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47화
“허억!”
오호대주가 경악성을 뱉었다.
벽력대주가 선을 넘는 모습을 보인 건 인정한다.
가문을 구해준 은인에게 욕을 한 것도 모자라 개방의 소방주와 함께 온 손님에게 조롱이라니.
‘맞아도 싸지.’
하지만 진짜로 맞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팽가 안에서.
그리고 저렇게 무기력하게 맞아 날아갈 줄도 몰랐다.
‘그래도 명색이 팽가 무력대의 대주인데.’
오호대주가 침을 꼴깍 삼키며 설화를 보았다.
엄청난 무위로 마교를 몰살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그녀가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보내왔다.
이에 오호대주가 움찔거렸다.
드르륵.
오호대주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설화의 시선은 무관심하게 오호대주에게서 벗어났다. 동시에 그녀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해갔다.
설화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오호대주는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벽을 뚫고 날아간 벽력대주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의 두 눈에 희번득한 살기가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만 같은 기세였다.
오호대주가 다급히 설화를 막았다.
“내가 수습하겠네!”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그때 천애랑이 일어났다.
“설 소저.”
그러자 설화에게서 풍기던 한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이에 오호대주가 감사의 마음으로 천애랑을 보았다.
눈이 돌아가 살기를 뿜어대곤 있지만, 덕분에 벽력대주만 진정시키면 상황을 일단락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호대주는 이어진 천애랑의 말과 행동에 입을 떡 벌렸다.
“기절을 시키려거든 살짝 침투경의 묘리를 섞어야 하오. 이렇게.”
말과 함께 천애랑의 신형이 사라졌다.
빠아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바깥에 있던 벽력대주가 뚫린 벽으로 정확하게 날아 들어왔다.
“호오.”
깔끔한 일격에 설화와 방덕, 황보수란이 감탄을 했다.
그에 반해 오호대주는 대경실색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벽력대주를 내려다보았다.
미동도 없는 것이 죽거나 기절했거나 무조건 둘 중 하나가 확실했다.
천애랑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 시진 정도 뒤에나 깰 거요. 많이 기절시켜 봤으니 믿어도 되오.”
“…….”
오호대주는 어떤 반응과 표정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팽가의 대표로서 팽가의 일원을 공격한 것에 대해 따끔한 호통을 쳐야 할지.
그게 아니면 먼저 욕을 보인 벽력대주의 인과응보라고 넘겨야 할지.
다소 혼란스러워하던 오호대주에게 방덕이 조심히 다가왔다.
“다시 한 번 내가 미안하네.”
방덕이 말을 이었다.
“자네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고 팽가를 욕보이는 게 아니네. 그러니 차라리 나를 탓하고 넘겼으면 좋겠구만.”
오호대주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가문이 혼란스러울 때. 저들과 드잡이할 기력도 없다.
그저 빨리 대화를 마치고 쉬고 싶었다.
오호대주의 양보에 방덕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줘 고맙네.”
말을 하는 방덕의 얼굴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 모습에 오호대주는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자신만큼이나 마음고생을 하는 이가 있다는 것에 묘한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방덕은 침중한 표정으로 오호대주에게서 등을 돌렸다.
‘천 가주랑 다니면 제 명에 못 살겠구만.’
태연한 천애랑을 보며 방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재밌는 걸 어떡하누.’
오호대주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방덕의 입꼬리가 연신 실룩거렸다.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림에 성격대로 크게 웃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필사적으로 표정관리 중인 그다.
내면의 춤을 추는 방덕과는 별개로 설화는 천애랑과 반가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침투경의 묘리라. 천 가주. 나중에 알려줘요.”
그녀의 말에 천애랑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소. 그대라면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을 거요.”
“저도 알려주세요!”
조용히 지켜보던 황보수란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그런 그녀를 설화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서방에게 도움을 줄 이가 많다면 좋을 일이지. 난 설화다. 그댄 몇 살이지?”
“약관인데요.”
“그렇다면 날 언니라고 불러. 난 수란이라고 부를 테니.”
황보수란이 반색했다.
“그래도 돼요?”
그녀는 내심 어디서든 당당한 설화와 친해지고 싶었었다.
그런데 설화가 먼저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니 반가웠다.
“안될 게 뭐야.”
“좋아요!”
