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57화
“형님. 우리 지금 녹림연맹을 치러 가는 거였습니까?”
송소걸이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녹림연맹과 장강수로연맹.
둘은 산길과 물길을 장악하고 통행자를 약탈하거나 통행세 등을 받는 도적들이다.
이들은 가까운 과거엔 몇 개의 채(寨)들이 이합집산한 녹림채와 장강수로채로 불렸었다.
이때만 해도 이들은 무림맹에게 있어서 그저 토벌하기 귀찮은 도적 떼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세가 너무나도 거대해져 그들 스스로 연맹이라 칭하고, 그 으뜸에 있는 이를 맹주라고 불렀다.
그 후 그들은 마치 정도 무림맹의 맹주와 동격이라도 된 듯 행동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각종 비동에 따른 정도 무림 간의 다툼 속에서 무림맹이 점점 커져가는 녹림과 수로채의 성장을 무시한 탓이 컸다.
그 결과가 현재 모든 길을 막고 무림맹을 고사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당연히 무림맹은 뒤늦게라도 녹림연맹과 장강수로연맹을 토벌하려 했다.
하지만 빈번히 도마뱀의 꼬리만 자를 뿐인 결과만 얻어갔다.
도마뱀은 머리를 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잘린 꼬리를 회복할 수 있는 생물.
“그동안 제갈청답지 않게 어설픈 약점을 드러내고 희생을 늘리나 했더니 머리를 찾고 있었군요. 하긴 그게 단번에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기도 하죠. 물론 희생당한 문파들의 불만은 크겠지만요.”
제아무리 어려운 상황을 타계할 계략이었다 하더라도, 전쟁 후엔 분명 피해세력들에 의한 후폭풍이 거셀 것이었다.
심할 경우엔 책임론과 함께 무림맹의 와해가 거론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무림맹 군사인 제갈청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후폭풍을 감내하고 이런 계략을 짤 정도면 현 무림맹의 상황이 그만큼 급하고 좋지 않다는 의미기도 할 것이다.
송소걸은 ‘내 알 바는 아니지만.’이라고 읊조리곤 감탄을 이어갔다.
“그런데 천하의 제갈청이 형님에게 이리 저자세라뇨? 흐하하하!”
새로운 부대를 신설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단주들과 직위의 상하를 두지 않겠단다.
현재 무력단의 단주들은 대개 대문파의 장로들이었다.
각 문파를 대표한 이들인 만큼 각별히 선별된 이들이었고, 각 문파 장문인을 대신할 결정권을 가진 이들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무림맹 내에서도 그 발언권이 높은 이들.
제갈청은 그런 이들과 젊은 가주의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의도를 보였다.
지금의 임무도 그런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녹림연맹주를 치는 것은 공(功)이 큰 임무다. 성공만 한다면 막대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제갈청은 그런 임무를 주요 문파나 무력단주들에게 주지 않고 천애랑에게 맡긴 것이다.
물론 여우 같은 제갈청인지라 녹림연맹주를 죽이는 걸 실패했을 때도 상정했을 것이다.
‘형님 혼자의 실패라면 독단적 행동으로 치부하겠지. 무림맹의 사기엔 타격이 없도록 여론을 조성할 테고.’
하지만 상관없었다. 송소걸이 보기에 천애랑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으니까.
서신에서 느껴지는 천애랑을 대하는 제갈청의 태도가 조심스럽다.
무림맹을 총 지휘하는 군사가 일개 대주에게 강압적인 명령이 아닌 부탁의 명이라는 저자세를 취했다.
또한 녹림연맹주를 처리하는 중차대한 일을 천애랑에게 전담으로 맡긴 것은 무림맹에서의 높은 입지를 시사한다.
이에 송소걸이 연신 히죽거리며 웃었다.
“제갈청이 아주 똥줄이 탔나 봐요. 형님! 거래엔 때론 온정이 없는 법입니다. 상대방이 달아올랐을 때 단물까지 쭉쭉 빼먹어야 해요.”
송소걸이 손뼉을 쳤다.
“나중에 무림맹 소유의 상권들 몇 개를 달라 하죠. 아주 알짜배기들로다가요! 아니다! 거기에 더해 괜찮은 산 지정해서 기공가문의 별장으로 삼고, 불가침영역으로 지정해 달라 하죠!”
천애랑은 송소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낄낄거리며 연신 중얼거리는 것이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오랜만의 외출에 신나 보이는 건 좋았는데, 어째 설동이랑 상태가 닮아가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
“머리! 머리! 머리!”
빡! 빡! 빡!
송소걸의 외침에 맞춰 머리가 깨지는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머리! 배! 다리!”
