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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138화 (138/200)

기공술사 138화

사내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섰다.

육십 줄로 보이는 그에게선 펑퍼짐한 무복으로도 가리지 못하는 근육질 몸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무림인들처럼 도검류의 무기는 없었다.

‘권각술을 다루는 이로군.’

천애랑은 상대방을 가늠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보법과 팔의 움직임은 언제든지 권각술을 펼칠 수 있는 완벽한 자세였다.

“노부는 황보세가의 무력당주 황보궁산이라 하네.”

황보궁산이라 소개한 이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공손한 그의 소개에 천애랑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기공가문의 가주 천애랑이오.”

“아.”

황보궁산이 놀란 눈을 했다.

최근 산동을 쩌렁쩌렁 울리는 이름 중 최고봉을 꼽으라고 하면 당연코 천애랑이었다.

“소문자자한 백두신룡이었구만. 반갑네.”

호방하게 웃은 황보궁산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 자네가 여기 독마종의 인물들과 이런 전투를 벌인 것인가?”

“독마종?”

천애랑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황보궁산이 말했다.

“마교의 종파 중 하날세. 독을 다루는 곳이지. 저 노인이 그곳의 수장격인 독마고.”

황보궁산은 말을 하며 두의 사내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사내들이 노인을 끌고 와 바닥에 놓았다.

천애랑은 기감을 펼쳐 노인의 상태를 빠르게 살폈다.

‘기가 불안정하군. 내가중수법에라도 당한 건가.’

대답은 황보궁산에게서 나왔다.

“우리를 마주하자마자 다짜고짜 공격을 하길래 제압했네.”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추격하려 했는데 덕분에 일을 덜었소.”

“방해가 되지 않았다면 다행일세. 그나저나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황보궁산이 자연재해와 같은 현장과 멀리 보이는 제성의 흉흉함에 질문을 던졌다.

“아! 잠시 실례하겠소.”

천애랑은 대답을 미루고 제성으로 급히 신형을 날렸다.

쓰러졌다지만 수백의 마인들 사이에 악가 병사들을 두고 온 상황이다.

어떠한 변수와 위험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애랑이 제성 안에 도착했을 땐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확실하게 사살하라! 우리 동료들을 죽인 악독한 마인들이다!”

악장이 파리한 안색으로 외치며 전투불능이 된 마인들을 죽이고 있었다.

악가의 병사들도 악에 받친 표정으로 쓰러진 마인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창을 찔러 넣고 있었다.

마치 마인들에게 당한 동료들의 복수를 하는 것 같았다.

“아! 오셨소이까.”

악장이 천애랑을 보고는 반색을 했다.

천애랑은 침중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악가의 병사들이 채 100명도 생존하지 못한 듯했다.

큰 위기였던 상황과 비교하자면 높은 생존률이긴 하나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독에 의해서 삼분지 일의 병력이 죽었다는 게 뼈저렸다.

“더 빨리 판단하고 힘을 썼어야 했는데….”

악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마시오. 덕분에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살 수 있었으니까. 다들 똑같이 생각할 것이오.”

“그렇게 말해준다면야.”

천애랑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 뒤따라온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갑작스런 제 3세력의 등장에 확인사살을 하던 악가 병사들이 경계를 했다.

“황보세가의 황보궁산이라 하네.”

앞서처럼 황보궁산이 조심히 나서서 인사를 해왔다.

“황보세가!”

황보세가라는 이름의 등장에 악가의 병사들이 다소 긴장의 끈을 풀었다.

산동의 무인들에게 황보세가는 낯설고 경계해야 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도의 명문세가인 황보세가는 평소 호협하고 용맹하다고 크게 알려져 있었다.

“악가의 병사들을 이끌고 있는 악장이라고 하오. 헌데 현재 황보세가는 봉문을 하고 있는 걸로 아오만?”

또한 현재 봉문을 하고 있어 악가보다 더욱 대외활동을 금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태산 근처의 본가는 여전히 봉문을 하고 있네. 가주님께선 지금도 태상가주님의 삼년상을 치르는 중이니까.”

“아.”

악가의 인물들이 감탄을 했다.

그간 마땅한 설명이 없어 황보세가의 봉문 이유를 몰랐던 그들이었다.

