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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141화 (141/200)

기공술사 141화

“역시 출항을 했나 보군요.”

다시 내려온 천애랑을 보자마자 황보수란이 한 말이었다.

그녀는 배가 크게 흔들릴 때부터 짐작했는지 침착한 태도를 보였다.

“아직까진 배가 해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소. 탈출하려 한다면 지금 당장 나가야 하오.”

황보수란은 유심히 천애랑을 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공자께서는 원하시는 바가 있나 보군요.”

‘공자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마교와 원수지간이오. 그런데 이놈의 입에서 이와 관련된 정보를 들었단 말이지.”

“그래서 이들을 따라 움직여볼 생각인 건가요.”

황보수란이 천애랑의 말을 이어받았다.

천애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럼 뜻대로 하세요.”

“……?”

천애랑의 의아한 시선에 황보수란이 말했다.

“저를 구해달란 부탁을 받고 오셨다 했습니까?”

“그렇소만.”

“그럼 그 뜻을 이루었으니 공자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구한다는 의미엔 그대를 가문으로까지 데리고 가는 게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오만?”

“괜찮습니다. 저의 사사로움 때문에 공자님의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요.”

황보수란이 당찬 미소를 지었다.

“…….”

천애랑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똑똑하고 강단 있는 여인이로군.’

호부견자 없다더니 그녀에게서 황보문정의 모습이 보였다.

수적 열세에도 불퇴의 기세를 보이던 황보세가 일원들의 모습도 보이는 듯했다.

“알겠소.”

천애랑은 말을 아꼈다. 더 물어본다고 한들 그녀의 의견이 바뀔 것 같진 않았다.

“위에서 듣자하니 해적들이 이곳으로 쉽게 오진 않을 것 같소.”

“짐작이 가는군요.”

떨어진 단검을 챙기던 황보수란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단검을 든 채 해적두목을 빤히 쳐다봤다.

“죽이고 싶어도 잠시만 참으시오. 알아내고픈 정보들이 좀 있으니.”

“물론입니다.”

“그리고 고문 과정이 다소 잔인할 수 있소. 물러나 있으시오.”

“괜찮습니다. 저도 명색이 무가의 여식입니다. 걱정 말고 편하게 하시지요.”

그녀는 납검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군.’

괜한 착각을 했다는 생각을 하며 천애랑은 가슴팍에 몸을 숨긴 백호를 불렀다.

“호야 나와 있어라.”

그제야 고양이처럼 변해있던 백호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이런 와중에도 잘 자고 있었던지 백호의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어머?”

생각지도 못했던 동물이 천애랑의 품에서 나오자 황보수란이 놀란 눈을 했다.

백호는 훌쩍 바닥으로 뛰어내리더니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곤 힐끔 황보수란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혹시 만져 봐도?”

천애랑이 어깨를 으쓱이며 허락하자 황보수란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그녀는 곧장 고양이처럼 자세를 낮추고 이마를 백호에게 대었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하던 백호가 그녀의 이마에 마주 이마를 대었다.

“흡!”

이에 황보수란이 소리를 죽이며 즐거워했다.

천애랑은 묘한 두 사람의 모습을 일별하곤 해적두목의 혈을 눌렀다.

그러자 이내 해적두목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잘 잤나? 지금부터 묻는 거에 잘 대답해주면 좋겠어.”

그런 해적두목을 보며 천애랑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

약 반 시진이 지난 후.

천애랑은 피가 묻은 손을 닦으며 일어났다.

‘양동작전이라고?’

마교가 어딘가를 공격하기에 앞서, 크게 방해가 될 천진 개방을 이들 해적이 붙잡는 식이었다.

문제는 마교가 어디를 공격하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천진까지라면 빠르면 2주가 걸리겠네요.”

긴 고문을 지켜봤던 황보수란의 말이었다.

그녀는 백호를 품에 안고 성심껏 긁어주고 있었다.

이에 백호는 좋다고 고로롱거리고 있었다.

“배에 대해 좀 아시오?”

“잘은 몰라요. 다만 잘 알고 지내던 무역상들과의 대화가 떠올라서요. 그들이 간혹 하북성으로 갈 때면 물길을 따라가곤 했거든요.”

천애랑은 미간을 좁혔다.

“최소 2주 이상은 꼼짝없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 꼴이 됐소.”

그는 지금 계획이 무산되더라도 황보수란을 탈출시켰어야 했나 싶었다.

단순히 이곳에서 2주가 넘는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둘 다 무인이었으니.

다만, 다소 섬세한 문제들이 있었다.

“여기서 지내는 거 괜찮겠소?”

