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46화
“천 가주!”
설화가 반갑게 다가왔다.
‘북해빙궁에 있을 그녀가 왜?’
천애랑은 의아했다.
북해빙궁은 대외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거의라고 한 이유는 간혹 실전과 세상경험을 위한 강호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북해빙궁에 있어야 할 설화를 중원에서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더욱 의아함이 드는 것은.
‘재건에 바쁘지 않나.’
흑풍대와의 전투로 외성이 초토화된 북해빙궁이다.
추운지역에서의 공사는 일반적인 공사기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기에 지금도 북해빙궁은 재건에 힘을 쓰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빙궁의 공주가 중원에 행차한 것이다.
“혹시 빙궁에 무슨 일이 있소?”
천애랑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에요? 그리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없나요?”
설화의 섭섭한 목소리에 천애랑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오.”
생각지 못한 상황이라 놀랐을 뿐, 오랜만의 만남이 반가웠다.
설화도 마주 미소 지었다.
“저도요. 어휴! 드디어 만나네.”
천애랑의 고개가 갸웃했다.
‘드디어?’
새로운 의문을 가질 때 설화의 곁에 있던 여인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이분들은?”
천애랑의 의문에 대한 답은 설화에게서 나올 틈이 없었다.
설화의 곁에 있던 여인들이 반색하며 저마다 입을 열었다.
“언니! 이분이 귀가 닳도록 말씀하시던 서방님이세요?!”
“언니가 말한 것보다 잘생겼네요!”
“설화가 자랑할 만하네!”
“그대가 우리 설화의 청혼을 찼나!”
“설화 언니가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그런데 옆에 있는 여인 분과는 무슨 관계인가요?”
“설마?!”
“경쟁잔가!”
장대비 내리듯 쏟아붓는 여인들의 말에 천애랑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레 스무 명 여인들의 강렬한 시선을 받은 황보수란도 할 말을 잊은 채 식은땀을 흘렸다.
방덕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 광경들을 지켜봤다.
“흐음.”
천애랑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설화를 봤다.
구원의 눈빛을 받은 설화가 피식 웃으며 일행들을 다독였다. 그러곤 손짓을 했다.
“들어가서 차분히 이야기하죠.”
***
어떠한 세력을 존중하는 의미로 취하는 행동들이 몇 가지 있다.
대표적으로는 황제가 거주하는 황궁 안에선 말을 타고 달리면 안 된다는 것과 무당의 해검지 같은 게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북팽가의 경우엔 말을 타고 가문의 문지방을 넘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다.
이에 천애랑과 일행들은 말에서 내린 후 하북팽가에 들어섰다.
천애랑과 일행들은 하북팽가의 참혹한 모습에 입을 꾹 닫았다.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북경.
그곳에서 오랜 역사를 함께한 하북팽가다.
그러한 팽가의 역사를 함께한 고(古)전각들과 정원들이 초토화된 장면은 절로 침묵하게 만들었다.
천애랑은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좁혔다.
격전의 흔적들 곳곳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이 있었다.
정확히는 강렬한 내기의 잔향이었다.
‘엄청난 빙공. 그리고 마기와 요기?’
가장 강렬한 충돌을 만든 세 가지의 기운들이었다.
‘빙공이야 설 소저일 테고. 마기야 당연히 드라쿠나 마인들일 테지만. 요기는.’
천애랑은 인상을 썼다.
음습하면서 사람의 이지를 간지럽히는 요기의 기운을 잊을 수 없었다.
‘음살단이라 했던가.’
과거 담가 남매와 함께 겪었던 혈교의 무력단체.
‘하지만 혈교는 멸문했다고 들었는데?’
천애랑은 방덕에게 말했다.
“마기뿐만 아니라 요기 또한 느껴지오.”
이에 연신 코를 킁킁거리던 방덕이 놀란 눈을 했다.
“자네도 요기를 느꼈나?”
“혹시 마교에서 요기를 다루는 단체가 있소? 드라쿠가 채혈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강한 요기를 뿜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방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네. 이 요기는 드라쿠가 아닌 것 같아.”
그때였다.
소란과 함께 팽가의 정문으로 수십 기의 말들이 거칠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팽가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팽가의 법도를 잘 알고 있을 그들은 달리던 말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친 욕설들을 뱉어내며 사람들을 들이받을 듯 말을 몰았다.
“비켜라!”
“죽기 싫으면 모두 꺼져!”
