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49화
동악 태산, 남악 형산, 북악 항산, 중악 숭산과 함께 오악(五岳) 중 하나로 불리는 서악 화산.
섬서성 화음현 인근에 자리한 화산엔 선인, 낙안, 연화라 불리우는 세 봉우리가 있었다.
그중 연화봉에 자리한 문파가 있으니 그 이름이 화산파다.
도가문파인 화산파는 매화검법이라는 불세출의 무공을 바탕으로 무림 검객들의 선봉에 있었다.
또한 구파일방의 일좌이자 무림맹주를 배출하며 엄청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런 화산파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흑화였다.
그들은 자신을 가로막는 문지기들을 무력으로 밀쳐내곤 화산파에 들어섰다.
자연스레 흑화는 화산파의 경계 가득한 포위를 마주했다.
하지만 현성과 현곽은 주변의 경계를 무시하며 여유롭게 화산파의 정경을 감상했다.
“후우. 오랜만이구나.”
“그러게 말이오.”
둘은 새로운 감회를 느끼며 감탄을 토해냈다.
그들을 뒤따른 흑화의 일원들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떠난 지 수십 년이다.
강산이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었을 세월이건만 화산파는 언제나 그러하듯 그대로 있었다.
“노인들은 누구요!”
흑화를 포위한 화산파 제자들이 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그런 이들을 보며 현성과 현곽이 혀를 찼다.
“까마득한 선배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후배들이 건방지구나.”
“교육을 시키리까.”
“됐다. 저기 조금은 낯익은 것들이 오는구나.”
갑작스런 소란에 백 자 배 장로들과 청 자 배 일대제자들이 날 듯이 뛰어왔다.
“무슨 소리냐! 경거망동 말거라!”
장로들은 소란스런 제자들을 다그치곤 현성과 현곽 앞에 섰다.
장로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본도는 소요검대를 책임지는 장로 백문이올시다.”
선풍도골의 분위기를 가진 노 도인이었다.
“크크크큭.”
“으흐흐흐.”
백문의 소개에도 현성과 현곽은 낮게 웃을 뿐이었다.
이에 백문이 불쾌한 심기를 표출했다.
“노인들은 누구시오. 뉘시기에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이오.”
“크크큭. 많이 컸구나.”
“세월이 참으로 빠릅니다 사형. 백 자 배가 큰 어른 노릇이라니.”
본인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동문서답하는 둘에 백문의 심기가 뒤틀렸다.
“경고하겠소. 왜 무뢰배처럼 사람들을 이끌고 화산에 방문했는지 그 이유를 말하시오.”
하지만 현성과 현곽은 그저 낄낄거릴 뿐이었다.
“……이 사람들이 정녕! 그대들은 화산이 우스운가!”
백문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를 감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허억!”
일대제자들 사이에 있던 청공이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에 주위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장로들의 시선도 모여들었다.
모두가 의아해할 때 청공이 소리쳤다.
“저들입니다! 저들이 백진 사백님과 사형제들을 죽인 흑화입니다!”
“……!”
모두가 경악에 빠졌다.
특히 백 자 배 장로들은 화등잔만 한 눈으로 흑화를 보았다.
기억은 가물거리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들이었다.
“진짜 흑화인 것인가.”
“이들이 어떻게….”
“감히 염치도 없이 화산파를 밟다니!”
현성과 가장 가까이서 마주한 백문은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흑화…….”
흑화가 죽였다던 일대제자들 속엔 그의 제자가 있었다.
청공 홀로 귀환하던 날부터 제자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는 많은 시간을 슬픔으로 지새워야 했다.
개방의 소방주가 백진과 일대제자들의 죽음을 공인해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흑화!”
백문의 손이 움직였다.
샤아악!
화산파의 정수가 그의 손에서 펼쳐지며 눈앞의 현성에게 뻗어갔다.
이에 따라 현성도 마주 검을 휘둘렀다.
까강! 까가가강! 까가가가강!
순식간에 수십 합의 공방이 오고갔다.
소요검이라는 별호가 있는 백문의 검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별호처럼 그의 검은 여유로우면서도 정확한 빠름이 있었고, 이는 상대방의 숨통을 천천히 끊어왔었다.
