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40화
거대한 배답게 갑판 아래에도 무언가가 많았다.
우선 거대한 선체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인지 노를 젓는 공간과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너른 방들이 시전의 가게처럼 줄을 지어 있었다.
식량과 무기, 각종 물건들의 창고도 상당히 많았다.
‘이 정도면 군함 아닌가.’
천애랑은 눈을 좁혔다.
일개 해적이 이 정도의 배를 소유할 수 있나 싶었다.
‘뭐가 됐든. 빨리 찾자.’
크게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원하는 바를 얻으면 곧장 몸을 뺄 생각이었다.
그러나 쉬이 찾아지지 않았다.
어지간한 공간과 물건들은 갑판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듯했는데, 아무리 꼼꼼하게 살펴봐도 황보세가의 여식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아래인가.’
남은 곳이라곤 더 아래의 공간밖에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내려가나 인데.’
계단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 눈에 보이진 않았다.
‘흐음.’
천애랑은 인적이 드문 그늘에 몸을 숨겼다. 그러곤 눈을 감고 기감에 집중했다.
바다 위의 해무가 넓게 퍼지듯 천애랑의 기가 배 안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수시로 오가는 사람들과 복잡한 지형지물들이라는 장애요소 때문에 감각에 혼선이 많았다.
하지만 이내.
‘찾았다!’
해적선원들이 쉬는 여러 방 중 가장 안쪽의 방, 그곳의 아래로 기가 흘러들어가는 걸 느꼈다.
곧장 그곳을 확인한 천애랑은 바닥에 은밀하게 숨겨진 계단문을 발견했다.
계단문에 연결된 얇은 줄을 당기니 원하던 계단이 드러났다.
‘시간이 지체됐어.’
천애랑은 지체 없이 계단문을 열고 아래로 내려갔다.
물속에 깊게 잠기는 부분이라서인지 바닷물의 울음소리에 소음이 가득했다.
어지간히 말해서는 외부로 소리도 안 들릴 것 같았다.
천애랑은 기감을 유지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이내 찾고자 하던 두 명의 인기척을 느꼈다.
“더 다가오면 죽일 거야!”
“크흐흐. 원래 사냥도 사나운 녀석을 잡는 게 제맛이고, 살인도 발버둥 치는 놈을 죽이는 게 제맛인 법이지.”
날 선 여인과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가 끝 쪽에서 들려왔다.
천애랑은 빠르게 접근을 했다.
그곳엔 거대한 덩치에 거의 옷을 벗다시피 한 사내가 있었다.
‘이 자가 해적 총두목이겠군.’
지나오며 마주한 해적들과는 수준을 달리하는 기세를 가진 자였다.
40대로 보이는 그의 얼굴과 온몸엔 숱한 전장을 치러온 듯 자상이 가득이었다.
거기에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무성한 수염이 더해지자 절로 그의 거친 인생이 엿보이는 듯했다.
그런 두목의 반대편엔 하늘 위의 구름처럼 뽀얀 피부의 여인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가느다란 선을 가진 여인은 비단으로 된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여인이 섬섬옥수의 손으로 단검을 치켜들고 사내를 경계하고 있었다.
‘찾았다.’
천애랑은 드디어 원하던 대상을 찾았음을 확신했다.
황보세가에서 봤던 중년여인과 똑 닮은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나, 황보수란은 대 황보세가의 여식이다! 네깟 놈에게 굴복할 듯싶더냐!”
여인의 당찬 말에 사내는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부터 자꾸 황보세가를 언급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겁이라도 낼 줄 알았나? 그렇다면 단단히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사내는 언제든지 황보수란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여유만만의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천하는 곧 마도천하가 될 것이야. 나는 그런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자다. 그러니 고작 황보세가 따위에 겁을 먹겠냐 이 말이야. 크크크크큭.”
“마교!”