“나와라!”
팽가를 돕고자 움직이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동선 앞엔 미처 피하지 못한 민간인들이 있었다.
“이런!”
천애랑과 설화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신형을 날렸다.
그 뒤로 곧장 방덕과 황보수란, 빙백신대의 여인들이 뒤따르며 사람들을 보호했다.
사람들을 몸으로 막아냄과 동시에 필요에 따라서 말들을 밀쳐냈다.
히이이잉!
말들이 균형을 잃고 서로 부딪히며 난리가 벌어졌다.
그 위에 탄 무인들 중 몇은 낙마를 했고, 몇몇은 뛰어올라 무사히 착지했다.
잠시의 혼란 후.
말에서 떨어져 내린 이들이 앞길을 막은 천애랑과 일행들에게 도를 들이밀었다.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있고, 가장 값비싼 비단옷을 입은 이가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감히! 대 하북팽가의 행차를 방해해?! 네놈들을 모두 처단해도!”
빠악!
살기등등하게 명을 내리던 이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소가주의 뒤에서 나타난 천애랑이 모두의 시선을 태연하게 받았다.
“소가주께서 기습을 당하셨다!”
“모두 흉수를 잡아라!”
사람들을 위협하던 무인들의 도가 일제히 천애랑에게로 향했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천애랑은 태연하게 방덕을 보았다.
“이들을 죽여도 당신이 수습할 수 있을 거라 믿겠소.”
“아, 아니!”
방덕이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러곤 천애랑을 위협하는 팽가 무인들을 냅다 날려버렸다.
개방의 장법과 각법을 아끼지 않고 팽가 무인들을 공격했다.
“크악!”
“뭐, 뭐냐!”
“거지새끼가!”
방덕에게 당한 팽가 무인들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들을 보며 방덕이 억울하게 외쳤다.
“내가 네놈들을 살리는 거다! 씨부럴!”
방덕의 손발이 바빠졌다.
“네 이놈!”
팽가 무인들 사이에서 거대한 덩치의 중년인이 강맹한 기세를 풀풀 풍기며 방덕을 공격했다.
시선을 돌리던 방덕이 다급하게 외쳤다.
“벽력대주 정신을 차리시게!”
“소방주…?”
방덕에게 치켜 쏘아지던 도가 멈추었다.
팽가의 여러 무력대 중 하나이자 소가주를 따르던 벽력대주가 놀란 눈을 했다.
“개방이 왜 팽가를 공격하는 거요! 심지어 소가주까지!”
“소가주는 내가 공격하지 않았….”
말을 하던 방덕은 천애랑을 힐끔 쳐다봤다.
어느새 사람들과 함께 전투의 중심에서 벗어난 천애랑이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
방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오해가 좀 있는 듯하네.”
“오해? 우리를 공격하고 오해? 소방주께선 내 눈을 옹이구멍으로 보는 게요?”
벽력대주의 날 선 말에 방덕은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짜증나는데 다 때려버리고 수습할까.’
평소라면 개방의 중책으로서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천 가주에게 물들었나.’
방덕은 머리를 흔들며 포권을 취했다.
“상황이 다급해 내 공격을 했네. 이에 사과하겠네.”
방덕의 사과에 빤한 시선을 보내던 벽력대주가 작게 혀를 찼다.
“추후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물을 것이외다.”
벽력대주가 탐탁지 않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장원 안쪽에서 팽가의 무인들이 뛰어왔기 때문이다. 그 선두엔 오호대주가 있었다.
“벽력대주! 그리고…… 소가주?!”
바닥에 코를 처박고 쓰러져 있는 소가주를 알아본 오호대주가 급히 명을 내렸다.
“이놈들 뭣들 하느냐! 소가주님을 뫼셔라!”
“존명!”
분주하게 움직이는 팽가 무인들의 중심.
그곳에서 방덕이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차 한 잔만 주시게.”
***
팽가주의 죽음 소식에 눈이 돌아버린 소가주의 질주와 그 과정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들.
모든 설명을 들은 오호대주가 적절히 중재했고, 그 결과 일행들은 제대로 된 대화의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오호대주와 벽력대주, 천애랑과 방덕, 그리고 설화와 황보수란이 함께 자리했다.
오호대주와 방덕 간의 대화가 주를 이루며 빠르게 정보들이 공유됐다.
