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35화
의각원에서 있으면서 여러 무공들을 점검했었다.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경지에 조급함을 버리고 가진 것들을 살펴보는 시간들이었다.
이는 무공발전에 있어서 정답인 행동이었다.
각 무공들을 수련하던 그때 당시엔 그 모든 게 최선의 선택과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니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 하나가 독이었다.
‘독을 단순히 견디는 게 아니라 내공으로 치환시킬 수 있다면?’
이것이 한동안의 화두였다.
당가의 독인들처럼 독과 내공을 자유롭게 치환시킬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의 방법을 찾았다.
“물러나시오!”
천애랑은 의아함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러곤 배에 두둑하게 쌓인 기운을 방출했다.
천애랑의 진각과 함께 사람들이 없는 빈 터로 내공이 뻗쳐갔다.
쿠구구구구!
땅이 쩌저적 갈라졌다.
“이, 이보게! 괜찮은가?!”
“오라버니!”
“어우! 이게 뭐야?”
악불강이 창밖으로 목을 빼고 물었고, 담소연과 다루개가 다급히 다가왔다.
천애랑은 손을 저었다.
“괜찮소.”
스읍--- 하---
천애랑은 심호흡을 하며 내부를 관조했다.
극독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는데도 멀쩡했다.
오히려 준비운동이라도 한 듯 몸이 따뜻해져 있었다.
‘나쁘지 않아.’
상황만 가정해서 연습했던 것인데 실제로도 가능한 걸 확인하니 기분이 좋았다.
물론 내공으로 치환한 독을 완전히 품지 못하고 상당량 배출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도 연습하다보면 더 개선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천애랑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발전할 것이 남았다는 것과 그 길이 보인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오라버니 진짜 괜찮아요?”
담소연이 가까이 다가와 천애랑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다. 치료를 마저 하고 오마.”
천애랑은 곧장 허공을 박차곤 빠져나왔던 2층 창문으로 들어갔다.
악불강이 황급히 비켜섰다.
불가능하다 여겼던 치료에 큰 진전이 보이는 상황이니 그의 눈빛엔 더 이상 천애랑에 대한 경계심이 자리하지 않았다.
천애랑은 다시 소가주를 살폈다.
‘독은 완전히 빠져나갔고.’
중독되었던 시간들 때문에 내부가 많이 쇄약해진 상태긴 했다.
하지만 이는 요양의 문제이지 더 이상 치료의 영역은 아니다.
시체처럼 죽어가던 소가주의 혈색도 미약하지만 천천히 돌아오는 게 벌써 느껴지고 있었다.
“다행이도 독은 모두 제거된 듯하오. 요양만 잘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소만. 한 번 확인해 보시오.”
악불강이 비켜선 천애랑을 지나쳐 자신의 아들 악환비를 살폈다.
“......”
천애랑의 말대로 아들을 괴롭히던 독은 오간데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악불강의 거대한 등이 들썩거렸다.
눈시울이 붉어진 악불강이 천애랑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고맙네.”
짧은 말이었지만 강한 진심이 담겨있었다.
천애랑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치료라 다행이었소.”
악불강은 활짝 미소를 짓더니 크게 소리쳤다.
“아무도 없느냐!”
그의 외침에 바깥에서 대기하던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 방에 들어왔다.
“소가주가 치료됐다! 요양이 필요하니 의원을 부르거라! 그리고 은인들을 모실 연회를 열 것이다! 내당에 알리도록!”
“조, 존명!”
무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다급히 뛰쳐나갔다.
“오라버니!”
“허어......”
무인들과 교차하듯 들어온 담소연과 다루개가 상황을 파악하곤 놀란 눈을 했다.
***
연회가 열렸다.
연회는 가주전이 아닌 그 앞마당에서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자리를 마련하고, 음식과 술들을 옮겨댔다.
저물어가는 해를 대비해 곳곳에는 횃불들도 준비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밤늦게까지 즐기고 마시겠다는 의미였다.
순식간에 준비는 마쳐졌고, 사람들은 한 자리씩 차지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와......”
연회장 한쪽 끝으로 물러나있던 천애랑은 살짝 입을 벌렸다.
5백 명도 거뜬히 수용될 마당에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사람들이 빼곡했다.
분명 소가주의 치료성공과 이를 이뤄준 손님들을 축하연이기에 조촐하게 치러질 줄 알았다.
그리고 급하게 이루어지는 연회이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나 싶었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
“다들 어디에 숨어있었나?”
“역사가 깊은 가문이잖아요. 저희 담가만 해도 각 잡고 축하연을 열면 천 명은 기본으로 모여요. 만약 외부 손님들까지 초청하면 수천 명은 족히 될 거구요.”
놀라하는 천애랑에게 담소연이 키득거리며 하는 말이었다.
천애랑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가문도 이렇게 숫자가 많아지면 좋겠네.”