천애랑은 금세 친해지는 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느새 둘은 딱 붙어서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천애랑은 의자에 앉으며 오호대주를 바라봤다.
벽력대주에 의해 끊긴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대화가 끊긴 바람에 묻지 못한 것이 있는데 말이오.”
“말씀 하시게.”
오호대주가 다소 지친 기색으로 대꾸했다.
“공격왔던 이들 중에 요기를 쓰는 여인들이 있다 했소?”
“맞네. 환술과 현혹의 기운이 담긴 요기였지. 그 때문에 우리 팽가 무인들의 피해가 더욱 커졌고.”
오호대주가 그때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천애랑은 방덕과 시선을 교환했다.
“음살단이 맞는 듯하오.”
“혈교가 마교에 의해 멸문했다더니 음살단은 마교에게 흡수됐었나 보군.”
천애랑은 오호대주에게 질문을 더 했다.
“그런데 마교가 왜 팽가를 공격한 것이오?”
근본적인 질문이었지만 오호대주는 대답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모르네. 우린 그저 기습을 받고 처절하게 저항했을 뿐이니.”
“흐음.”
턱을 쓸며 고민하던 방덕이 물었다.
“혹시 팽가에서 사라진 것은 없는가?”
이유 없는 전쟁이란 없다.
사사로이는 자존심이 됐든 크게는 야망이든 모든 전쟁엔 이유가 있다.
당연히 이번 마교의 공격에도 어떠한 의중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팽가주를 죽이고 팽가의 터를 파괴하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드라쿠가 전투 중간에 물러난 것이 이해가 안 됐다.
‘물론 함께 온 수하들을 믿었을 수도 있겠지만.’
방덕이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할 때, 무언가 떠오른 오호대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타고 파괴되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것들 투성이지만, 그 중 가주전 깊숙이에 있던 보물 하나가 없어진 것은 확실해 보이더군.”
“보물?”
“가문 최고의 영약일세. 화룡단에 필적할 양기와 강력한 내공증진의 효능이 담겼지. 가문에서도 단 하나뿐이었던 건데.”
말을 하던 오호대주가 혀를 찼다.
혼원벽력신단은 도시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거금과 각고의 노력이 들어가 완성된 결과물이었다.
팽가의 백년지계를 이룰 안배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졌다.
원래라면 팽가주가 직접 소가주를 진기도인하며 이 영약을 쓸 생각이었다.
그럼으로써 팽가의 위용을 재차 드높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가주가 죽고, 혼원벽력신단도 사라졌으니 그러한 안배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다소 어두워진 팽가의 앞날에 오호대주가 침음을 흘렸다.
그사이 방덕은 대충 자란 수염을 긁적이며 상념에 빠졌다.
머릿속으로 그간 집결된 정보들을 펼치고, 연관성의 유무를 분류해 작금의 사건에 대한 다방면의 가능성을 고민했다.
더 이상 나눌 정보가 없음에 대화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에 천애랑이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그는 설화를 보았다.
“그런데 설 소저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이오?”
솔직하게 천애랑의 입장에서 팽가의 사건들보다 더욱 궁금했던 사항이었다.
그렇기에 대화가 일단락되자마자 묻는 것이었다.
“아! 우연히요.”
“우연?”
시선들이 모였다.
생각을 정리하던 방덕도, 도움을 받고도 그 이유를 듣지 못했던 오호대주도 궁금한 시선을 모았다.
설화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예. 우연히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저 인근을 지나던 중이었어요. 내 서방. 아! 천 가주의 흔적을 찾아 움직였다는 게 맞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천애랑에게로 쏠렸다.
천애랑은 설화에게 설명을 요하는 시선을 보냈다.
“실은 천 가주가 북해빙궁을 떠나는 날, 제가 몰래 따라나섰어요.”
“……!”
장내 인물들의 시선이 뜨거워졌다.
특히 황보수란은 입을 떡 벌리고 설화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천 가주의 행적을 하북 북쪽에서 놓쳤죠.”
천애랑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뒤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설마 빙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떠돈 것이오?”
“네.”
설화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하오문주를 협박한 결과 천 가주의 행적은 찾았었어요.”
장내의 인물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하나 찾겠다고 천하의 하오문주를 협박하다니.’