황보수란이 놀란 눈을 했다.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반응에 사내는 음심이 도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 그래. 내가 무려 마교의 장로와 인맥이 있단 말이다. 그는 마교 내에서 한 손 안에 꼽히는 힘을 가진 자인데, 나에게 부와 권세를 약속했지.”
“…….”
입을 꾹 닫은 황보수란을 보며 사내는 더욱 흥을 냈다.
“그러니 내 수청을 들면 너도 천하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다. 그러면 지금의 황보세가 따위와 비교가 될 것 같아?”
“흥! 싸구려 욕심을 잘도 포장하는구나! 네놈은 마교에게 이용만 당하고 토사구팽 당할 것이다!”
황보수란이 날카롭게 사내를 쏘아붙였다.
이에 한참 흥을 내던 사내가 와락 인상을 썼다.
격장지계임을 알면서도 그 내용이 내심 자신도 고민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내게 부탁한 이가 무려 드라쿠 장로다. 황실을 꽉 잡고 계신 분이지. 그런 이가 약조를 한 것이니 반드시 이행될 것이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천애랑은 ‘드라쿠’라는 단어에 절로 신형이 움찔거렸다.
이에 환영유령보보가 살짝 흐트러졌다.
“누구냐!”
찰나의 기척을 느낀 사내가 도를 휘둘렀다.
강맹한 기세가 무엇이든 일도양단할 것 같았다.
탁.
하지만 도는 천애랑의 손에 붙잡혔다.
이미 들킨 마당인지라 천애랑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귀신처럼 사람이 나타나자 황보수란이 놀란 눈을 했다.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대충 휘둘렀다지만 내심 강기에 가까울 기를 실었다. 헌데!’
그런 자신의 도를 저런 식으로 막으려면 최소 초절정의 고수여야 했다.
그런데 눈앞의 인물은 잘 쳐줘봐야 이립도 안 되어 보였다.
‘설마 반로환동?’
사내의 눈동자가 고민으로 잘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환골탈태니 반로환동이니는 전설 속의 이야기다!’
사내는 천애랑의 손에서 도를 빼냈다. 그러곤 강맹한 내기와 함께 재차 휘둘렀다.
“륭수참도격!”
자신을 해적들의 수장이 되게 해준 무공이자 하북팽가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도격이었다.
바다 위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파도처럼 거대한 내기가 도를 따라 상대를 집어삼킬 것이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절대 피할 수 없다.’
이 공격의 단점이라고는 정직한 투로라는 것인데, 그렇기에 맞서지 않고 피한다면 파훼가 되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배 안.
쉽게 피할 수 없는 공간이었기에 사내는 공격의 성공을 확신했다.
그러한 기색을 읽은 황보수란이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조, 조심!”
자신이 끼어들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벌어지는 상황에 놀란 눈을 했다.
잘생긴 사내가 범상치 않은 쥘부채를 꺼내더니 거대한 도를 향해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무, 무슨!”
거대한 도와 작은 부채.
자살행위와도 같은 두 무기의 충돌은 의외로 조용했다.
천애랑은 상대방의 기운 속으로 밀어 넣은 천선을 비틀었다.
그러자 자신의 접근을 완강하게 거부하던 해적두목의 도가 흔들렸다.
“흐읍?!”
두목이 당혹스런 눈을 했다.
자신조차 고련을 통한 근육으로 버텨야 하는 기술이었다.
그런 자신의 공격을 고작 부채로 파훼한다는 게 납득이 안 됐다.
“말도 안 된다!”
두목은 흔들리는 도를 제어하며 재차 흐름을 만들었다.
검의 오의가 자유로운 변초에 있다고 하면 도의 오의는 흐름이다.
한 번 흐름을 탄 도는 몰아치는 태풍처럼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는 법이다.
두목의 도에 도강이 서렸다.
“안 돼!”
황보수란이 도강에 화들짝 놀라며 해적두목에게 단검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황보세가의 절기인 천왕보와 벽력신장을 펼쳤다.
