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45화
“흐라앗차!”
북해빙궁의 공주 설화가 크게 기합성을 뱉었다.
그녀의 검이 지나는 곳마다 한기가 휘몰아쳤다.
이 때문에 마인들과 음살단이 난색을 표했다.
“저년부터 잡아!”
요향이 한껏 인상을 쓰며 명하자 음살단의 공격이 설화에게 집중했다.
“이리와요!”
“끼이히히히히!”
“우우우우우우.”
달뜬 신음들과 귀곡성과 같은 요상한 소리가 설화를 압박했다.
천요팔방진(天擾八方陣).
강력한 미혹술의 힘을 가진 음살단의 특수한 합격진이다.
일반적으로 남녀를 가리지 않지만 대개는 남성들에게 큰 힘을 발휘했다.
“위험…!”
느슨해진 방어망에 수하들을 살피던 오호대주가 놀란 눈을 했다.
남성들이 주를 이루는 팽가의 무인들이 저 천요팔방진에 의해 큰 낭패를 겪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에 오호대주가 입을 떡 벌렸다.
설화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 이상한 것들은?!”
전신은 끈적하게 감싸는 기분에 설화가 한껏 기운을 끌어올렸다.
한기가 냉기가 되고 눈이 부실 정도의 검강이 그녀에게서 휘둘러졌다.
“이거나 먹어라!”
아름다운 검신이 지나는 자리.
쩌저저저적!
그보다 더 아름다운 얼음기둥들이 생기며 주위를 얼려버렸다.
순식간에 팽가에 겨울이 찾아온 듯했다.
“꺄아아!”
“추, 추워!”
“몸이 굳는다!”
음살단의 여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천요팔방진이 와해됐다.
요향이 입술을 짓씹곤 옆에 있던 마인에게 말했다.
“저 계집의 성질은 극한의 음기. 마인들에게 잠폭단을 먹여 공격시켜라.”
요향의 말을 들은 마인이 불편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살단이 드라쿠의 휘하에 무력흡수 되면서 자연스레 그 위치는 마교 아래가 되었다.
그래서 보통의 명령은 드라쿠와 그 수하들로부터 음살단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교는 강자존의 세계.
드라쿠 다음으로 강한 요향이기에 예외적으로 요향이 마인들에게 명을 내리곤 했다.
물론 드라쿠의 수하들이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드라쿠의 명에 따라 반드시 이곳을 멸해야하는 입장에선 요향의 지금 명령은 일리가 있었다.
“모두 잠폭단을 먹어라! 빠르게 장로님의 명을 수행하고 물러날 것이다!”
“존명!
수십의 마인들이 빠르게 무언가를 입에 넣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전장의 기세가 달궈졌다.
“모두 내 중심으로 모여!”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던 설화는 다급히 외쳤다.
“네 언니!”
“모두 뭣들 해! 설화에게 뭉쳐!”
설화와 함께 온 여인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팽가의 정문을 등에 두고 설화가 마인들을 마주하는 형세가 이루어졌다.
‘기세가 달라졌다.’
마인들에게서 느껴지던 기세가 거의 두 배나 커진 느낌이었다.
설화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대로 돌파해 팽가 무인들과 합류할 거야! 그러니 무조건 나에게서 떨어지지 마!”
“알겠어요!”
“알겠어!”
준비가 끝난 설화가 강하게 검을 내질렀다.
쩌저저저적!
그녀의 절기 빙백신검이 수십 마인들 사이를 갈랐다.
“지금!”
설화를 중심으로 한 여인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휘두르며 마인들의 벽을 뚫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마인들의 총공세에 고립되기 시작했다.
설화를 따르는 여인들의 수준이 낮은 게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잠폭단을 먹은 마인들이 기량 이상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수가 원체 많아 애를 먹는 것이었다.
게다가 잠폭단을 먹은 마인들은 고통에도 더욱 둔해져, 목이 잘리지 않은 이상 악착같이 달려드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음살단의 요기까지 더해지니 설화와 일행들의 돌파가 막혀버린 것이다.
설화가 눈을 좁혔다.
‘후우. 빙궁에서의 전투가 생각나네.’
흑풍대가 개떼같이 몰려들던 수년 전.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치러진 험난한 전투.
‘천 가주가 생각나는구만.’
설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녀는 마음을 다잡은 듯 외쳤다.
