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37화
“독마님! 악가 놈들이 다시 탈출을 감행합니다. 한데 그 선두에 기공가주가 있습니다.”
“놈이 어떻게 거기서 나오지?”
수하의 보고를 받은 독마는 인상을 썼다.
천애랑의 등장에 관하여 마인들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의아한데, 심지어 악가의 병사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탈출하고 있지?”
“동쪽입니다.”
독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성에서 동쪽이라면 공교롭게도 자신이 있는 방향이었다.
‘노리고 있는 건가?’
마인들의 동쪽 경계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실상은 동쪽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독마와 독마종이 무서운 탓이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독마는 천애랑의 의도와 상황을 파악하느라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할까요.”
수하의 물음에 독마가 턱을 쓸어내렸다.
‘흐음. 오히려 나쁘지 않아.’
독이라는 것은 매우 섬세해서 그 준비와 조건이 까다롭다.
시전자가 가까이 있을수록, 대상의 행동반경을 한정 지을 수 있을수록 독의 성공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지금은 천애랑의 행동방향이 특정된 상태다.
악가의 병사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고 갑자기 방향을 틀어 도망갈 가능성도 낮아진 상태다.
독마가 입을 열었다.
“저들의 탈출 방향으로 모든 병력을 집중시켜 막아. 시간만 끌어도 충분하다. 그리고 퍼져 있는 독마종의 아이들을 이곳으로 불러라. 작전을 시행할 것이다.”
“존명!”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느라 독마종의 인물들이 제성의 모든 외곽에 배치된 상태였다.
한 번에 모여 특정한 공간으로 독을 푼다면 기존에 계획했던 것보다 더 치명적이고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것이다.
‘내 계략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독마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독마종의 찬란한 미래가 이미 손에 쥐어진 듯했다.
“크크크크큭.”
독마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
“천 가주를 따라라! 방어에만 집중하고 따라붙어!”
“쓸데없는 움직임은 버려라!”
악가의 병사들이 방진을 짜며 필사적으로 천애랑의 뒤를 따랐다.
콰광! 콰과광!
그들은 엄청난 무위를 펼치며 길을 뚫는 천애랑을 보았다.
“허어.”
악가의 병사들이 절로 감탄사를 뱉었다.
천애랑의 신위를 이미 봤었던 패잔병들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적일 때는 지옥의 악귀처럼 그렇게 무섭더니만 아군이 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감탄할 때 악장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놈들의 모든 전력이 모이는 듯하오!”
악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천애랑은 느끼고 있었다.
‘상당히 성가시네.’
마인들 개개인의 수준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의 지독함이나 인해전술이 발목을 붙잡는 중이었다.
황실군과는 달리 기선제압이라는 단어가 먹히지 않는 대상들이었다.
‘그래도 뚫을 수 있다.’
생각보다 악가 병사들이 마인들의 공격에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대로만 한다면 돌파는 시간문제일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변수라는 것이 등장했다.
퍼퍼퍼펑!
아주 낮은 소리였다.
전장의 소음 속에서 그 누구도 듣지 못하는.
그리고 아주 은밀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넘길만한.
그와 동시에 마인들의 중심에서도 무언가가 퍼펑 거리며 터졌다.
‘음?!’
천애랑은 바람을 타고 슬며시 다가오는 기시감을 느꼈다.
“크억!”
“억!”
갑자기 근처의 마인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인들과 맞부딪히던 악가 병사들도 쓰러졌다.
천애랑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독이오! 모두 숨을 참고 내공으로 버티시오!”
독임을 짐작하는 순간엔 이미 독에 포위된 뒤였다.
‘무색무취의 극독.’
독에 둘러싸이기 직전까지 눈치채지도 못했다.
천애랑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크읍!”
하지만 순식간에 독이 호흡을 통해 들어왔다.
‘강하다.’
사천당가에서 훈련했던 오보단장독이나 최근 악가에서 다뤘던 독보다 통증 측면에선 더욱 강한 독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악가나 마교 모두 독 때문에 인사불성이었다.
천애랑은 눈을 좁히고 더욱 세밀하게 주위를 살폈다.
‘흐음.’
