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39화
“해적?”
부두로부터 들려오는 소란에 일행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확인해봐라!”
“존명!”
황보궁산의 명에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빠르게 흩어져 상황 파악을 했다.
“발걸음을 재촉합세.”
황보궁산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황보세가의 장원은 청도에서도 바다와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바다가 잘 보이는 명당에 위치했기에 해적들의 눈에도 잘 뜨일 가능성이 있었다.
태상가주의 누이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세가의 무인들이 상주한다지만 그래봐야 40명이 채 안 된다.
봉문 중임을 감안해 최소한만 허락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원의 대부분이 현재 황보궁산과 함께 있었다.
즉, 약탈을 원하는 입장에서 황보세가의 장원은 매우 먹음직한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천애랑이 말했다.
“우리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소. 악 대협. 뒤따라 올 수 있겠소?”
“물론이오.”
악장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애랑의 도움으로 혈색이 많이 돌아온 그였다.
천애랑은 이어서 황보궁산에게 말했다.
“우리 둘만이라도 먼저 가는 게 어떻소.”
“그래도 되겠나?”
손님을 안내하는 입장에서 먼저 자리를 비울 수 없던 황보궁산이었다.
태연한 척은 하고 있지만 내심 마음이 쫓기고 있었다.
“안 될 건 뭐가 있겠소.”
천애랑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황보궁산은 일행들의 분위기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답했다.
“알겠네. 그럼 먼저 앞장서겠네.”
황보궁산의 신형이 쏘아졌다. 엄청난 경신법이었다.
천애랑도 곧장 황보궁산에게 따라붙었다.
이에 황보궁산이 내심 놀란 눈으로 천애랑을 힐끗 쳐다봤다.
‘천왕태보를 거의 극성으로 펼치는 중인데.’
천애랑은 여력이 남아 보였다.
그의 시선에 천애랑이 말했다.
“더 서둘러도 되오.”
황보궁산은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무력당주인 자신의 내공과 경신술은 황보세가 내에서도 수위에 꼽힌다.
헌데 고작 후기지수 정도의 청년에게 못 당하니 기가 막혔다.
그렇다고 억울하거나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장강의 뒷 물결에 밀려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군. 그리고 태상가주께서 생전에 이 청년을 고금제일기재일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아.’
“허허허.”
황보궁산이 웃으면서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쳤고, 그 뒤를 천애랑이 어렵지 않게 따랐다.
***
엄청난 경신법에 두 사람은 반각도 되지 않아 황보세가의 장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죽여라!”
“모조리 죽이고 약탈해!”
“으악!”
“마님들을 지켜라!”
“놈들이 못 지나가게 막아!”
거대한 장원의 마당에서 요란한 복색의 해적들 수십과 그보다 적은 숫자의 시종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소수라도 남아있던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 많은 상흔을 입은 채 죽어있었다.
그나마 남은 시종들이 장원과 주인들을 지키기 위해 손에 익지도 않은 도검을 들고 해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시종들의 보호를 받는 전각 마루에는 중년 여인이 노파를 부축하고 있었다.
노파의 몸에선 피가 흥건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노파는 불같은 눈빛을 빛내며 해적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황보궁산이 놀란 눈을 했다.
“어르신!”
그의 놀람에 천애랑은 노파가 황보세가 태상가주의 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보궁산이 신형을 날려 노파의 상태를 살폈다.
범상치 않은 인물의 등장에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익! 뭣들 해! 죽여!”
이곳 해적들의 두목으로 보이는 이가 고래고래 소리치자 그 부하들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이에 이들을 막던 시종들이 바짝 긴장을 했다.
그때였다.
“그대로 있어라.”
수십의 해적들 사이로 차분하게 걸어간 천애랑의 말이었다.
“……?!”
해적들은 물론이거니와 시종들도 의아한 시선을 모았다.
“이 새끼들이! 자꾸 멈추는 놈들은 나한테 죽는… 컥!”
붉으락푸르락 거리던 해적두목의 머리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놀라하는 해적들을 보며 천애랑이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쉿! 떠들거나 움직이는 놈 있으면 죽는다.”
“무, 무슨!”
“놈은 하나다!”
서걱! 서걱!
