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54화
“야수왕님?!”
당정아가 놀라며 반색했다.
과거의 첫 만남과 인상이야 어찌 됐든 야수족과 당가는 현재 나름의 우호적 관계를 맺는 곳이었다.
남림에 자생하는 독초들을 당가에서 주기적으로 채취해가고, 그 대가로 야수족에겐 금품과 동물들이 좋아할 환단을 제공했다.
상생의 관계.
서로 간섭하지 않고 적당히 이득이 되는 범주 내의 교류만 있는 정도였다.
물론 중간에 천애랑이라는 존재가 개입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운 힘을 내겠지만 팔각사의 인연 이후로 그럴 일은 없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남림야수족과 야수왕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절묘한 순간에.
뭐가 됐든 당정아 입장에선 그들의 등장이 이렇게 든든하고 반가울 수 없었다.
“저 시체 같은 놈들이 적이겠지?!”
처음 보는 야생동물을 타고 달려오던 맹건의 물음이었다.
“맞습니다!”
당정아의 빠른 대답에 맹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상황부터 정리하고 대화를 나누자고!”
이어서 맹건은 뒤따르는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맘껏 휘저어라! 앞장서겠다!”
맹건이 타고 온 동물을 재촉했다.
“가자! 죽웅(竹熊)아!”
맹건이 죽웅이라 부른 동물은 거대한 덩치를 가진 곰이었다.
다만 특이점이라고는 일반적으로 산에서 마주하는 갈색 털의 곰이 아니었다.
흰털과 검은 털이 신체의 구획을 나눈 독특한 동물이었다.
특히 검은 팔 다리와 눈 주위가 점박이처럼 검게 물들어 있는 게 유별했다.
꾸우웅!
죽웅이 크게 울부짖으며 강시들에게 돌진했다.
콰과과광!
단단한 강시들이 우후죽순 나자빠졌다.
“우리도 간다!”
“흐랴아아아!”
맹건을 뒤따르는 야수족들도 곰, 늑대, 호랑이, 표범 등 가지각색 동물들을 내세우며 돌진했다.
“비켜! 깔려도 모른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거대한 코끼리였다.
콰과과과과광!
엄청난 굉음들과 함께 강시들이 속수무책 튕겨 나가고, 발에 짓밟혔다.
동물들과 함께 하는 야수족들의 돌파는 숫제 자연재해 같았다.
그들의 엄청난 위용에 사천무림연합 무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정아는 그들이 혼란스럽지 않도록 말했다.
“남림에서 온 지원군입니다! 그러니 모두 힘을 내죠!”
“지원군!”
지쳐가던 사천무림연합에게 단비와도 같은 말이었다.
혹시나 적이면 어쩌나 걱정하던 무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호의적인 시선으로 야수족들을 쳐다봤다.
“어물쩍 거리는 놈은 방해되니 꺼져라!”
물론 맹건의 거친 언사에 인상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긴 했다.
“누님! 괜찮습니까?”
당상호가 다급히 뛰어와 당정아의 곁에 붙었다.
“난 괜찮다! 어찌 된 일인지는 나중에 듣겠다.”
당정아가 당가의 장법인 적련신장으로 강시들의 머리를 으깨며 말했다.
당상호도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고선 암기 대신 채찍을 꺼내 들었다.
채찍은 그가 다룰 수 있는 대표 무기 중 하나였고, 당가에 들린 후 다급히 챙겨 나온 것이었다.
촤라라라락!
당상호가 휘두른 채찍이 강시들을 휘저으며 난자했다.
내기가 담긴 채찍은 하나의 날붙이와 다를 바 없는 효능을 보였다.
“누님도 하나 드립니까? 가문에서 챙겨왔습니다.”
당상호가 허리춤에서 여분의 채찍(편, 鞭)을 내밀자 당정아가 마다치 않고 받아 쥐었다.
“좋다. 가자!”
다른 무가와는 다르게 당가에선 채찍을 다루는 무공들이 발달해 있었다.
