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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133화 (133/200)

기공술사 133화

산동악가의 가주 악불강은 갑작스런 방문객들에 침음을 흘렸다.

앞서는 500명이나 넘는 패잔병들이 찾아오더니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또 손님이 올 줄은 몰랐다.

대외활동을 하지 않아 외부와의 교류가 적은 악가에 이런 수준의 손님들이 연달아 찾아오는 것은 근 십수 년간 처음이었다.

칠십 줄에 들어선 악불강은 자신을 만나야겠다며 나타난 눈앞의 인물들을 보았다.

“그러니까 담가의 여식과 개방의 오결제자와 기공가문의 가주시란 말인가?”

악불강의 목소리엔 불편함이 묻어 있었다.

그를 마주하고 선 모두가 인사를 했다.

“담가의 담소연입니다. 가문에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개방 오결제자 다루개가 천변만화창 선배를 뵙소이다.”

“천애랑이오.”

천애랑은 악불강을 관찰했다.

가주석의 낮은 단상 위엔 좌식으로 앉는 의자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 앉은 악불강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거대한 풍채와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노인의 곁에 세워진 창은 무기를 볼 줄 몰라도 예사롭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노인과 창이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노인 자체가 잘 벼려진 창처럼 느껴졌다.

그때 악불강과 천애랑의 시선이 마주쳤다.

악불강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불편하던 그의 기색이 흩어지면서 그 자리에 호기심이 대신했다.

“대단하구만. 참으로 대단해.”

“숨은 용혈이 많고 그 중엔 산동악가가 있다고 하더니 명불허전이오.”

뜬금없는 두 사람의 대화에 장내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악불강은 자신의 우측 아래에 시립한 손자를 불렀다.

“중패야 보거라. 이거야말로 완벽한 자연체라는 것이다. 완벽한 균형에서 오는 저 중심축이 아름답지 않느냐.”

열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할아버지의 말을 공손하게 받으며 천애랑을 보았다.

거일반삼이라.

태어나길 천재로 태어난 악중패는 어린 나이임에도 악가창법의 형과 식은 물론이고 오의 또한 모두 익혔다.

내공과 실전경험만 채워진다면 능히 악가의 번영을 이끌 인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렇게 배움이 빠른 그의 천재성은 보는 눈에 있었다.

“대단합니다. 소손의 배움이 짧아 완벽하게 읽지는 못하겠으나, 수시로 중심축이 변함에도 모두가 완벽하니 우주가 곧 이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크, 크하하하하하하!”

손자의 대답이 매우 흡족한지 악불강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불편한 기색을 보이던 악불강의 갑작스런 태도변화이기에 담소연과 다루개는 어리둥절 눈치만 보았다.

한편으로 천애랑은 눈에 이채를 띠며 악중패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자 악중패가 눈에 불을 켜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심중으로 전투를 치르는 것 같았다.

‘제법이군.’

천애랑은 슬그머니 어깨를 움직였다. 매우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악중패가 크게 움찔하며 세 보나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에 악불강은 더 크게 웃더니 분위기를 정리하듯 손사래를 쳤다.

“아아. 미안하네. 그리고 손자 놈에게 가르침을 주어 고맙구만.”

악중패가 황급히 자세와 위치를 바로 하고 천애랑에게 포권을 취했다.

천애랑은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담소연과 다루개는 대체 어떤 상황인지 모른 채 눈만 끔뻑끔뻑했다.

악불강이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모두들 편히 앉게.”

갑자기 어디선가 다리가 없는 좌식의자들이 순식간에 배치됐다.

시비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모든 이들의 앞에 작은 주안상을 차렸다.

가주 악불강과 천애랑, 담소연, 다루개가 떨어져서 마주 보는 형국으로 앉았고, 악가의 다른 이들은 악불강의 눈앞 좌우 종대로 길게 자리했다.