하지만 소요검 백문을 마주한 현성의 검은 백문보다 더 정확하고 빨랐다.
“이럴 수가!”
공방이 길어질수록 지켜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백문 또한 이를 악 다물며 검에 공력을 불어 넣었지만.
‘소용이 없다.’
흑화의 수좌가 화산파의 천재 중 천재라더니 모든 검식을 똑같이 파훼해온다.
마치 똑같은 자신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나아가야 하는 미래를 보는 기분이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깨달은 검식들은 더 오랜 시간의 깨달음 앞에서 벽을 만났다.
“여전히 고루하구나. 화산파의 정경이 수십 년 전과 그대로인 것처럼 말이다.”
말을 한 현성의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중검을 다루듯 화산파의 쾌검에 무게를 더했다.
쿠웅! 쿠우웅!
마치 도를 휘두르듯 하는 현성의 공격에 백문이 신음을 흘렸다.
“크윽!”
백문이 확연하게 불리해졌다.
“이건 화산의 검이 아니다!”
백문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현성의 검을 크게 밀어냈다.
그러곤 뒤로 물러나 기세를 정비했다.
현성이 주위를 둘러보며 낮게 웃었다.
화산의 검.
쾌와 변을 위주로 한 아름다운 검.
극도의 쾌와 변이 환으로 이어져 만들어내는 매화는 무림일절로도 불린다.
하지만 현성 그가 생각하기에 이는 고루했다.
아무리 빠르고 변칙적이어도 화산의 검은 너무나 정직했다.
달리 말하면 검이 살(殺)보다는 생(生)에 의미를 두었다는 의미다.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으로 말이다.
그 때문에 화산의 검은 상대방의 숨통을 끊어야 할 때, 굳이 변초를 넣으며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살(殺)에 중점을 둔, 지금처럼 실전적인 검식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현성이 혀를 찼다.
“무림인이라면 말이지. 강해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그게 이 검림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자 진리다. 즉, 너희들과 같은 안일한 마음가짐으로는 도태될 뿐이란 말이다.”
현성이 모두에게 들을 수 있게 차분하게 말했다.
마치 후배들을 가르치는 어투였다.
“이는 끝없는 자아성찰과 실전을 통해서 단련할 수 있는데, 너희들은 둘 모두 부족해 보이는군. 나의 화산파가 이렇게 약해서는 안 되지.”
조롱과도 같은 현성의 말에 주위를 둘러싼 화산파의 일원들이 불쾌함의 기세를 뿜어냈다.
흑화가 아무리 과거 화산파에 적을 두었었다 하지만 화산파에 피를 흩뿌린 흉수에 불과했다.
“네놈들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백문이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그 모습들을 보며 현성이 웃었다.
“크흐흐흐. 좋다! 약해진 화산파의 후배들이여 내 너희들에게 숙제를 주마!”
“……?”
현성과 흑화를 압박하던 화산파의 일원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뒤를 돌아봤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연화봉 낭떠러지 아래에서부터 무언가가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헐벗은 복색에 거무죽죽한 피부, 그리고 이지를 잃은 듯 초점 없는 눈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들은 다짜고짜 화산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현성이 크게 외쳤다.
“적자생존이다! 그러니 살아남아 보거라! 살아남은 이들은 친히 새로운 화산파의 일원으로서 받아주겠다! 으하하하하!”
현성이 흑화를 데리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백문은 그런 현성을 따라가 공격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백문 장로! 지금 제자들이 위기에 처했네!”
예기치 못한 후방의 공격에 후위에 있던 이대, 삼대 제자들이 혼란에 빠져있었다.
백문이 이를 악다물었다.
눈앞의 흑화에게서 등을 돌리는 게 심히 불편했다.
저들이 언제 공격을 해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성은 공격의지가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느긋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해야 어서 가봐라. 어린 녀석들이 강시에 다 죽겠구나.”
“강시……!”
백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득.
백문은 이를 갈고는 후방으로 신형을 날렸다.
강시들에 의해 분주해진 화산파를 보며 현성이 낮게 읊조렸다.
“이겨내 보거라. 그래야 우리가 만든 신을 선보일 기회가 있을 것이니.”
***
“징그러운 내시 놈들!”
동창과 관군들을 떠올린 천애랑이 혀를 찼다.