그녀는 지금의 공격이 자신보다 격상의 무인인 해적두목에게 역부족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위기에 빠진 사내를 돕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까처럼 놀란 눈을 했다.
콰왕!
충격음과 함께 도가 날아가고, 해적두목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천애랑에 의해 해적두목의 모든 공격이 와해되고 역공까지 당한 것이었다.
“크아아아!”
이에 해적두목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악을 썼다.
빡!
하지만 이어진 천애랑의 일격에 해적두목의 턱이 크게 들리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쾅!
거대한 덩치가 쓰러지자 배가 출렁이는 듯했다.
천애랑은 해적두목에게 빠르게 다가가 아혈과 마혈을 집었다.
그러자 해적두목의 목소리와 움직임이 제압되었다.
“물어볼 게 있으니 바로 죽이진 않은 거다. 잘 협조하도록.”
천애랑의 말에 해적두목이 분에 찬 눈빛으로 진득한 살기를 보냈다.
그 모습에 천애랑이 해적두목의 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선 상대를 순순하게 만들 필요가 있기에 눈을 뽑아 버릴 생각이었다.
‘아!’
하지만 그는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여인을 떠올리곤 손을 멈췄다.
‘다소 잔인할 수도 있으니.’
여인을 보내고 고문을 해도 될 일이었다.
황보수란이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천애랑은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황보문정이라는 어르신의 부탁을 받고 왔소.”
황보수란이 크게 놀라했다.
“아! 혹시 가문엔 별 탈 없습니까?”
“피해가 없다곤 말하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위기를 벗어났소.”
피해가 있다는 말에 황보수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굳세지는 게 보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보수란이 천애랑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꽤나 강단이 있네.’
수모와 생사의 위기에서 벗어난 직후다.
스스로를 챙기기도 바쁠 상황에 가문과 다른 이들부터 챙긴다.
그리고 눈빛이 굳건한 걸 보니 여차하면 동귀어진도 감행할 여인으로 보였다.
황보세가가 용맹하고 호협한 것 같더니 그 성향은 유전인 것 같았다.
‘제법 마음에 드는 가문이네.’
천애랑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황보수란이 주춤거리며 한 보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궁!
배가 크게 흔들렸다.
‘설마?’
천애랑은 해적두목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비웃는 듯했다.
절로 손가락이 꿈틀거려졌다.
‘고문은 기선제압이 중요하다던데.’
고문의 달인인 사천당가의 당정아와 하오문의 모든 교육을 받은 송소걸의 공통된 조언이었다.
“쯧.”
혀를 찬 천애랑은 해적두목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후려쳤다.
빠아악!
두개골이 부서지지 않았을까 싶은 굉음과 함께 해적두목이 그대로 기절했다.
“원래 이렇게 기절시키나요……?”
황보수란이 놀란 눈으로 묻자 천애랑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눈빛이 재수 없어서.”
“예?”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오.”
상황을 확인 해봐야 했다.
대화를 중단시킨 천애랑은 곧장 왔던 계단을 통해 올라가 상황을 살폈다.
‘이런.’
좀 전까진 비어있던 공간엔 수십의 선원들이 자리해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다.
갑판 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움직임들이 분주했다.
“예상외로 적들이 많다! 즉시 물러난다!”
“두목은 어디 계십니까?”
“변수가 생기면 곧장 계획대로 움직이라 하셨다!”
“네?”
“중요한 볼일 중이니까 절대 찾지 말라 하셨다고 새꺄! 몇 번을 물어봐!”
“죄, 죄송합니다!”
“모두 물러난다! 서둘러라!”
뿌우우우! 뿌우우우!
각종 외침들과 신호를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요란이었다.
“…….”
출항이라는 갑작스런 상황에 천애랑은 고민을 했다.
탈출을 하려면 여기서 난리를 피워서라도 탈출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마교와 드라쿠.
두 단어를 들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천애랑은 즉시 황보수란과 해적두목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