지금에서야 봉문의 이유가 효(孝)에 관련된 거라는 것을 처음 안 것이었다.

“늦었지만 조의를 표하는 바이오. 미리 알았다면 산동의 이웃으로서 악가도 기꺼이 방문했을 터인데.”

“아니네. 조용한 걸 좋아했던 태상가주님을 위한 우리들의 선택이었으니. 마음만이라도 고맙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지만 오랜 만남을 가진 선후배 사이처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산동과 무가(武家)라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었다.

“헌데 여기엔 어떻게?”

악장이 계속 들었던 의아함을 물었다.

봉문이라 함은 대관절 바깥 출입자체도 극히 자제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보세가의 거점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태산 인근이었다.

이에 황보궁산이 답을 내놓았다.

“인근 청도에 태상가주님의 누이분께서 지내시네.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시는 걸 위로하고 그 곁을 지키라는 가주님의 명을 따라 일부 무인들이 상주하고 있다네.”

황보궁산이 설명을 더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도망쳤다는 민간인들의 말을 듣고는 긴급하게 인원을 추려 온 것이네. 하지만 이미 상황이 끝났구만.”

털썩.

지켜보던 황보세가의 무인이 독마를 대화의 중심에 놓았다.

“아!”

자신들을 추격하고 괴롭히던 수장의 얼굴을 알아본 악장이 포권을 취했다.

“도움에 감사드리오. 악가는 황보세가의 도움을 잊지 않겠소.”

황보궁산이 손사래를 쳤다.

“민망하네. 우린 그저 혼비백산 도망치는 노인을 만나 처리했을 뿐이네. 어찌나 혼이 빠져있던지 제압하는 게 어렵지도 않더군. 그리고 보아하니 눈앞의 청년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은데 말이야.”

본인을 칭찬한 것도 아닌데 악장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소이다! 갑자기 무색무취의 독이 퍼져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해있을 때, 여기 천 가주가 나서서 모두 해결한 것이오! 우리는 그저 확인사살만 할 뿐이고 말이오.”

마치 자식자랑을 하듯 열변을 토하는 악장이었다.

다른 악가의 병사들도 악장의 자랑에 하던 일도 멈추고 맞장구를 쳤다.

모두가 파리한 안색을 하고 그렇게 행동하니 조금은 기괴하고 유난스러운 면이 있었다.

“허허허. 이거 소문이 과소 된 건가? 대단하구만. 백두신룡이 미래의 천하제일을 노릴 수 있는 잠룡이라더니, 이건 뭐 숫제 그냥 용이지 않나. 허허허.”

황보궁산이 감탄을 하며 천애랑을 유심히 쳐다봤다.

멋쩍은 상황에 천애랑이 표정관리를 했다. 그러곤 입을 열었다.

“대화도 좋지만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오. 다들 해독됐다고는 하나 만에 하나 후유증이 있을 수 있으니 꼼꼼하게 몸 상태를 살펴야 하오.”

“이런! 노부가 방해를 했구만. 혹시 정해 놓은 행선지가 있는가?”

“간단히 체력만 회복하고 본가로 돌아가려 했소.”

“동평으로 말인가? 부상병들을 이끌고 걸어가려면 족히 열닷새는 걸릴지도 모르네.”

“하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으니 말이오.”

“혹시 본가로 가려는 게 단순 귀환의 의미인가? 아니면 가주의 명인가?”

“아직 임무를 마친 것은 아니니 단순 귀환의 의미에 가깝겠소만. 그건 어찌?”

이에 황보궁산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를 따라오겠나.”

“청도의 황보세가를 말함이오?”

“이미 후발대가 오고 있으니 연통을 취해 수레나 마차를 준비시키면 될 것일세. 그사이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으면 내일 정도에 준비를 마친 후발대와 조우할 수 있을 걸세. 그렇게만 되면 청도까진 이틀 정도면 갈 것이니.”

“흐음…….”

“그대들의 도움도 필요해서이니 고려해보게.”

“도움을 말이오? 우리의?”

악장이 의아하게 보자 황보궁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곳 제성에서 청도까지 피난 온 이들의 수가 만 명이 훌쩍 넘네. 이들은 잠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 온 것이라 아마 정착보다는 귀가를 원하지 않을까 싶네만.”