과거엔 기공가문도 이래저래 3백여 명 이상은 어울려 살았다고 들었다.
그들이 살아있었다면 아마 이렇게 서로 의지하고 기쁜 일이 있음 축하도 나누고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노력할게요!”
담소연이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뭐?”
상념에 빠져있느라 그녀의 말을 놓친 천애랑이 되묻자 담소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때 악불강이 다가오며 호탕하게 천애랑과 어깨동무를 했다.
“으하하! 천 가주. 이곳에서 뭐하나. 자네를 위한 연회인데 즐겨야지!”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강한 악력이 천애랑을 이끌고 연회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가주와 함께 오늘의 주인공 천애랑이 등장하자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모두 잔을 들어라!”
와아아아!
이미 흥이 돋은 사람들 모두가 웃는 표정으로 잔을 들어올렸다.
“오늘! 우리 가문이 친구를 얻었다!”
와아아아아!
함성 소리가 더욱 커졌다.
‘친구?’
천애랑은 의아한 표정으로 악불강을 보았다.
단순하게 흥을 돋우려고 쓰는 단어가 아님이 느껴졌다.
악불강이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작게 말했다.
“악가와 인연이 있는 패잔병들의 수습을 부탁하려고 온 거 아닌가?”
“......!”
천애랑이 놀란 표정을 짓자 악불강이 미소를 지었다.
“산동의 악가네. 아무리 조용히 지낸다 해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 정도는 읽을 줄 알지. 하지만 말일세.”
“......?”
“자네는 우리 가문의 소가주를 살렸네. 그런데 그 대가로 패잔병의 수습 정도는 내 계산이 맞지 않네.”
“그래서 친구라고 하는 것이오?”
“크크큭. 왜? 싫은가? 우리 가문 나름 영향력 있다네?”
“싫을 리가 있겠소.”
천애랑은 실소를 뱉었다.
이렇게 정대하고 든든한 곳이 친하게 지내자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천애랑의 웃음을 따라 악불강도 이가 드러나도록 미소 지었다.
“내 손녀만 있었어도 친구가 아니라 손녀사위로 삼는 건데 말이야.”
“예?”
천애랑의 놀람을 뒤로 하고 악불강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들어서 알다시피 여기 기공가문의 천애랑 가주가 소가주를 살렸다!”
와아아아아!
천 가주!
천 가주!
사람들의 환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에 우리 악가는 기공가문과 우호의 관계를 맺고자 한다!”
와아아아아!
천 가주!
천 가주!
천애랑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악불강은 순박한 천애랑의 모습에 더욱 익살스런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누구 예쁜 딸 없나? 혼인으로 엮이면 좋겠는데 말이야?!”
와하하하하!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개중에는 진짜 자신의 딸을 소개하려고 손을 드는 이들도 있었다.
순간 천애랑은 날카로운 기분에 옆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어느새 다가온 담소연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정신 바짝 차려요. 오라버니. 여기가 아주 뱀의 소굴이네요.”
담소연이 씩씩거리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람 좀 구해줬다고 아주 오라버니 코를 꿰려는 거 같아요. 웃겨 아주. 언제 봤다고? 오라버니! 관계에 있어서 적당한 거리는 좋다고 해요. 참고하세요!”
천애랑은 담소연을 미소 지었다.
“걱정 마라. 어디 가서 손해보고 다니진 않을 테니.”
담소연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천애랑이 피식 웃고는 악불강에게 말했다.
“그러면 악가에서 책임지고 산동의 패잔병들 모두를 처리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겠소.”
“패잔병 모두라...... 우리 가문과 관련 있는 병사들만 처리하면 될 줄 알았더니 그 범위가 그새 늘었구만?”
“그래서 못하겠다는 말이오? 언제는 친구라며 친한 척은 다 하시더니만?”
“뭐?”
악불강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이내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좋네. 악가가 책임지고 처리하지.”
“고맙소.”
천애랑은 밝게 미소 지었다.
때마침 저물어가는 해가 비추며 천애랑의 외모도 빛을 더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악불강이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구. 손녀가 없는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진짜 다른 녀석들의 딸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천애랑은 그런 악불강을 무시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보다 쉽게 달성했군.’
산동에 위치한 현만 해도 40개가 넘는다. 그보다 더 많은 관도들과 산, 그리고 작은 마을들을 합치면 그 수는 수백, 수천이 훌쩍 넘을 것이다.
아니, 셀 수 없음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른다.
그런 모든 곳으로 패잔병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니, 제대로 처리하려면 몇 달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악가와 병사들의 관계, 악가의 영향력을 이용해 일을 쉽게 처리하려 했다.
소가주를 치료해주는 대가로 말이다.
‘치료도 하고 원하는 바도 얻고, 또 독을 다루는 것의 실험도 성공적이었고 말이야.’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었다.