배는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갑판에서 아래로 향할수록 물살의 저항을 고려해 그 폭이 좁아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배의 가장 아래 공간인 여기는 꽤나 좁은 편이었다.

괜찮다면 괜찮고, 불편하다면 불편한 상황.

특히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데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무림인들은 섭식을 최소화하고 신체를 제어하면 몇 주 동안은 생리현상을 참을 수도 있긴 했다.

살막의 살수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살수도 아니고 경지가 대단한 무인도 아니었다.

때문에 시종일관 당차던 그녀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녀가 살포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녀의 볼이 살짝 붉어지는 것은 착각일까.

이어서 두 번째 문제가 있었다.

다만, 이것은 천애랑 자신이 해결할 수 있었다.

“식량은 내가 몰래 가져오겠소.”

“알겠습니다.”

황보수란은 쉽게 수긍했다.

천애랑이 처음 등장했을 때 보여준 은신술이 지금도 충격적이었다.

인근 문파들과 본가의 무인들을 모두 떠올려 봐도 이런 은신술의 경지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천애랑은 마지막 문제를 언급했다.

“여기 쓰러져 죽은 놈이 알다시피 두목이오. 지금이야 부하들의 출입을 막았다지만 그것도 잠시의 유흥을 위했던 것. 아마 시간이 지나면 부하들이 찾아올 것이오.”

그러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시신을 잘 숨긴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실종이었다.

망망대해 배 위에서 뻔히 있던 두목이 사라졌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해적들은 원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상황은 곧장 찾아왔다.

끼이익.

이곳으로 내려오는 계단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두목!”

두목을 찾는 해적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천애랑은 앞서 고민하던 계획이 모두 무산되었다 느꼈다.

그래서 그는 황보수란을 끌어와 안았다. 그러곤 곧장 환영유령보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천애랑과 황보수란의 신형이 어둠에 녹아들었다.

[저자가 다가오면 죽이고 움직이겠소. 계획이 틀어졌으니 어떻게든 배라도 장악하든가 해야겠소.]

전음을 들은 황보수란이 놀란 눈을 했다.

그녀는 천애랑의 품에서 그를 올려다봤다.

‘참 잘생겼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었지만 아니 할 수 없는 감상이기도 했다.

“두목?”

“두목!”

해적들의 목소리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천애랑은 살며시 천선을 들어올렸다.

그때 황보수란이 천애랑의 가슴팍을 톡톡 쳤다.

해적들과의 거리와 장애물들에 의한 경우의 수를 따지던 천애랑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천애랑과 눈을 마주한 황보수란이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크게 외쳤다.

“이 새끼들이! 누가 함부로 내려오래!”

천애랑이 깜짝 놀란 눈을 했다.

이는 다가오는 해적들도 마찬가지였다.

황보수란에게서 영락없는 해적두목의 목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해적들이 목을 잔뜩 움츠리곤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두, 두목. 꽤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런 말이 없어서…….”

“멀리서 쾌속선이 쫓아오는데 침몰시킬까도 물어볼 생각이었습니다.”

해적들이 벌벌 떨었다.

평소 포악한 두목이다. 기분에 따라 예사 살인도 하는지라 잘못 걸렸다 싶었다.

‘아이 씨. 이럴 줄 알았다. 부두목 지가 내려올 것이지.’

‘허튼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해적들이 바짝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기다렸다.

그 사이 천애랑과 황보수란의 시선이 마주했다.

[살기(殺氣) 좀.]

천애랑이 그녀의 짧은 전음에 놀랄 새도 없었다.

황보수란이 크게 외쳤다.

“내가 네놈들 보모냐! 그딴 건 알아서 처리해! 그리고 지금부터 수련을 할 것이니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나를 찾지 말아라! 이를 어기는 놈은 즉시 처형이다!”

천애랑은 때에 맞춰 해적들에게 살기를 쏘아 보냈다.

“히이익!”

해적들이 창백해지는 얼굴로 뒷걸음질 칠 때 황보수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매일 시간 맞춰 따뜻하게 요리한 음식을 계단문 옆에 올려놓아라! 물론 아무도 얼씬거리지 말고! 알았냐 이 새끼들아!”

“예! 예!”

“알겠습니다!”

해적들이 식은땀까지 흘리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당장 꺼져!”

이때에 맞춰 천애랑이 다시 살기를 쏘아 보냈다.

쿠당! 쿠당탕!

그러자 해적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듯 물러났다.

끼익! 텅!

다급하게 계단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모든 것이 해결되자 천애랑은 환영유령보보를 해제했다.

천애랑과 황보수란이 시선을 마주했다.

