기세를 몰아 장문인을 단숨에 제압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지금의 난관을 풀어볼 요량이었다.
“장문인!”
노 도인들의 놀람 속에서 장문인이 편안한 표정으로 일 보 앞으로 내딛었다.
‘공기가 바뀌었다.’
녹림연맹주에게 신형을 날리려던 천애랑은 잠시 멈추며 장문인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거목(巨木).
거대한 나무가 움직이듯 장문인의 무게중심은 지극히 낮고 곧았다.
‘그러나 나뭇가지는 버들. 아니, 대나무인가.’
장문인의 팔이 녹림연맹주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내더니 대나무의 탄성처럼 가볍게 튕겨냈다.
“크윽.”
작은 한 수였지만 그 여파는 만만치 않은 듯했다. 녹림연맹주가 저릿한 손을 털어내며 재차 장문인을 공격했다.
그에겐 더 이상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장문인이 일 보 앞으로 내딛으며 팔로 부드럽게 원을 만들었다.
팔의 휘두름에 따라 보법도 함께 움직였다.
팔로 만드는 원과 다리로 만드는 원이 하나의 제공권을 형성했다.
“고작 태극권 따위!”
녹림연맹주의 몸에서 기함할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본인의 애병인 패월도가 없었지만 손으로 펼칠 생각이었다.
무당파 장문인과 녹림연맹주.
천애랑은 두 사람의 격돌 전에 이미 승패를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제공권이다.’
영역을 장악하는 압도적인 내공, 그리고 내공의 질.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내공의 연결고리들.’
수십만 개의 혈도들이 허공에 무수하게 펼쳐져 유기적으로 내공을 연결하는 듯했다.
‘마치 제공권 자체가 하나의 신체 같군.’
이것은 많은 내공으로 투박하게 만드는 제공권과는 달랐다.
‘하나의 우주.’
천애랑의 눈이 개안을 하듯 번뜩였다.
그런 천애랑의 변화를 알아챈 장문인이 미소를 지으며 전투를 마무리했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녹림연맹주의 신형이 나가떨어졌다.
피를 토하며 기절하는 녹림연맹주에게 노 도인들이 달려가 혈들을 짚어 완전히 제압했다.
“무량수불. 무림의 홍복이롤세.”
장문인이 천애랑을 향해 미소를 보이자 천애랑은 포권을 취했다.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소. 깊은 감사를 드리오.”
“나는 그저 보였을 뿐. 거기서 무언가를 얻는다면 그것은 내가 아닌 본 사람의 덕일세.”
천애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나는 은과 원이 명확하길 원하는 바. 추후에 무당의 어려움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홍복일세. 홍복이야.”
장문인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노 도인들은 두 사람의 대화가 무슨 일인지 모른 채 눈동자만 굴렸다.
“아!”
장문인이 눈을 크게 뜨더니 천애랑에게 물었다.
“혹 괜찮다면 지금 당장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편히 말씀 하시오.”
“오늘 수년의 폐관수련을 끝낸 대제자의 출정식이 있다네. 원래라면 녀석의 시연으로 그간의 깨달음을 선보일 자리였으나.”
장문인의 부드러운 눈동자에 장난기와 같은 빛이 스쳐지나갔다.
“자고로 무술이란 상대가 있어야 흥이 나는 법. 자네가 내 제자와 비무를 해주면 좋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