불청객이 어느새 귀빈이 된 듯한 분위기가 됐다.

“번민한 시국에 방문한 손님들을 위해 내 한 잔씩 따라주지.”

분위기는 환대인데 악불강의 말속엔 뼈가 있었다.

악불강이 자신의 앞에 준비된 3개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곤 천애랑과 담소연, 다루개에게 던지듯 보냈다.

술잔이 회전을 하며 빠르게 날아갔다. 그럼에도 잔에서 술이 튀어 넘치진 않는 기교가 들어있었다.

다루개가 다급히 내공을 끌어올리며 금나수로 잔을 붙잡았다.

파각!

악불강의 내공을 해소시키지 못한 탓에 다루개의 손안에서 술잔이 바스라졌다.

그 때문에 술이 튀었는데 다루개는 본능적으로 혀를 날름거리며 흩어지는 술 방울들을 흡입했다.

본능적인 행동 후에 오는 민망함에 다루개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옆을 봤다.

천애랑이야 그렇다 쳐도 담소연은 자신처럼 곤욕을 치르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다루개의 눈에 보이는 건 허공에 두둥실 떠있는 술잔 2개와 놀란 표정의 악가 인물들이었다.

허공에 떠있던 술잔은 이내 차분하게 천애랑과 담소연 앞의 주안상 위로 안착했다.

‘저럴 수 있으면서 왜 나는…….’

다루개가 조금은 억울한 표정으로 천애랑을 쳐다봤지만 돌아오는 건 지독하게도 섭섭한 무관심뿐이었다.

천애랑은 악불강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배웠소.”

천애랑은 허리춤에서 천선을 꺼냈다.

갑작스런 쥘부채의 등장에 모두가 의아한 시선을 보낼 때.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그러더니 장내의 모든 술잔이 잘게 떨렸다.

“따뜻한 술도 맛있더이다.”

장내의 모두는 자신들 앞에 놓인 술잔이 데워진 것을 보며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무림인들은 삼매진화 혹은 열양공, 또는 내공의 떨림 등으로 무언가를 뜨겁게 만들 순 있다.

모든 방법은 상당한 내공의 공부가 필요한 법이고 지극히 제한적인 게 일반적이다.

특히 허공을 격하고 무언가를 뜨겁게 만드는 방법은 내공 공부 중 최상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악가의 인물 중에서도 악가의 가주 악불강 정도만 가능했다.

그런데 천애랑은 단순히 허공을 격하는 수준을 넘어, 십 수 개의 술잔 모두를 뜨겁게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기교는 이 자리에서 천애랑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 허허! 놀랍구만 놀라워!”

악불강이 호기롭게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따뜻한 술도 좋군. 모두들 식기 전에 들어 보게.”

아직 술을 마시지 않는 악중패를 제외한 십 수 명의 악가 인물들이 동시에 술을 마셨다.

“크으!”

“호오.”

“꽤나 좋습니다?”

덕분에 분위기가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나는……?’

술잔이 깨져 아무런 술도 들고 있지 못한 다루개만 섭섭한 표정으로 천애랑을 바라봤다.

그때 악불강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 누구의 말을 들으면 되겠나?”

산동의 권문세가 담가, 구파일방의 개방, 가장 고수인 천애랑.

셋 중에서 일행을 대표하는 이가 누구인지 묻는 것이었다.

담소연과 다루개가 자연스레 천애랑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에 악불강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천하의 정보를 다루는 개방이자 나이가 제일 많은 다루개가 대표일 것이라 처음에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켜보면서 내심 기공가문의 천애랑이 대표이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다.

천애랑이 말했다.

“아드님이 중독되어 사경을 헤맨다고 들었소.”

쏴아아---

화기애애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십수 명의 기세가 날카롭게 쏘아지며 천애랑과 일행들을 압박했다.

“크흐흠.”

“으읍.”