“아.”

악장이 이해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마교의 갑작스런 공격에 필사적으로 민간인들을 대피시킨 악장과 병사들이었다.

어림짐작으로도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른다.

만약 제성이 다시 안전해졌다는 소식이 퍼지면 다수의 피난민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황보궁산은 그런 피난민들의 안전과 처리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물론 악가 병사들의 치료와 회복을 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이긴 했다.

고민을 하던 악장이 천애랑을 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오?”

천애랑을 대하는 악장의 태도가 마치 상관에게 조언을 구하는 모양새였다.

천애랑이 악가의 인물은 아니었으나 이미 명실공인 악가의 은인이고, 지금 현장에 대해서 판단할 자격이 있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천애랑은 곧장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잔독이 남거나 후유증이 있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오. 독은 시간과의 싸움이니 최대한 빨리 처치하고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오.”

천애랑의 말에 악장은 결심이 선 듯 크게 끄덕였다.

다음 행선지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천애랑은 말을 이었다.

“황보세가에서는 의원들도 준비해주면 좋겠소. 한 손이 열 손 못 감당한다는 말이 있지 않소. 나도 최선을 다해 병사들을 살펴볼 것이나 분명 한계가 있소. 그게 아니더라도 요양에는 의원들이 최고이니 말이오.”

황보궁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네. 그렇게 하지.”

그는 뒤에 시립한 무인을 불렀다.

“들었겠지? 당장 후발대에 연통을 넣어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치도록 하게. 청도의 가문에도 소식을 전해 당황함이 없도록 하고.”

“존명!”

***

일정은 차질 없이 빠르게 진행이 됐다.

수백 마인들의 시신들은 한데 모아서 화장을 시켰다. 시독 때문이었다.

시체가 썩으면 악취와 함께 시독이라 불리는 독이 발생한다.

한두 구의 시체에서 독이 생겨봐야 보통은 독으로써 유의미한 작용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거의 천여 구에 달하는 시체가 썩기 시작한다면 절대 무시 못 할 시독이 발생할 것이었다.

특히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날씨는 더운 편이기에 그럴 확률이 더욱 높았다.

그렇기에 안전을 위해서도, 추후 고향으로 돌아올 주민들을 위해서도 화장을 치르는 게 최선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습할 수 있는 악가의 시신들은 가능한 모아서 염을 했다.

시신이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들만 해도 꼬박 하루를 소비할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직 운기조식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이러한 일들의 많은 부분은 천애랑과 황보세가가 나서서 처리했다.

‘허우.’

천애랑은 숨을 돌릴 새도 없었다.

시신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처리되는 사이 1차적으로 운기조식을 마친 후 이상한 점을 발견한 이들이 천애랑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애랑은 그러한 이들을 일일이 살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하지 않나.

보고 들은 것도 많고, 기공술이라는 가진 재능이 있으니 반쪽일지라도 이곳에서 나름의 의원역할을 했다.

그렇게 기진맥진한 하루가 지난 후.

황보궁산의 말처럼 후발대가 도착하여 백 명이 넘는 일행들은 수레와 마차, 말들을 타고 모두 청도로 향했다.

포로로 잡음 독마도 함께였다.

그렇게 이동을 시작한 지 이틀째에 상당히 번화한 도시, 청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호오.”

“우와.”

황보세가를 제외한 일행들은 감탄사를 뱉었다.

바다에 맞붙은 도시답게 바다의 짠 내와 생선들의 비린내가 풍겨왔다.

모두가 내륙에서 살아왔기에 호수 정도만 익숙하지 이처럼 대놓고 바다와 밀접한 도시를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천애랑 또한 처음 겪는 풍광과 분위기에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연신 감탄하는 일행들을 보며 황보궁산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게들 신기한가. 이곳은 바다 건너와의 교역도 성행하는 곳이라 다양한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네.”

황보궁산도 웃고, 일행들도 웃었다.

밝은 햇살 아래의 도시는 긍정적인 활기로 가득 하니 천애랑도 모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평화롭군.’

고진감래라던가.

고된 사건과 일정 후 평화를 맞이하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이어진 외침에 천애랑은 물론, 일행들의 평화가 깨졌다.

“해적이다! 해적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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