다만 실전에서 써먹을 만큼 익히기가 너무나 까다로워 당가 내에서도 소수만 익힐 뿐이었다.
채찍을 익히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채찍을 살아있는 것처럼 다룰 방대한 내공의 유무 때문이었다.
가주의 직계로서 엄청난 내공을 보유한 당정아와 당상호는 자연스럽게 편법(鞭法)을 익혔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회타연편십삼식으로 간다!”
당정아가 외치며 채찍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부우우웅!
내공으로 강화된 채찍이 삼 장의 거리를 격하고 강시들을 휩쓸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채찍이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가 다시 멀리 뻗쳐나가기를 반복했다.
그 흐름이 끊기지 않아 당정아를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이러한 당정아의 움직임에 맞춰 당상호도 움직였다.
함께 같은 무공을 수련한 만큼 서로 말하지 않아도 다음 행동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당정아의 채찍이 머물지 않는 틈새로 당상호의 채찍이 휘둘러졌다. 둘의 움직임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촤촤촤차차착!
순식간에 당정아와 당상호 주위의 강시 백여 구가 쓰러졌다.
“후우.”
당정아가 숨을 골랐다.
‘역시 야수족에서 강시들을 흩트려주니 살 것 같네.’
좁은 공간에 몸을 비집어 넣듯 꾸역꾸역 밀려오던 강시들의 집중도가 야수족에 의해 와해되고 있었다.
특히 맹건은 만부부당이어서 과거 장비가 환생이라도 한 듯 용맹무쌍했다.
그에게 쓰러지는 강시들만 해도 벌써 오백이 넘어가는 듯했다.
‘역시 화경의 고수 앞에선 일반강시들은 소용없구나.’
당정아가 깊은 감탄을 했다.
당가의 기록으로만 접했던 강시. 그녀는 그 실체를 처음 경험하는 중이었다.
‘일반 강시로는 초절정의 고수에게도 소용이 없는 것 같고.’
초절정의 경지인 자신과 아미파의 나부약, 청성파 목미랑은 가빠진 숨을 토해낼 뿐 강시들로부터 괜찮아 보였다.
문제는 그 아래부터였다.
절정고수들은 급속도로 소모되는 내공에 점점 일반 강시들을 힘겨워하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아마 지금처럼 강시들이 쉬지 않고 몰아붙인다면 한 식경 안에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듯했다.
내기의 발출이 자유로운 절정부터가 이럴진대 그 아래인 일류와 이류의 무인들은 어쩌겠나.
급격히 소모되는 체력에 일류 이하의 무인들이 쓰러져갔다.
그럼에도 당정아는 희망을 찾고자 노력했다.
‘부상자들을 뒤로 물리고 차륜전으로 상대한다면 지금의 강시들로부터 승산이 있겠어.’
그러나 그녀의 희망은 또 한 번의 경악성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강시다! 강시가 또 몰려온다!”
“헉! 이번엔 더 많다!”
“젠장! 뭐가 이렇게 많아!”
“미치겠네.”
무인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자연스레 당정아의 시선도 옮겨졌다. 그녀의 입이 놀라 벌어졌다.
산 능선을 넘으며 추가적으로 등장하는 강시의 수가 앞서 나타난 오천여의 강시들보다 몇 곱절은 더 많아 보였다.
숲의 나무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강시들의 발 구름에 산이 뒤흔들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딱딱한 움직임의 일반 강시들과는 달리 경공술을 펼치며 뛰어오는 강시들이 있었다. 그 수가 백이 훌쩍 넘었다.
당정아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활강시예요!”
당정아는 빠르게 성문 방향으로 뒤돌아봤다.
방진을 형성해 전방에서 강시들을 잘 막아낸 덕분에 성문까지의 길이 쭉 뚫려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저 강시들의 파도에 고립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가문의 터전과 성도의 민간인들이 쑥대밭 될 것이 자명해 보였다.