말을 꺼내던 해적 두 놈의 목이 앞서 두목처럼 댕강 바닥에 떨어졌다.
천선이 호선을 그리며 천애랑의 손으로 돌아왔다.
천애랑은 명을 수행하고 온 천선을 접고는 툭툭 손바닥을 내리쳤다.
“귀찮으면 다 죽인다. 가만히 있도록.”
천애랑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뻗어가자 해적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생전 처음 겪는 무위에 그들은 그저 벌벌 떨며 눈동자만 굴렸다.
상황이 차분해지자 천애랑은 황보궁산을 바라봤다.
때마침 노파의 응급처치를 마친 황보궁산이 당혹스런 눈빛을 던져오고 있었다.
“아가씨가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하네.”
“혹시 위험한 상황이오?”
“긴급한 상황이지.”
천애랑은 미간이 좁히며 말했다.
“그럼 이 해적들은 어찌하오?”
가문의 장이 버젓이 있기에 선택권을 넘긴 것이었다.
그때 노파가 부축을 밀어내고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명했다.
“모두 포박하라!”
이에 시종들이 들고 있던 병장기들을 놓고 밧줄로 해적들을 포박했다.
해적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여전히 천애랑의 살기가 사라지지 않고 목줄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상황이 정리되자 노파는 천애랑에게 다가와 정중한 포권을 취했다.
“황보세가의 늙은이 황보문정이네. 도움을 주어 진심으로 고맙구만.”
부상이 심했는지 작은 움직임에도 피가 흘러내렸지만 노파의 표정은 굳건했다.
이에 천애랑은 마주 인사를 했다.
“기공가문의 가주 천애랑이오.”
“그래. 기공가문의 천 가주.”
노파가 이름을 기억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나.”
천애랑은 노파의 부탁이 무엇일지 짐작이 되었다.
노파의 곁에서 침착한 태도를 하고 있지만 걱정 가득한 눈빛과 떨리는 손을 꼭 쥔 중년여인의 모습.
그리고 황보궁산이 말했던 아가씨라는 단어가 조합이 되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아오?”
거두절미 묻는 천애랑을 보며 노파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와주시는 겐가.”
중년여인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낯 간지러운 상황은 항상 멋쩍은 천애랑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돕고 사는 것 아니겠소. 해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는 거요?”
“제가 알 것도 같습니다.”
시종 중에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소년이 빠르게 말했다.
“아가씨께선 며칠 전 다친 거북이를 주웠습니다. 그 뒤로 의원을 돌며 거북이를 치료했었죠. 그리고 오늘 아침에 바다에 거북이를 풀어주겠다며 좋아하시던 게 기억이 납니다.”
황보궁산의 표정이 심각했다.
“하필 바다라니!”
“어느 방향인지 아나?”
천애랑도 다급하게 물었다.
바다라면 여식이 있을 만한 위치 중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만약 여식이 간 바다로 해적들의 배라도 정박했다면 더 큰일이었다.
“이곳에서 곧장 남쪽으로 가면 됩니다. 아가씨께서 자주 가시는 위치를 제가 압니다.”
소년의 말이었다.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황보궁산을 보았다.
“어르신은 어떻게 하시려오?”
“노부는…….”
황보궁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리를 비우기엔 아직 모든 위험이 제거되었다고 볼 순 없었다.
큰 부상을 입은 황보문정을 두고 움직이는 것도 부담이고, 뒤늦게 찾아올 손님들의 문제도 있었다.
이를 이해한 천애랑이 말했다.
“우선 혼자 가보겠소.”
“미안하네. 부탁하겠네.”
황보궁산이 침중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잠시 시종을 빌리겠소.”
천애랑은 소년의 허리를 한 손으로 휘감아 들었다.
갑작스런 상황일 텐데도 소년은 짐작이라도 했는지 침착했다.
천애랑은 곧장 발돋움을 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세가에서 멀어졌다.
‘제발 부탁하네…. 그 아이는 내 모든 것과도 같으니.’
황보문정이 사라진 천애랑의 흔적에 대고 생각했다.
***
“우측으로 십 장, 풍월객잔의 간판이 있는 골목어귀로 들어가 직진 이십 장입니다!”