빡! 빡! 빡!
외치는 부위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머리가 깨지는 경쾌한 소리다.
“다리라며…….”
머리를 맞은 산적들이 억울한 표정으로 기절했다.
“후우! 개운하네!”
모든 산적들을 기절시킨 송소걸이 손바닥을 탁탁 털며 천애랑을 보았다.
이곳은 죽산의 한 곳에 위치한 녹림의 산채.
염왕채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녹림연맹주가 거주하는 주위로 상주하는 산채였다.
그런 염왕채엔 삼백여의 산적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모두가 바닥에 쓰러졌다.
송소걸 혼자서의 결과였다.
“형님! 이제 손 좀 풀리는데 고문 좀 해볼까요?”
송소걸의 성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천애랑은 가볍게 허락을 했다.
그러자 송소걸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고, 산적들은 죽을상을 지었다.
잠시 후.
또 다른 산채인 추광채.
“머리이이이이!”
빠아아악!
경쾌한 소리를 마지막으로 이백 여의 산적들이 모두 쓰러졌다.
“형님 역시 이곳도 아니네요.”
송소걸의 말마따나 염왕채나 이곳에서나 녹림연맹주가 없었다.
이곳 추광채도 염왕채와 구황채, 초위채, 가궁채를 지나 도착한 곳이다.
각 산채를 지날 때마다 녹림연맹주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얻었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한시켰나 본데요.”
염왕채에게 있어 녹림연맹주의 산채는 구황채, 구황채에 있어서는 초위채, 그리고 초위채에겐 가궁채 등.
마치 하나의 미로를 만들 듯 다른 정보들이 주어져 있었다.
문제는 각 채의 채주들은 진정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보통제가 얼마나 섬세하고 어려운 일인지는 송소걸은 물론이거니와 천애랑도 알고 있었다.
이 정도의 섬세함이라면 아마 다른 지역의 산채들에도 이런 작업들이 이뤄져 있을 듯했다.
왜 무림맹에서 토벌대를 보내 녹림연맹주를 죽이지 못했는지 알 법했다.
그리고 제갈청의 정보가 왜 죽산에서 흥산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적혀있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것도 최선을 다해 찾아낸 정보일 터였다.
“녹림연맹주에게도 지낭이 하나 있는 것 같아요.”
“놈을 무조건 잡아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도 모르겠어.”
“그러게요. 혹여 저희가 지나온 산채들에 다른 산적들이 방문이라도 한다면 이상을 눈치챌 게 뻔해요.”
“그렇다면 더는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겠는데.”
천애랑은 잠시의 고민 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죽산(竹山)이라 이름이 불릴 만큼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들이 빼곡했다.
“잠시.”
천애랑은 산채 건물의 벽과 지붕을 밟으며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러곤 곧장 지척에 있는 대나무 허리를 지그시 밟았다. 절묘한 힘 조절에 대나무는 부러지지 않고 크게 휘어졌다.
적당히 휘어졌다 싶을 때 천애랑이 몸을 띄우자 그 신형이 쏜살같이 하늘로 향했다.
이미 산속 깊은 곳. 광활한 하늘 위로 날아오르자 구름에 손이 닿을 듯했다.
천애랑은 시야를 가리는 새하얀 구름을 손바닥으로 밀고선 가장 높은 위치의 대나무를 선점해 내려왔다.
탁.
좁고 위태로운 대나무의 끝이었지만 천애랑의 착지는 가벼웠다.
천애랑은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고선 주위를 둘러봤다. 푸르른 나뭇잎들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제일 높은 나무를 택한 덕에 산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아름답네.’
찰나의 감상 후 천애랑은 안력에 집중했다. 세상이 그의 두 눈으로 빨려 들어왔다.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대나무 군락이 다섯.’
아마도 인근 산채일 듯했다.
‘그리고 녹림연맹주가 있는 산채는 아니겠지.’
천애랑은 내공을 더 끌어모아 안력을 높였다.
눈이 시큰거릴 정도가 되자 가늠할 수조차 없는 거리를 격하고 죽산 너머가 보였다.
대나무 가득하던 숲이 다른 나무들로 바뀌는 지점.
주변 나무들의 밀집도와는 확연히 다른 공간이었다.
앞서 비슷한 규모의 산채들과도 차이가 커 보였다.
‘저긴가.’
확실하진 않지만 확인해볼 가치가 있는 장소를 하나 발견했다.
‘산맥이 연결되어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 그리고 양쪽으로 흐르는 계곡.’