특히 활강시라면 경공술로 저 높은 성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막을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선택은 성안으로의 후퇴밖에 없어 보였다.
관군들을 무시하고서라도 성문을 틀어막고, 성벽을 넘는 활강시들을 각개격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당정아는 결정을 마쳤지만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모든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는 후퇴 과정에서 나오는 법이다.
여기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생존할 수 있을지 우려가 되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멈춰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도자란 끊임없이 고민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정아는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당장 성안으로 후퇴해야 합니다! 여기서 활강시와 싸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게다가 활강시들이 성벽을 넘기라도 하면 민간인들의 피해가 커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알겠네!”
아미파의 나부약과 청성파의 목미랑도 빠르게 수긍을 하며 무인들의 후퇴를 챙기고자 움직였다.
그때였다.
딸랑.
방울소리가 들렸다.
딸랑. 딸랑.
수천, 수만의 움직임이 있는 공간임에도 방울소리가 모두에게 들렸다.
그러더니 돌연 달리던 강시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에 사천무림연합의 모두가 의아함을 표했다.
“……?”
“이게 무슨…….”
“강시들이 멈췄다?”
강시들 사이를 활개 치던 맹건도 의아해했다.
“당가주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당정아는 즉각 답을 해줄 수 없었다.
강시들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정아는 물론 당가의 모든 이가 아는 자들이었다.
깊은 주름이 가득한, 수많은 독을 다루며 얻은 여러 화상과 상처를 가진 노인들.
“암각주 당궁석 장로와 무각주 당충수 장로? 그리고 암각과 무각의 일원들…….”
전 당가주의 죽음 이후 사라졌던 이들이었다.
여러 흔적을 통해 오랜 시간 추적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던 이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수만 강시들의 사이에서.
“오랜만이군.”
“이놈들은 당가의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할 생각을 안 하고. 쯧쯧.”
암각주와 무각주 둘의 말에 당가의 인원들이 움찔했다.
“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당가에 먹칠이나 하며 도망 다니던 영감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당상호의 말에 암각주와 무각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못 본 사이 소가주가 미쳤나 보구만. 아! 아닌가. 저런 모습이 원래의 소가주였던가.”
“크크큭. 가주님이 죽은 후 꼬리 만 개새끼마냥 행동하던 놈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군.”
두 각주의 비아냥에 당정아가 앞으로 나섰다.
“당가의 이탈자들께선 여기엔 무슨 일이십니까. 그것도 이렇게나 많은 강시들을 이끌고요.”
당정아의 눈이 무각주의 허리춤에 있는 방울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무각주가 인상을 팍 썼다.
“그래 네년이 문제였다! 얌전히 독인녀로서의 역할을 했으면 됐을 거를! 만약 그랬다면 당가는 지금 전대미문의 번영을 누렸을 것이다!”
무각주가 분노를 표출했다.
독인녀라는 단어를 아는 당가의 모두가 불쾌한 시선들을 모았다. 이에 무각주가 품에 손을 넣으며 으르렁거렸다.
“이것들이 그새 정신이 빠졌나. 감히 하늘 같은 장로에게 눈을 치켜떠? 확 눈깔들을 파줄까?”
험한 무각주의 말에 움찔하는 당가무인들이 생겼다.
그때 맹건이 당정아의 곁으로 다가오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히야! 여기도 대찬 놈이 없진 않구나! 그런데 그런 거는 나이나 직급이 아니라 강함으로 따져야 하는 거다. 그런 면에서 노인네 둘은 실격이다.”
무각주는 물론이고 덩달아 조롱을 당한 암각주도 인상을 썼다.
“감히 남만의 야만인이!”
기세를 일으키는 두 각주를 보며 맹건이 기꺼운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당장이라도 전투가 재개될 것 같은 분위기 사이로 당정아가 들어왔다.
“잠시.”
맹건에게 양해를 구한 당정아가 두 각주들에게 물었다.
“왜 그랬습니까? 아니,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그녀의 질문에 두 각주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무각주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