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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158화 (158/200)

기공술사 158화

만금상단.

천하의 돈을 위탁받는 만금전장의 주인이자 천하 세 손가락에 꼽히는 거대상단.

만금상단의 주인인 가금풍의 하룻밤 유희에 의해 태어난 하인의 아들.

그게 가후의 탄생이자 가문에서의 위치였다.

그리고 가후의 존재가 도드라지지만 않았다면 아마 두 모자는 죽은 듯 만금전장에서 조용히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후는 날 적부터 천재였다.

스스로 글을 깨우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이든 보는 족족 배움을 얻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총명함을 총관은 어여삐 봤다. 그래서 총관은 호기심에 상단의 장부 일부를 가후에게 보여줬다.

가후는 밤을 새우며 책장 하나를 가득 메울 장부를 다 읽었고, 상단의 흐름을 모두 깨우쳤다.

총관은 만금전장에 인재가 태어났다 여기며 가후에게 하나씩 일을 맡겼다.

말이 맡겼다 뿐이지 실제론 행사권한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내주는 숙제 같은 거였다.

그럴 때마다 가후는 총관의 기대를 월등히 상회하는 답안들을 내놓곤 했다.

깊은 감명을 받은 총관은 참지 못하고 만금전장의 장주인 가금풍에게 말했다.

가후의 재능이 만금전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인에게서 태어난 서자라고 일절 관심을 두지 않던 가금풍도 연이은 총관의 설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그게 발단이었다.

천하의 돈을 만지는 가금풍의 부인들만 다섯. 모두 탄탄한 가문의 여식들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후계자를 원하는 가금풍에게 있어선 가후 같이 비범한 자식을 두지 못한 죄 많은 여인일 뿐이었다.

그런 부인들 앞에 느닷없이 하찮은 하인의 자식인 가후가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가금풍은 가후를 다른 자식들보다 아끼기 시작했다.

당연히 부인들은 강력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부인들은 뜻을 합쳐 가후를 쳐낼 방도를 모색했고, 결국 가후는 어머니와 함께 멀리 쫓겨나게 되었다.

문제는 단순히 쫓겨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인들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을 총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 부지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땅히 금품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만금전장에서 비교적 편안히 지냈던 모자는 단숨에 오늘 먹을 식량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처했다.

설상가상으로 가후의 어머니는 점차 기력이 쇠하더니 결국 앓아누웠다.

그 뒤로 가후는 단 둘뿐인 가족 구성원의 가장 역할을 했다.

그는 객잔, 포목점, 기루 등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장부를 작성하는 재주가 뛰어나 가게들에선 가후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지만 병색이 짙어지는 어머니의 약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한 표국의 값비싼 의뢰를 받아 표행에 참여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표행 전반의 장부를 정리하고 왕복 스무날 정도의 일정만 소화하면 됐으니까.

다만 문제는 산적이 출몰한다는 죽산 어귀를 가로지르는 표행이었고 그 결과가 지금과 같았다.

‘그저 어머니를 위하고 싶었을 뿐인데.’

가후의 얼굴에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저 어머니를 치료할 돈이 필요했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 누가 알았겠나.

‘의원님이 어머니를 잘 보살피고 계셔야 할 텐데.’

그동안 일했던 모든 가게들의 신용을 바탕으로 의원에게 모친을 부탁한 그다.

하지만 귀환이 늦어질수록 의원이 어떻게 행동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막말로 다 죽어가는 여인을 무기한 무보수로 보살필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가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곤 폐부에 그득히 쌓인 답답함을 깊은 한숨으로 토해냈다.

“후……우?”

자연스레 고개가 들린 그의 눈에 하나의 인영이 들어왔다.

청색 무복에 예쁜 인상의 사내였는데, 가후 자신의 거처인 전각 지붕에서 두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이내 그 사내가 ‘얼레. 들켰네.’라는 말을 뱉는 게 보였다.

그때였다.

차가운 감촉이 목에 닿았다. 단검과는 조금 다른 촉감이었지만 날카로운 무언가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가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여기 산채 내에서 나에게 칼을 들이밀 사람은 없다. 장난이라도 절대.’

뭐가 됐든 자신은 현재 녹림연맹주 거산악이 각별히 아끼는 총군사다.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외부의 침입자.’

녹림도 중에서 감히 녹림연맹 맹주의 거처가 지척인 곳에서, 그리고 총군사가 거주하는 지붕을 올라탈 간 큰 이는 없다.

가후가 차분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거든 편히 물으시죠. 그리고 여기에 있으면 산적들의 눈에 띌 수 있습니다.”

가후는 적의가 없음을 두 침입자에게 열렬히 표하며 전각으로 천천히 걸었다.

***

천애랑은 눈앞의 사내를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차분하네? 왜 차분하지?’

심지어 주위에 시선을 끌 것을 우려한 듯 조용히 말한다.

점입가경으로 사내는 따라오라는 듯 천천히 걸었다. 그 방향이 눈앞의 전각이었다.

천애랑은 지붕 위에 바짝 몸을 숨긴 송소걸에게 내려오라는 눈짓을 했다.

넓은 전각에 들어선 가후는 매우 차분한 움직임으로 차를 준비했다.

만금전장에 머물 때 어깨너머로 다도를 익혔기에 그의 움직임은 깔끔했다.

“산적답지 않은 우아함이네요.”

“이곳 산적들에게 납치된 몸입니다. 원래는 산적이 아니죠.”

가후가 천애랑과 송소걸 앞에 찻잔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가후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총군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의외의 거물인 탓에 천애랑과 송소걸이 시선을 교차했다.

“총군사?”

“형님. 어떻게 할까요?”