그는 하오문주와 일별한 후, 소오태산을 벗어나자마자 동창과 관군들을 마주했다.
작정하고 포위망을 구성했는지 가는 곳마다 동창과 관군들이 있어서 애초의 경로에서 크게 돌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시간이 다소 지체됐다.
그래도 지금은 무사히 하북성을 벗어나 산서를 지나는 중이었다.
백호의 속도라면 길어도 이틀 안에 화산에 도착할 것이었다.
다소 마음을 진정시킨 천애랑은 하오문주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마교와의 전쟁에 있어서 화산파는 아직 필요하네. 화산파가 큰 위기를 당한다면 정도문파의 민심이 크게 흔들릴 수 있으니.]
소림사와 마찬가지로 화산파는 구파일방의 일원.
특히 언제나 든든하게 무림맹을 지탱해야 할 무림맹주가 화산파의 위기에 흔들린다면, 마교와 마주한 전선에 악영향이 미칠 건 자명했다.
[지금 흑화의 존재는 현 상황에서 매우 큰 변수일세. 그리고 이 변수는 마교에게도 적용되지만 그 피해는 아마 정도무림이 더 클 것일세.]
그런고로 하오문주는 천애랑에게 화산파를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화산파의 일이 끝나거든 무림맹주를 만나보게. 그가 꾸준히 자네를 찾는 것도 있으나, 자네가 복수를 이루기 위해선 이용해야 할 자이네.]
당장 화산파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모르나 무림맹주와 자연스럽게 만날 계기는 될 터였다.
‘무림맹주라…….’
천애랑은 천선을 매만졌다.
마교에게 복수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그 끝이 가시화되는 게 느껴졌다.
오직 혼자였던 과거라면 모르나 지금이라면 무림맹과 대등한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맹우들과 가솔들이 있으니.’
어지간한 세력들보다 강한 발언권을 가져야 했다.
‘그래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마교라는 공동의 적이 있기에 힘이야 쉽게 합칠 순 있으나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
자칫했다간 무림맹이라는 큰 덩어리 안에서 그저 하나의 조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실속을 챙겨야 했다.
그 순간을 위해 지난 수 년 간 맹우들을 만들고, 가솔들을 강하게 훈련시켰던 것이다.
‘무림맹을 이용하기 위해서.’
그것이 복수를 이룰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라 생각했기에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온 것이다.
생각들을 정리하던 천애랑이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매우 멀리서 충돌하는 기파가 아스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 전투를 치르는 것 같았다.
“으음?”
천애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먼 거리이기에 확실치는 않으나 기파 속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호야.”
천애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호가 엄청난 속도로 내달렸다.
하나의 능선과 계곡을 뛰어넘자 천애랑은 전투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백이 넘는 수의 산적들과 십여 명의 젊은 남녀들이 싸우고 있었다.
중과부적.
압도적인 숫자 앞에 젊은 남녀들이 위기에 처하는 것이 세간의 상식일 것이라.
그러나 실상은 십여 명의 젊은 남녀가 수백의 산적들을 모두 때려눕히는 중이었다.
젊은 남녀가 낄낄거리며 웃는다.
“으하하하! 간지럽구나 이것들아! 우리 가주님의 공격에 비하면 네놈들의 도는 그저 간지러울 뿐이다!”
“으휴! 오빠! 설동 오빠 닮지 말라니까!”
“추연아 뭔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냐? 나처럼 번듯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것들이! 감히 우리 가모(家母)님을!”
“맞아! 이것들이 감히!”
“……설동이랑 추담이는 나중에 보자.”
“오빠! 춘석 오빠 좀 말려봐 사람을 고기 다지듯 팬다!”
이들의 요란이 커질수록 전투는 급격하게 끝을 맞이했다.
이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천애랑은 이마를 짚었다.
왜 멀리서도 익숙한 기운이라고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너희들 대체 여기서 뭐 하냐?”
천애랑이 모습을 드러내며 묻자 십여 명의 젊은 남녀들이 놀라면서도 반색을 했다.
“가주님!”
“가주님!”
“오오! 가주님!”
하오문주의 부상을 살피고, 화산파의 위기에 대처할 겸 천애랑이 부른 이들.
수년 간의 지옥훈련을 마치고 세상에 나온 의각원의 원생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