“잠시 시간을 마련해 줘!”
“얼마나?”
“잠깐이면 돼!”
순식간에 여인들이 설화를 보호하듯 방진을 짰다.
“크윽!”
“언니들 잘 좀 막아봐!”
“이놈들 왜 이렇게 힘이 좋아!”
“언니! 좌측 좀 잘 막아요!”
“우측! 우측 도움!”
대자연의 기운을 흡기하고 가공해 만드는 내공.
이러한 내공을 사용하는 것엔 꽤나 까다로운 작업들이 필요하다.
단전에 쌓인 내공을 자극시켜 꺼내는 작업부터, 이러한 내공을 혈도로 인도해 원하는 쓰임을 하기까지.
경지가 낮을수록 이러한 과정은 어렵기에 더디고, 경지가 높아질수록 쉬워지고 빨라진다.
화경처럼 천외의 경지가 되면 내공의 한계가 하늘에 닿아서 의지가 곧 결과로 이루어진다.
지금의 설화처럼 내공을 준비하느라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이 정도로 준비시간이 필요한 무공이라면.
“모두 내 밑으로 뭉쳐.”
새하얀 두 눈을 뜬 설화가 높게 뛰어올랐다.
빙백신궁(氷白神弓).
최소 일 갑자의 내공을 소모해야 하는 북해빙궁 극강의 무공.
극음의 얼음화살 수백이 설화의 주위에 형성됐다.
“하아아아압!”
그러곤 설화의 기합과 함께 얼음화살들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뭐, 뭐! 피해라!”
기함할 공격을 본 요향이 다급하게 외쳤다.
빠바바바박!
요향은 자신에게 쏘아지는 수십의 얼음화살을 간신히 쳐냈다.
하지만 막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요기로도 극복할 수 없는 극음의 기운이 내부를 진탕시켰다.
“크으윽.”
요향은 고통 속에서 전장을 살폈다.
초절정의 경지인 자신조차 치명상을 입을 정도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콰과과과과과광!
“꺄아아악!”
“사, 살려… 꺅!”
비교적 경지가 낮은 음살단원들은 얼음화살을 제대로 막지도 못한 채 전멸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잠폭단을 먹어 강해진 마인들조차 속수무책 얼음화살에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전장이 초토화됐다.
백오십여 명의 마교 인원 중 멀쩡히 서있는 자는 불과 30여 명에 불과했다.
모든 얼음화살을 날린 설화가 땅으로 내려섰다.
일시적으로 대부분의 내공을 소모한 설화가 휘청거렸다.
“언니!”
“설화야!”
설화를 따르던 여인들이 창백한 그녀를 부축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설화는 부축을 밀치고 굳게 섰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그녀는 두려움에 떠는 요향과 남은 마인들, 놀란 눈을 한 팽가의 무인들을 보았다.
“팽가! 아직 힘이 있나!”
설화의 외침에 오호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팽가의 의지를 보여라!”
이에 오호대주와 십여 명의 팽가 무인들이 의지를 다졌다.
엄청난 무위를 보인 그녀에게 큰 자극을 받은 그들이다.
“가자! 우리는 팽가다!”
“우리는 팽가다!”
와아아아아!
팽가 무인들이 사자후와 같은 기합성을 터트리며 돌진했다.
이에 설화와 일행들도 전쟁의 끝을 향해 내달렸다.
***
천애랑과 황보수란, 그리고 방덕은 말을 타고 달리는 중이었다.
하북팽가와 드라쿠의 소식을 들은 직후의 행동이었다.
“팽가가 버틸 것 같소?”
“나도 모르네. 그래도 가봐야지. 그렇지 않나.”
“그건 그렇소.”
천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와 협에 입각해 팽가에 도움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천애랑에게 있어 지금 행선지는 의협의 기준보단 복수에 가까웠다.
‘드라쿠.’
지독한 악연을 이번에야말로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만약 전투가 벌어지거든 황보 소저는 몸을 피해 있으시오.”
“그래. 괴물들의 싸움이 벌어질 거야.”
천애랑과 방덕의 우려에 황보수란이 수긍을 했다.
“네. 그럴게요.”
‘무인이란 상대보다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녀의 할머니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경거망동할 생각은 없었다.
특히 그녀가 보기에 천애랑은 천외의 인물이었다.
엄청난 신위는 물론이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남자였다.