가후의 후위를 점하고 있던 송소걸은 손날을 세워 언제든지 가후의 머리를 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살기등등한 그 모습에 가후가 바짝 긴장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납치된 몸이라고요.”

천애랑은 가후를 빤히 관찰했다.

신체를 보면 무공과는 거리가 멀어보였고, 말하는 어투는 마치 담가의 가주처럼 정제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형적인 학사의 기풍인데, 두 눈빛은 산전수전 겪은 이에게서나 느껴지는 단단함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일견 억울함마저 느껴졌다.

“우리는 녹림도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즉답을 내놓는 가후를 보며 천애랑의 눈썹이 들썩였다.

묘한 자였다. 녹림도가 아닌 걸 알면서도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가 뭘지 궁금했다.

그래서 천애랑은 보다 직설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녹림연맹의 맹주를 죽이러 왔다.”

눈앞 사내의 진위를 빠르게 끌어낼 생각이었다.

“……설마 했지만 진짜일 줄이야!”

이에 가후가 놀란 눈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천애랑과 송소걸에게 적의를 표하는 건 아니었다.

또한 이 소식을 녹림에게 알리려고 어떠한 행동을 취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천애랑은 그의 표정 속에 묘한 기대감 같은 걸 보았다.

“혹시 녹림연맹주가 죽길 바랐던 건가?”

가후가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무인이 아닙니다. 누군가 죽는다는 게 상당히 거북하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제겐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녹림연맹주가 죽음으로써 그 뜻을 이룰 수 있다면 부디 그러길 기도하고 싶네요.”

“빠져나가야 한다는 이유가 뭐지?”

가후가 속이 타는 듯 단번에 차를 들이켰다.

“모친께서 병상에 누워계십니다. 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치료비가 없어 더 이상의 치료를 못 받은 채 돌아가실 겁니다. 그렇기에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가족 때문이었나.’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이곤 가후에게 말했다.

“어떤 정보를 말함이지?”

“근처에서 가장 큰 전각이 녹림연맹주의 거처가 맞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 녹림연맹주는 그곳에 없을 겁니다. 간부들이 여인들을 납치해왔거든요.”

가후의 표정이 격하게 일그러졌다.

“녹림연맹주는 가끔 간부들이 여인들을 상납하면 본인의 전각이 아닌, 그 옆의 작은 건물에서 관계를 즐깁니다.”

“……!”

천애랑과 송소걸이 놀란 시선을 교환했다.

가후의 말이 이어졌다.

“그 작은 건물은 겉으론 평범해 보이지만 지하에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녹림연맹주와 간부들은 아마 그곳에서 욕정을 풀고 있을 겁니다.”

천애랑은 가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보의 진위여부를 가늠하는 거였다.

이를 눈치챈 가후가 부가설명을 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제가 원해서 이곳에 머무는 게 아닙니다. 병상에 누워계실 어머니를 뵈기 위해서라도 꿋꿋이 생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천인공노할 짓에 동참할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천애랑이 송소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가후의 뒤를 점하고 있던 송소걸이 눈썹과 어깨를 들썩이며 천애랑에게 판단을 맡겼다.

생각을 정리한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혹시 방해할 생각인가?”

놀란 눈을 한 가후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알겠다. 그럼 방해 말고 여기 박혀 있어. 나오면 죽는다.”

“알겠습니다.”

가후가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가후를 천애랑이 묘하게 쳐다보고는 방을 나섰다.

***

가후는 방 안에서 멍하니 빈 찻잔을 들여다봤다. 동시에 조금 전 방에서 나간 두 침입자를 떠올렸다.

‘악인들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느껴지는 인상들이 선했다.

‘진짜 녹림연맹주를 상대할 수 있으려나.’

녹림연맹주는 만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무공을 모르는 자신이 봐도 녹림연맹주는 고수였다. 그것도 절대고수.

녹림의 고수 수십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녹림연맹주를 이길 순 없었다.

녹림연맹주와 비무를 한 녹림 고수들 하나하나가 나무를 으스러뜨리고 바위를 부수는 괴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말이다.

‘그런 녹림연맹주를 단둘이서… 가능할까.’

첩첩산중으로 경계망이 형성된 이곳에 나타난 비범함이 있었지만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가후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탈출할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두 사람의 출현은 그나마 도망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침입자다!”

바깥에서 녹림도들의 소란이 들렸다.

‘결국 발각됐음인가.’

발각되는 게 생각보다 늦었지만 그래도 걸렸으니 이젠 둘은 큰 위기에 처할 것이다.

‘다들 소란에 몰려들 때 조용히 나가야 해.’

사전에 봐놓은 길이 있었다. 가후는 그곳을 통해 탈출할 계획이었다.

물론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안다.

‘그래도 해야지. 어머니를 봬야 해!’

각오를 다진 가후는 탈출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조심히 건물 밖을 나온 그는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엄청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아아아!”

“불! 불이야!”

“아악! 내 머리!”

온갖 괴성들과 함께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좀 전의 침입자들이 있었다.

청색 무복의 예쁘장한 사내는 사슴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산적들의 머리를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무복의 잘생긴 사내는 한 손으로 부채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피어오른 붉은 나비가 산적들과 건물들을 가리지 않고 불태우고 있었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아귀도를 만드는 모습에 절로 다리가 떨려왔다.

가후는 더욱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그 때문에 들고 있는 짐을 떨어뜨린 지도 모르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녹림연맹주…?’

검은 무복의 사내의 한 손엔 기절한 누군가가 붙잡혀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녹림연맹주였다.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자 어안이 벙벙했다.

“이쯤이면 됐다. 저자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형님!”

가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청색 무복의 사내를 보았다.

어찌 반응할 새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사내는 손날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산적들의 머리를 깨느라 피칠갑이 된 그의 손이 눈에 가득 담겼다.

그게 가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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