다루개와 담소연이 버거운 신음을 뱉자 천애랑이 접힌 천선을 정리하듯 탁자 위를 톡톡 쳤다.

그러자 이들을 압박하던 기운들이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다시금 거대한 기세가 정면에서 쏘아졌다.

악불강이었다.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장난이 아니었다.

다가오듯 앞으로 숙인 그의 몸은 왜인지 더욱 거대해 보였다.

악불강의 시선이 스르륵 다루개에게 향했다.

다루개는 식은땀을 흘렸다.

악불강의 아들이자 소가주인 악환비가 아프다는 것은 큰 비밀이 아닐 수 있었다.

실종됐다가 쓰러진 채 가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이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중독됐다는 사실은 극히 비밀이었다.

“여기 다루개 소협에게서 들었소.”

천애랑의 말에 다루개의 고개가 휙 돌아가며 억울하고 놀란 눈을 했다.

다루개를 바라보는 악불강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처, 천 가주.”

다루개가 구원을 요하는 간절한 표정으로 천애랑을 조용히 불렀다.

천애랑은 그런 다루개를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거두절미 하고 말하겠소. 독에 중독된 것이라면 내가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그래서 이곳에 왔소.”

다루개에게 향했던 악불강의 시선이 천애랑에게로 삐걱대듯 돌아갔다.

“노부는 그런 농을 좋아하지 않네.”

“왜 농이라고 생각하시오?”

“내로라하는 의원들 모두가 치료불가라는 진단만 하고 갔네. 그저 독을 붙잡아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만 했지.”

여기까지 말했음에도 너무나 태연한 천애랑의 모습에 악불강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들썩이던 악불강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그는 그저 시선을 천애랑에게 고정한 채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톡 두드렸다.

“어떻게? 그대가 무슨 당가라도 되나?”

“당가에서 짧은 배움을 가진 적이 있긴 하오. 그래서 내가 치료하고자 하는 방법에 그 배움이 들어가 있긴 하오.”

“독이라는 것이 짧은 배움으로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은 노부도 아네.”

“내 휘하엔 20여 명의 의원들이 있소. 이들을 이끄는 이는 마 신의요.”

마지막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사라졌다던 신의?”

“아직도 살아있는가?”

송 황실의 경험과 기록이 있던 악가이기에 마 신의의 존재에 대해서 모두가 놀람을 표했다.

“혹 신의가 같이 온 건가?”

누군가의 말에 장내가 술렁이며 수긍을 시작했다.

“그래. 마 신의라면 웬만한 의원들보다 나을지도.”

“가주님. 만약 그런 거라면 한 번 진료를 부탁해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악불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도 마 신의라면 자신의 아들을 맡겨보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정녕 마 신의가 같이 온 겐가?”

“아니오.”

장내가 다시금 차갑게 식어버렸다.

악불강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노부와 장난하나? 당가에서의 배움은 짧고, 신의는 데려오지도 않았으면서 지금 치료를 논하는 겐가?”

“그렇소. 솔직히 나도 치료가 될지는 잘 모르겠소.”

이쯤 되자 악가의 인물들이 기세를 갈무리할 생각도 안 하고 열을 냈다.

“이 자가 정녕!”

“악가를 능욕하려 함인가!”

“감히!”

이들은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리고 시종들은 언제든 악가 인물들에게 창을 배급할 생각으로 가주전 구석에 진열된 창들을 살폈다.

이 때문에 다루개가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담소연은 매우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천애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애랑의 표정은 태연자약했다.

그 모습에 악불강이 장내를 진정시키며 천천히 말했다.

“일단 자네의 계획을 들어보겠네. 하지만 모든 것을 들은 후 우리 가문을 능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책임을 중하게 물을 것이네. 이는 담가는 물론이고 개방도 마찬가지일세!”

함께 왔다가 날벼락을 맞은 다루개가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천애랑은 물론이고 담소연은 여전히 차분했다.

천애랑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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