천애랑의 허리에 매달린 소년이 재깍재깍 길을 안내했다.
남아의 안내는 정확해서 천애랑은 착오 없이 달릴 수 있었다.
“저기!”
소년이 하늘을 난다면 이렇게 날지 않을까 싶은 자세로 손을 뻗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부두로 사용되지 않는 곳인지 다소 외진 곳에 위치했고, 다양한 기암괴석들을 지나서야 만날 수 있는 한적한 장소였다.
그리고 거대한 해적선 다섯 척이 정박을 하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천애랑은 소년을 기암괴석들 중간에 내려놓았다.
“돌아가라. 그리고 이곳에 해적선이 있다는 걸 알려. 난 곧장 저기로 침투할 것이니.”
“알겠습니다. 꼭 우리 아가씨를 부탁드립니다.”
소년은 아까처럼 당황한 기색 없이 천애랑에게 깊게 읍을 하곤 물러났다.
‘영특한 아이로군.’
들고 오면서 보니 오성이나 신체의 균형도 꽤 좋아보였다.
게다가 기억력도 좋고,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하고 용맹한 성격이었다.
‘무공을 전문적으로 배워도 대성하겠어.’
학사보다는 무공에 재능이 있어보였다.
특히 침착함은 무인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덕목이었는데, 저런 어린 나이에 체득하고 있으니 나머지만 배우면 될 일이었다.
‘그건 황보세가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고. 어디 보자.’
천애랑은 환영유령보보를 펼치며 해적선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거대한 닻을 내리고 바다 위에 부표처럼 떠있는 배를 살폈다.
한 척당 족히 일이백 명은 탈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배들이었다.
게다가 기감을 펼쳐보니 5척의 갑판 위에는 백여 명의 해적들이 있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는 건가. 그리고 수가 생각보다 많아.’
만만한 규모의 해적들이 아님이 확실했다.
‘은밀하게 처리하자.’
이렇게 많은 수를 상대해 소란을 피우기보다는 은밀하게 처리하는 것이 최선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어느 배 일려나.’
황보세가의 여식이 해적들에게 잡혔다는 가정하에 어느 배로 끌려갔을지를 고민했다.
‘가운데.’
그리고 하나의 배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갑판에 그 수가 가장 많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우두머리가 있는 곳에 수발들 인력이 많은 법이다.
천애랑은 수상비를 펼쳐 바다 위를 달렸다.
포포퐁.
파도의 포말보다 작은 파장만 남긴 채 천애랑의 신형은 순식간에 닻줄을 오르기 시작했다.
은밀하게 배의 난간까지 오른 천애랑은 갑판 위의 상황부터 살폈다.
다른 배에는 20여 명이 있는 것에 비해 이곳엔 두 배에 달하는 인원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천애랑은 내공으로 청력을 돋아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다음 행선지 들었어?”
“하북 천진?”
“그래. 듣자 하니 여기가 주 약탈지가 아니래. 천진 인근 해안가에선 여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던데?”
“괜히 피만 보는 거 아냐? 개방인가 뭔가 거지새끼들이 많은 곳이잖아.”
“글쎄. 총두목님이 판단하실 일이지. 우리야 열심히 명을 따를 뿐이고.”
“돈도 좋지만 맨 바다 위에서 배만 탔더니 천진에선 여자라도 좀 납치했으면 좋겠어.”
“그러게 말이야. 너 조금 전에 잡아온 여자 봤어?”
천애랑의 귀가 쫑긋했다. 드디어 원하는 정보가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봤지. 엄청 미인이더만! 안 그래도 방금 총두목님이 아래 선실로 데리고 들어가셨잖아.”
“하아… 우리 순서는 없겠지?”
천애랑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없다.’
다른 건 몰라도 구해야 하는 여식이 봉변당할지도 모르는 순간인 것은 확실했다.
그는 곧장 환영유령보보를 극성으로 펼쳐 은신을 강화했다.
그러곤 곧장 갑판 위로 올라 선실로 들어가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끼익.
아무것도 없이 문이 열렸다 닫히자 인근을 배회하던 해적이 고개를 갸웃했다.
“바람인가?”
해적은 손가락에 침을 듬뿍 발라 허공에 뻗어보며 의아함 가득한 눈빛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