황보수란은 설화의 강단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고, 오호대주는 그저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종업계의 방덕은 식은땀을 흘렸다.
‘조심해야겠군.’
북해빙궁과 큰 접점이 없는 개방이다.
방덕은 내심 이 자리를 빌어 팽가의 정보를 수집하고, 북해빙궁과의 관계 개선을 꾀할 생각이었다.
‘강한데 잃을 게 없는 자만큼 무서운 게 없는 법이지.’
정보단체가 다루기 까다로운 손님이었다.
즉, 구슬리지도 못하는데 무서운 손님들.
그렇다고 내치자니 우호적일 때의 이점이 압도적으로 많아 그럴 수도 없는 존재.
마치 천 가주와 같은 인물들.
‘그런데 똑 닮은 존재가 또 있네.’
방덕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이와 별개로 천애랑은 의아했다.
‘의각원의 위치를 알았으면 찾아와도 됐었을 텐데.’
이에 대한 답은 이어진 설화의 말에서 나왔다.
“소중한 동생을 살리는 데에 집중 중이라고 들었거든요. 제 욕심에 그런 중요한 순간을 방해할 순 없잖아요?”
설화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아.”
황보수란이 감탄을 했다. 그녀의 표정은 거의 설화를 우러러보는 느낌이었다.
“고맙군.”
천애랑은 설화에게 감사를 표했다.
진심이었다.
아마 저 때라면 대환단 등 영약들을 다루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땔 테다.
그리고 의각원의 위치는 여기 개방의 소방주도 모르는 극비다.
그런 점을 고려해 그녀가 말을 아끼는 게 느껴졌다.
의도가 무엇이 됐든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천애랑의 호의적인 태도에 설화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러다 최근 천 가주가 산동에서 큰 활약을 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가보려 했죠. 그러다 우연히 팽가를 공격하는 마인들을 봤고요.”
“그래서 팽가를 도왔다는 거요?”
“네. 우리 둘의 공통된 적이 마교잖아요?”
설화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천애랑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우리 둘의 공통된 적.”
그때 설화가 손뼉을 쳤다.
“아! 그리고 서방을 마냥 기다리기만 한 게 아니에요. 후에 당신을 돕기 위해 나름의 준비를 했죠!”
어느새 자연스레 서방이라 부르는 설화였지만, 천애랑은 우선 무시하고 되물었다.
“준비? 무슨 준비를 말하오?”
“서방은 추후에 가문을 다시 세울 거잖아요?”
“그렇긴 하오만.”
“그래서! 쓸 만한 사람들을 모았죠!”
그랬다.
설화는 천애랑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사람.
세력을 이루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요소.
그러한 인재들을 모으기 위해 그녀는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아 신변이 자유로운 이들.
동시에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이나 재주를 익혀 도움이 되는 이들.
설화는 이런 이들을 모았고, 그 결과가 지금의 빙백신대였다.
천애랑은 감탄했다.
“아까 봤던 여협들을 말하는가 보군.”
오면서 봤던 여협들 개개인의 무력이 팽가 무인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솔직하게 한 두 명은 지금 눈앞에서 마른세수를 하는 오호대주와 겨뤄봄 직했다.
“네.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설화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지켜보던 오호대주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 간의 사정은 모르겠으나 그 여협들은 대단했네.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과감하게 전장으로 뛰어드는 용맹함과 그 실력은 어지간한 무인들보다 뛰어났네.”
방덕이 말을 더했다.
“몇 명은 얼굴이 낯이 익더군. 산서의 색마들을 처단하던 협객으로 기억하는데?”
“맞아요. 동생들을 말하나 보네요.”
설화는 흡족한 웃음을 보였다.
천애랑은 물끄러미 설화를 보았다.
‘고생이 많았겠군.’
고마웠다.
뭐가 됐든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한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일행들이 대화를 나누는 방문이 열리며 팽가 무인이 다급히 뛰어왔다.
수하의 심각한 모습에 오호대주의 표정이 절로 굳었다.
급보를 가져온 팽가 무인은 쓰러진 벽력대주를 보고는 움찔했다.
사람이 쓰러져 기절해 있는데도 너무나 차분한 장내 분위기가 묘한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하라.”
하지만 수하는 재촉하는 오호대주의 말에 다급히 보고를 했다.
“동창에서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