눈앞 시야를 가리던 수백 마인들이 쓰러지자 그 너머의 먼 곳에 위치한 다수의 시선이 보였다.
‘저들인가.’
그들의 중심에 있는 노인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역시 함정이었나.’
애초에 압도적인 숫자를 가진 마교가 악가의 병사들을 몰살시키지 않았음이 의아했었다.
마인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사상자를 최소화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함정이라는 소리인데, 누구를 위한 함정일지가 분명치 않아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나를 노림인가?’
터무니없는 추측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천애랑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통의 신음들 속에서 악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천 가주! 그대라도 도망치시오. 크윽!”
악장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붉은 혈관들이 도드라져 있었다.
말을 하느라 독을 더 흡입한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천애랑은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접어두곤 전음을 보냈다.
[소가주를 치료했던 것처럼 독을 다룰 것이오.]
천애랑의 말에 악장이 놀란 눈을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상황의 해결법은 내공으로 독을 버티며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천애랑은 이 지독한 독을 해결하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애랑은 뒤에서 끙끙거리며 버티는 악가의 인물들에게 크게 외쳤다.
“모두 운기조식을 취해 몸의 혈도를 개방하시오! 내가 독을 몰아낼 것이오!”
천애랑은 말과 함께 천선을 펼쳤다.
악가의 병사들은 천애랑의 말에 혼돈을 겪고 있었다.
지금 당장도 내공으로 버티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데 혈도를 개방하라니.
그들이 느끼기에 천애랑의 외침은 순순히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이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모두가 힘겹게 가부좌 자세를 취했다.
천애랑은 모두가 가부좌를 트는 것을 보고는 온몸을 개방했다. 그러곤 천선을 휘둘렀다.
그러자 주위의 모든 바람이 천애랑에게로 빨려오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잉!
산들바람은 점차 강해지더니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그 덕분에 주위에 떠다니는 무색무취의 극독들도 천애랑에게 모여들었다.
천애랑은 천선을 계속 펄럭이며 더욱 섬세하게 기를 운용했다.
천애랑의 손짓을 따라 가부좌를 튼 악가 병사들의 몸에 대자연의 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강제로 독을 빼내고, 끌어모으는 작업을 반복했다.
엄청난 집중도와 작업량에 절로 땀이 흘렀다.
‘할 수 있다.’
이보다 어려운 작업들도 성공해봤지 않나.
천애랑의 집중도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자연스레 제공권과 같은 영역이 펼쳐지더니 순식간에 악가 병사들에게서 독을 뽑아냈다.
의도했던 모든 독을 빨아들인 천애랑은 그대로 크게 호흡했다.
쓰으으으읍!
커다란 흡기에 엄청난 격통이 밀려왔다.
“크흠!”
몸이 고통스러울수록 천애랑의 눈은 더욱 빛이 났다.
‘할 수 있다.’
후! 쓰으으으으읍!
짧은 호기와 긴 흡기.
최대한 독을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뱃속에 꾹꾹 눌러 담듯 그렇게 모든 독을 흡기하자 주위에서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허억!”
“사, 살겠네.”
“후욱. 후욱.”
독에 중독된 마인들 대부분이 전투불능인 것에 반해, 악가 병사들의 다수는 빠르게 신색을 회복하고 있었다.
고통을 이겨낸 몇몇은 가부좌 튼 자세 그대로 운기조식을 했다.
“흐으으음!”
천애랑은 인상을 쓰며 독을 내공으로 치환했다.
그와 동시에 시선은 제성 너머 구릉에 있는 노인을 쳐다봤다.
노인의 얼굴이 경악과 당혹감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후우우!”
흡기한 독의 전부를 내공으로 치환하는 것에 성공한 천애랑이 깊은 숨을 토해냈다.
극독을 처리하느라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내공이 몸 안에서 몸부림을 쳤다.
‘그래.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게 해주마.’
천애랑은 곧장 노인이 있는 곳으로 극성의 축지법을 펼쳤다.
파파파팡!
거대한 파공성과 함께 천애랑의 모습이 사라졌다.
“저, 저! 막아라!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천애랑을 보며 독마가 다급히 외쳤다.