“잘했죠?”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천애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그의 진심이었다.

물론 전투가 벌어진다고 치명적인 일이 벌어지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획이 다 어그러졌겠지.’

천애랑은 황보수란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 모습에 황보수란의 볼이 붉어졌다.

“크, 크흠. 이제 좀 놔주시겠어요?”

“아!”

천애랑은 그제야 둘이 숨소리가 들릴 만큼 딱 붙어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하오.”

“괜찮아요. 기분 나쁘진 않았어요. 그나저나.”

“……?”

“식량도 제가 해결했어요.”

황보수란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천애랑이 피식 웃었다. 꽤나 유쾌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한 거요?”

“어떤 거요?”

천애랑이 목을 가리켰다.

“아! 목소리요?”

황보수란은 피식 웃었다.

“우연한 기회에 배웠어요. 원리는 음공과 비슷한데. 목구멍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서 원하는 떨림의 배합을 이루면 돼요.”

“…….”

천애랑은 그저 두 눈만 끔뻑끔뻑했다.

“당연히 쉽지 않죠. 일반적인 무공을 익히듯이 연습해야 해요.”

“대단하오.”

황보수란이 의기양양 팔짱을 끼었다.

“후후후. 드디어 제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났군요. 할머니는 쓸데없는 짓이라며 핀잔만 주셨는데 말이죠. 후후후후.”

***

배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공자님. 이것도 좀 드셔보세요.”

“소저도 좀 드시오.”

지난 2주간 둘은 많이 가까워졌다.

별달리 할 것도 없는 터라 운기조식 등 개인적 시간을 제외하곤 대화를 많이 나눴다.

“제가 암시장에 대해서 얘기 했나요?”

“인피면구 같이 통념상 불길한 물건들이 거래되는 곳이라곤 들었소만.”

“맞아요. 물건들과 그 출처들이 음습하기 때문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외모와 신분을 가리죠.”

“허 참. 소저는 그런 곳을 잘도 아오.”

“헤헤. 제가 호기심이 좀 많아서요. 이것 때문에 할머니한테도 많이 혼났죠.”

황보수란이 멋쩍게 미소 지었다. 음식을 먹는 중인지라 그녀의 양 볼이 다람쥐마냥 볼록했다.

꿀꺽.

음식을 크게 삼켜 넘긴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최근 암시장에서 어떤 흐름이 있어요.”

“흐름?”

“암시장에서도 인기 품목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영약이에요.”

“흐음.”

천애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분히 납득이 됐다.

‘그럴 만도. 영약이라는 것의 희소성과 그 효과는 천금으로도 구하기 어렵기도 하니까.’

어찌 보면 천하에서 가장 많은 영약을 구하고 소모한 이가 천애랑 자신과 의각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암시장마다 영약거래의 시세가 이상해요.”

“시세 말이오?”

“예. 예를 들어 평소 금전 100냥이면 거래될 영약들이 적게는 5배, 많게는 10배의 금액으로 팔리고 있어요.”

“그건 그냥 그만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소.”

“뭐, 그럴 수도 있겠죠. 당장 제 가문만 해도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고 하면 금전 만 냥을 들여서라도 영약을 구하려 했을 거니까요.”

황보수란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최근 가본 5곳의 암시장 모두 영약의 시세가 10배까지 뛰는 모양새란 말이죠. 마치 누군가가 영약을 싹쓸이 하려는 듯이.”

“흐음.”

천애랑은 침음을 흘렸다.

때론 직감이라는 것이 유효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직감은 그 분야에 대해 빠삭한 이에게서 발생하는 특수한 감각이었다.

암시장을 자주 놀러 다닌 그녀 또한 아마 어떠한 직감을 느끼고 있는 걸 테다.

“뭐 물론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마친 그녀는 다른 음식을 입에 넣으며 열심히 씹었다.

‘하오문주는 아닐 텐데.’

소걸이를 치료하기 위해 영약을 수급할 땐 하오문주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때라면 아마 하오문주가 암시장을 이용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소걸이의 치료 이후로는 구할 수 있는 영약이 부족해서, 하오문주는 주로 운남의 영초들을 보내왔다.

그것을 의각원에선 적당한 영약으로 가공하고, 수량의 절반은 하오문주에게 다시 보내는 방식으로 거래를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와 하오문주처럼 영약을 크게 필요로 하는 건가?’

천애랑은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사 복잡한 사정들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궁!

거친 진동과 함께 위 칸에서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의 시끄러움과는 결이 다른 소란이었다.

이에 다람쥐처럼 음식을 씹던 황보수란이 동그란 눈을 했고, 천애랑 또한 번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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