팽가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듣게 된 벽력대주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대 하북팽가가 외인에 의해 구함 받았다는 사실과 그 은인들이 여인이라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화 내내 언짢은 얼굴로 설화를 쳐다봤다.
벽력대주가 끝내 입을 열었다.
“북해빙궁의 공주께서 우리 팽가를 구했다…… 이 말인가?”
마치 믿기 싫다는 느낌의 질문이었다.
이에 오호대주가 확인해주듯 대답을 했다.
“그렇네. 덕분에 우리는 모든 걸 잃지 않을 수 있었지.”
“모든 거라니. 고작 장원들이 무너지고 무인들이 죽었다고 팽가가 모든 걸 잃는 건 아니네.”
“가주님이 돌아가셨네. 그것만으로도 팽가는 많은 것을 잃었어. 그 상황에서 팽가의 터전마저 철저하게 유린당했다면, 제아무리 여러 안배들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상관없네. 팽가는 반드시 복수를 이룰 것이니. 그러면 그 누가 우릴 욕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외부의 도움으로 이룬 영광은 필요 없네.”
한 번 터진 감정의 말문은 날카롭게 표출됐다.
오호대주가 거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설마 살아남은 오호대를 욕하는 건가.”
외부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오호대를 무시하냐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벽력대주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부정하진 않겠네. 솔직한 말로 그냥 죽었어야지. 팽가의 영광을 외치면서! 그렇지 않다면 저런 어린 계집의 도움을 받을 만큼 팽가는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어야지!”
“자네……!”
신랄한 벽력대주의 말에 오호대주가 범과 같은 화를 내려했다.
저 말엔 오호대주 자신에 대한 비방뿐만 아니라 북해빙궁에 대한 조롱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살벌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의 중심엔 천애랑이 있었다.
“설마. 팽가를 조롱하는가?”
벽력대주가 기세를 끌어 올리자 천애랑이 미소를 지었다.
“조롱받을 수준도 안 되는 거 같은데 너무 열을 내시는군.”
“천 가주.”
옆에 있던 방덕이 조용히 천애랑을 말렸다.
방덕 자신 또한 기분 같아선 벽력대주에게 쓴소리를 뱉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개인 간의 감정이 아닌 문파 간의 자존심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기에 참을 뿐이었다.
벽력대주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기공가주라고 했던가? 그런데 멸문해서 가솔 하나 없는 가주도 가주라고 취급해줘야 하나? 이 자리에 낄 자격이 없는 이를 축객하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조용히 있게. 지금 자리는 애송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니.”
방덕이 입을 떡 벌렸다.
천애랑에게 이런 독설을 뱉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멸문한 가문을 언급하다니!
아니, 어느 누가 천애랑의 무위와 업적을 보고서도 저런 개소리를 뱉는단 말인가.
백날 배분 따지고 나이 따져봐야 지금은 전란의 시대다.
힘이 곧 나이고 권력인 시대란 말이다.
지금도 봐라.
가주가 죽으니 장자 승계의 원칙에 따라 권력이 곧장 소가주로 옮겨갔다.
그렇기에 소가주를 따르는 벽력대주가 그간 가주를 따랐던 오호대주에게 폭언을 날리고 있는 거다.
단순하게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엔 향후 개편될 팽가 권력구도의 서열 잡기가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 서열정리 속엔 배분과 나이 따윈 무시되고 있었다.
실제로 벽력대주보다 오호대주의 나이가 더 많고, 팽가에 봉사한 기간도 훨씬 길다.
‘벽력대주는 어쩌려고 저러냐. 목숨이 여러 개인가. 기를 세우더라도 적당히 세워야 장단을 맞춰주지.’
방덕이 슬그머니 기를 끌어올렸다.
어느 순간,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동시에 방덕은 황보수란에게도 전음을 날렸다.
[소저. 방비를 하시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선 냅다 해적선을 부수던 천애랑이다.
이를 경험한 황보수란이기에 그녀도 조용히 기를 끌어올렸다.
일행들이 잔뜩 경계상태에 돌입할 때 우려하던 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천애랑이 아니었다.
“이런 개새끼가! 나를 욕하는 건 참아도 내 서방 욕하는 건 못 참지!”
북해빙궁의 하나뿐인 공주이자 화경의 고수.
그런 그녀가 전력을 다해 검집째로 휘둘렀다.
빠아아악!
설화에게 맞은 벽력대주가 의자에 앉은 채 벽을 뚫고 밖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