그는 설마하니 천애랑이 독을 견딜 줄은 몰랐다.
아니, 견디다 못해 독을 해소시킨 모양새였다.
‘해독제도 없는 독인데!’
독마는 식은땀이 나는 자신을 보았다.
‘장로들이 저 어린놈을 주의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는 자만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니야. 자만했던 것은 아니다. 이 정도의 독을 정통으로 맞아서 살아남을 이가 누구인가.’
혈사대주든 드라쿠 장로든, 심지어 우호법도 이 독 앞에선 평등하리라 자신했다.
그만큼 자신만만하던 독이었다.
마의조차도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던 최고의 극독.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어! 나마저 죽는다면 독마종은 이대로 무너진다.’
으드득.
독마는 이를 갈고는 크게 외쳤다.
“잠폭단을 쓰든 어쩌든 무조건 막아라!”
그렇게 외친 그는 수하들을 두고 구룽을 넘어 도망쳤다.
순식간에 제성을 빠져나와 노인이 있는 구릉으로 도착한 천애랑은 크게 진각을 밟았다.
내공으로 치환된 거대한 독의 기운이 그의 발바닥을 통해 날뛰었다.
토룡지와(土龍之臥).
거대한 내기가 구릉을 부숴버릴 기세로 퍼져나갔다.
쿠구구구구! 콰드드드득!
땅이 뒤집어지고, 나무가 무너지는 등 자연재해와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다.
그러한 여파 속에 있던 독마종의 마인들은 다급히 잠폭단을 먹으며 천애랑에게 뛰어들었다.
“죽어라!”
“독마종을 위하여!”
한가득 독기를 품은 독마종의 무인들이 살기로 번들거리는 흑안을 빛냈다.
그들은 동귀어진을 각오한 듯 스스로의 몸에도 온갖 독을 뿌려댔다.
천애랑은 그들을 향해 천선을 비틀어 휘둘렀다.
신룡군림보(神龍君臨步).
천애랑을 중심으로 뻗어간 기운이 거대한 압력을 만들어내며 수십 명의 독마종 무인들을 짓눌렀다.
구구구구구구구----!
“크윽?”
“무, 무슨?”
“이이익!”
엄청난 압력에 짓눌린 독마종의 무인들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천애랑은 마무리를 위해 전신의 내공을 뽑아 썼다.
신룡군림보. 압(壓).
“윽?”
“크으으으윽!”
“으아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독마종의 무인들은 기함할 압력을 느끼며 온몸을 아등바등 거렸다.
하지만 부처님의 손바닥에 갇힌 듯 벗어날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가진 기운을 증폭시키는 잠폭단으로도 소용이 없었다.
“아, 안 돼!”
퍼거걱!
콰득!
으드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독마종의 무인들이 천공에서 피를 흘리며 그대로 즉사했다.
“후욱. 후욱.”
폐허가 된 듯 고요해진 구릉에서 천애랑은 급히 호흡을 몰아쉬었다.
거친 내공의 사용에 혈도가 저릿저릿했다.
그래도 다급한 호흡에 내공과 체력이 조금은 회복되었다.
천애랑이 고개를 내려 무복 안을 보니 그 안에 들어가 있던 백호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한 백호의 눈이 영기(靈氣)를 사용할 때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천애랑의 회복을 돕고자 함이었다.
“고맙다.”
천애랑은 대충 백호를 쓰다듬었다.
‘악가의 소가주를 치료해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어.’
심상으로만 공부하던 이론을 소가주의 치료를 통해 확신으로 변환시키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응용까지 이루었다.
만약 소가주의 치료를 미리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매끄럽게 극독을 다루지 못했을 것이다.
“아휴 아파라.”
독을 내공으로 치환시킬 수 있다하여 그 통증을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통증은 고스란히 모두 느낀 탓에 지금도 제 몸이 아닌 양 온몸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천애랑은 손발을 탈탈 털며 노인이 도망친 방향을 바라봤다.
대충이나마 몸이 회복됐으니 추격해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구릉 너머에서 강대한 기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내 열 명 정도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들 중 하나의 손에 도망쳤던 노인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께엔 거대한 두 글자가 강인하게 수실로 적혀 있었다.
‘황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