그런 인물이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찾아가는 적이라니.
황보수란이 침을 꼴깍 삼켰다.
며칠을 쉬지 않고 내달린 천애랑과 일행들은 동이 트는 북경에 들어설 수 있었다.
“원래라면 검문이 삼엄할 텐데.”
북경의 성문을 들어서며 방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문지기들을 매수하려고 은전을 준비하던 방덕이 멋쩍게 다시 돈을 챙겨 넣었다.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았는데, 묘하게 들뜬 느낌도 나는 것 같소.”
도시의 상황을 살피던 천애랑의 감상이었다.
“정말 그런 것도 같네요.”
황보수란도 공감을 하며 사람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하북팽가라면 북경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가문.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팽가가 마교에게 공격을 받았고 큰 타격을 입었다면 사람들의 분위기도 어두울 가능성이 높았다.
방덕이 말에서 내려 어딘가로 걸어갔다.
“이보게!”
그는 객잔 앞을 쓸고 있는 하인을 불렀다.
“뭐유.”
거지 복색의 방덕을 보곤 하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크흠. 혹시 팽가의 소식을 아나?”
하인이 방덕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그러곤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퉤!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 웬 거지새끼가….”
신경질을 내던 하인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방덕이 허리춤을 들춰 8개의 매듭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만 더 하면 여기 객잔을 거지들로 진을 쳐주겠네.”
하인의 눈동자가 엄청나게 커졌다.
이곳 객잔에서 20년 동안 일을 하면서 숱한 개방도들을 보았지만 8개의 매듭은 처음이었다.
하인이 사지를 벌벌 떨면서 바닥에 부복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그제야 방덕이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됐고. 팽가의 소식 좀 알고 싶은데.”
언제 퉁명했냐는 듯 하인의 입이 친절하게 움직였다.
천천히 방덕의 곁으로 다가온 천애랑과 황보수란도 귀를 기울였다.
“며칠 전 어명을 받은 관군들이 반역자를 색출한다며 순찰을 돌았습니다.”
이 때문에 북경의 모든 이들이 행동을 극히 조심할 때.
마교가 팽가를 기습했고, 그 결과 팽가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팽가의 터전이 철저하게 유린당하기 전, 여협객들이 나타나 팽가를 구원했다는 내용이었다.
“팽가주가 죽어?”
방덕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혈질에 안하무인의 성격을 가진 팽가주지만 무공실력만큼은 그 누구도 무시 못 하는 인물이었다.
“드라쿠는 이미 없나 보군.”
천애랑이 아쉬운 표정을 했다.
“그런데 여협객들이라니 누구일까요?”
황보수란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이는 하인도 모르는 정보이기에 여기선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가 보면 알겠지.”
천애랑이 길을 재촉하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친절히 말해줘서 고맙네.”
방덕이 대충 감사를 표하곤 서둘러 천애랑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반 시진 후.
일행들은 팽가의 장원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이곳은 북경성 외곽보다 확실하게 팽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팽가를 들락이고 있었다.
잠시 주변을 돌며 정보를 모아온 방덕이 말했다.
“황실의 눈치를 보던 이들이 이제야 움직이나 보더군.”
그는 말을 이었다.
“무림맹에 지원을 갔던 팽가의 소가주와 무인들이 긴급히 돌아오고 있다 하네.”
“흐음.”
천애랑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방덕이 천애랑에게 물었다.
“혹시 자네도 팽가의 공백에 따른 마교와의 전선을 걱정하는가?”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공교롭다 보니.”
“하긴. 하지만 아직 제대로 파악된 건 없으니 지켜보세.”
그때 팽가의 정문으로부터 사람들이 갈라지더니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와아아! 빙백신녀다!”
“저들이 빙백신녀를 따르는 빙백신대인가?!”
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진동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질서를 잃지 않고, 하북팽가를 구해준 그녀들을 향해 존경을 표했다.
방덕과 황보수란은 사람들의 환호에 놀라면서, 소문의 여협객들을 보게 됨에 눈을 빛냈다.
그러나 천애랑은 당혹스런 눈을 했다.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
북해인들 특유의 아름다운 외모와 북해의 얼음처럼 빛나는 하얀 털 옷.
북해빙궁주의 금지옥엽 딸이자 자신에게 청혼까지 했었던.
“설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설화를 보며 읊조린 천애랑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