산속에 숨어 생활을 영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천애랑은 곧장 대나무 끝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한참의 채공시간을 거친 후, 대나무 줄기들을 몇 번 박차곤 땅에 착지했다.
“형님 괜찮으세요?”
천애랑의 붉게 충혈된 눈을 보며 송소걸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이에 천애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소걸아. 찾은 것 같다. 가자.”
“오! 진짜요? 당장 가죠!”
신나하던 송소걸은 이어진 천애랑의 행동에 의아함을 표했다.
“형님 왜 다시 대나무를?”
아까처럼 건물의 벽과 지붕을 발판 삼아 대나무의 허리를 지그시 밟고 앉은 천애랑이다.
언제든지 하늘로 쏘아질 준비가 마쳐진 천애랑을 보며 송소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나무 위로 이동하자는 건 아니겠죠……?”
“우리 소걸이가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천애랑의 태연한 대답에 송소걸의 눈동자가 더욱 격하게 흔들렸다.
“아, 아니. 그냥 길 놔두고 왜……?”
두려워하는 송소걸을 보며 천애랑은 피식 웃었다.
과거 적벽의 비동에서 떨어질 때 높은 곳을 무서워하던 송소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이 새삼 반가웠다.
그와 동시에 당시를 함께 했던 찬호가 떠올라 입안이 씁쓸해졌다.
“산길로 간다면 들킬 염려도 있고, 그 시간도 몇 곱절은 소요될 거다. 네가 말했듯이 우리의 흔적이 들키기 전에 가야하지 않겠냐.”
“그건 그렇지만…….”
“네 경지면 충분하니 너무 걱정 말아라.”
천애랑의 따스하고 단호한 표정에 송소걸이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알았어요.”
하지만 대답하는 송소걸의 목소리는 작았다.
천애랑은 피식 웃으며 신형을 날렸다. 한번 해봤던 것이라 좀 전보다 안정적으로 대나무 위에 착지할 수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송소걸도 허겁지겁 올라왔다.
“으어어어어!”
송소걸이 다소 창백해진 표정으로 대나무 끝에서 위태로운 균형을 잡았다.
“으으! 경지가 높아졌다고 높은 곳이 안 무서워지고 그러진 않나 봐요.”
말은 그렇게 해도 생각보다 안정감 있는 모습이었다.
송소걸은 그간 의각원에서의 훈련을 떠올리며 지금의 공포를 떨쳐내는 중이었다.
“그럼 가자.”
천애랑이 표홀한 신법으로 대나무의 끝을 밟으며 나아갔다.
“으으! 형님 같이 가요!”
그 뒤를 송소걸이 위태하게 따랐다.
***
녹림연맹의 총채.
수십만의 녹림도들을 거느린 곳의 중심인 만큼 거대한 규모의 산채를 자랑했다.
상주 인력만도 오백여 명이 훌쩍 넘었고, 대부분이 일류 이상의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심지어 절정 이상의 고수들도 다수 포진된, 말 그대로 녹림 정예의 집합소였다.
심지어 최근엔 무림맹과의 잦은 전쟁으로 숨 고르기를 하느라 평소보다 더 많은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몇몇 산채를 책임져야 할 채주들도 회의를 위해 모였으니, 넓은 총채가 고수들로 비좁을 지경이었다.
그런 총채의 중심.
총채주, 지금은 녹림연맹의 맹주로 불리는 거산악의 거처 근처에 자리한 전각이 하나 있었다.
녹림연맹을 이렇게 성장시키는데 공로가 지대한 녹림연맹의 총군사의 거처.
그곳을 향해 한 사내가 터덜터덜 걸어갔다.
수염도 나지 않은 앳된 외모, 유약한 체구에 학사의를 입은 사내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대체 여기서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나.”
그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루빨리 어머니를 뵈러 가야 하는데 어쩐단 말인가. 이 전쟁통 속에 어머니께선 무탈하시려나.”
가후.
병색이 짙어진 어머니의 요양비를 벌기 위해 먼 길을 떠났던 그는 홍건적과 황실의 전투소식에 다급히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의 건강과 안전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름 모를 산을 넘을 때 산적들에게 붙잡혔고, 살기 위해 주절거린 말들이 이목을 끌어 이곳까지 오게 됐다.
그 후로 그는 사람 죽이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산적들의 서슬 퍼런 칼 앞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게 무사히 살아남아 어머니를 봬야 한다는 일념에 몇 가지 생각들을 첨언했다가 이곳의 총군사로 대접받고 있었다.
당장의 생존은 보장받았지만 그럴수록 이곳에서 빠져나가 어머니를 뵐 가능성은 낮아져만 갔다.
“하아.”
가후의 한숨이 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