천애랑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기공가문의 가주 천애랑이오!”
천애랑의 목소리에 다시금 시선들이 크게 모여들었다.
“즐거운 소식으로 오늘과 같은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음에 영광이오! 해서 작은 기예로 흥을 돋고자 하오!”
악불강이 다급히 천애랑과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손짓해 뒤로 물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천애랑 주위로 나름의 공간이 생겼다.
담소연은 몽롱한 표정으로 천애랑의 등을 바라봤다.
다루개는 연회장 사람들 속에서 이미 술을 두 병 비우고는 눈을 빛냈다.
소문으로만 듣던 기공가주의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천애랑은 천선을 활짝 펼쳤다.
차아악!
쥘부채가 펴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천애랑의 발이 가볍게 움직였다.
쿵. 쿵. 쿵. 쿵.
천애랑이 춤을 추려는 것 같자 서있던 악가의 무인들이 창대를 바닥에 찍으며 북소리처럼 일정한 박자를 만들었다.
천애랑은 박자에 맞춰 춤사위를 펼쳤다.
천애랑의 춤사위에 사람들이 일동 감탄했다.
“아름답다......”
모두가 느끼는 동일한 감정이었다.
저무는 노을과 천애랑이 어우러지니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동시에 무공의 경지가 높은 이들은 천애랑의 보법과 손짓 하나하나에 빈틈이 없다는 것을 느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춤이자 곧 완벽한 무예였다.
그때 천애랑이 천선으로 거대한 술 항아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술 항아리에서 술이 솟아올랐다.
“용?”
술은 한 마리의 작은 용이 되어 천애랑에게로 다가왔다.
이어서 천애랑은 천선으로 시종들이 다루고 있는 횃불을 가리켰다.
그러자 횃불에서 화룡이 튀어나와 천애랑에게 다가왔다.
천애랑에게 모인 수룡과 화룡은 천애랑을 맴돌며 그의 춤사위와 어울렸다.
“와아아아!”
“멋있다!”
사람들이 열렬히 박수를 쳤다.
일을 하던 시종들도 눈을 떼지 못하고 감상을 했다.
“허, 허허.”
악불강도 헛웃음을 뱉었다.
신선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놀지 않을까 싶은 장면이었다.
“오라버니 최고예요!”
담소연은 천애랑에 대한 사람들의 칭송이 마치 자신의 일인 것 마냥 격렬하게 박수를 쳤다.
담소연의 품에 쏙 들어가 있던 백호도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한편 다루개는 본인의 입에서 술이 질질 흐르는 것도 잊고서 천애랑의 춤을 감상했다.
천애랑의 춤사위가 절정에 이르더니 수룡과 화룡이 실타래처럼 얽히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새 어두워진 밤하늘로 솟구친 두 용이 충돌하듯 합쳐졌다.
퍼어엉!
작은 폭발이 일면서 하늘에 불꽃이 예쁘게 퍼졌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이 엄청난 기예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덕분에 연회는 악가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흥겹게 진행됐다.
***
어느덧 악가에서의 생활도 2주가 지났다.
그간 악가에선 대대적으로 이름을 내걸고 악가창법을 익힌 패잔병들을 수습했다.
악가의 영향을 받은 산동의 무관들도 소식을 듣고 협력하니 일은 일사천리였다.
순식간에 수습된 패잔병만 오천여 명에 달했다.
여기에 호재가 추가로 붙었다.
소식을 들은 곡부의 공가에서 담가 및 악가와 힘을 합쳐 산동의 민심을 빠르게 수습하기 시작했다.
민심은 곧 빠른 정보 수집을 가능하게 하여 숨어든 패잔병들을 속속들이 찾아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산동의 서, 남쪽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이제 남은 거라곤 산동 동쪽의 패잔병들뿐.
그래도 지금의 흐름이라면 한 달 안에 산동에서의 불온세력들을 온전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천애랑은 편안한 마음으로 악가에 머물며 한 번씩 소가주의 상태를 살폈다.
그 외에는 악불강에게 붙잡혀 담소를 나누는 게 일상이었다.
피하려고 해도 칠십이 넘은 악불강이 바짓가랑이 붙잡듯 하니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악불강에게 붙잡혀 자연체에 대한 화두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악중패도 배움이라는 명목으로 함께 자리했다.
그때, 악가의 무인 하나가 다급히 전언을 가지고 뛰어왔다.
즐거운 대화가 깨짐에 악불강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일이냐.”
무인은 정중하게 경례를 취하곤 말했다.
“동쪽으로 갔던 병사 삼백이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뭐?!”
모두가 놀란 눈을 했다.
전언을 가지고 온 무인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마교가 개입한 듯합니다! 현재 병사들은 꼬리가 물린 채 퇴각 중이며 급히 구원을 요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