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26화
‘이 정도면 신호가 됐겠지.’
활을 버린 천애랑은 우장군의 수급이 달린 창대를 높이 들어올렸다.
이제는 담가의 병력이 활개 칠 수 있도록 황실군 진형을 흔들 차례였다.
천애랑은 수만에 달하는 황실군의 진형을 내려다보았다.
병사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횃불의 바다는 꽤나 장관이었다.
천애랑은 사사로운 감상에서 빠져나오며 크게 외쳤다.
“나 천애랑이 우장군을 죽였다!”
천애랑의 목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듯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천애랑은 황실군의 진형으로 걸음을 옮기며 같은 말을 계속 외쳤다.
밤이라서인지 목소리는 빠르게 진형을 휘감았다.
“뭐, 뭐야?”
“어디야?!”
영문 모를 병사들이 막사에서 우왕좌왕 뛰쳐나왔다.
그들은 소란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나타났음에 당황했다.
철그덕. 철그덕.
갑주를 입은 창병들이 창을 꼬나들고 조심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은 창대에 매달린 하나의 수급을 보았다.
“헉!”
믿기지 않는 상황에 병사 하나가 횃불을 가까이 내밀자 수급이 명확하게 보였다.
두 눈조차 감지 못한 수급은 매우 익숙한 얼굴이었다.
절대 모를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히익!”
“자, 장군님?”
“설마…….”
혼란스러운 경계병들에게 천애랑이 다시금 크게 소리쳤다.
“나 천애랑이 우장군을 죽였다!”
천애랑을 포위해오던 병사들의 동요가 더욱 심해졌다.
그러한 병사들의 동요를 파악한 백부장들이 다급히 외치며 공격을 종용했다.
“거짓이다! 적의 꾐에 넘어가지 말라!”
“적은 고작 하나다! 놈을 제압하고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다!”
“정신 차리고 공격하라!”
백부장들의 말이 통했을까.
혼란스러워하던 병사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어둠을 밝히는 수백의 횃불들과 창이 천애랑을 강하게 압박했다.
쾅!
천애랑은 수급이 달린 창을 바닥에 강하게 찍어 꽂았다.
그러곤 천선을 활짝 펼쳐 흔들었다.
화르륵! 화륵!
대낮처럼 주위를 밝히는 횃불에서 불들이 살아있는 것 마냥 튀어나왔다.
화악!
그런 불꽃들은 천애랑의 손짓에 따라 병사들을 덮쳤다.
역병이 돌 듯 순식간에 전염되는 불꽃에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당황을 했다.
“부, 불!”
“도와줘!”
“끄아악!”
갑주를 입고 있던 병사들은 비교적 덜했지만, 휴식 중 가벼운 옷차림으로 뛰어나온 병사들은 속수무책 불에 피해를 입고 있었다.
“크윽! 죽어라!”
그때 백부장이 불타는 부하들을 제치며 천애랑에게 창을 내질렀다.
백부장의 행동에 맞춰 다른 창병들도 함께 가세했다. 오랜 훈련에 따른 본능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천애랑은 우선 이화접목의 수로 백부장의 창대를 확 당겼다.
“어?”
감당할 수 없는 빨려감에 백부장이 당황하는 찰나.
서걱!
천애랑은 그대로 백부장의 목을 베었다.
허무하다 싶은 일격에 주인 잃은 몸통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어서 천애랑은 상중하로 나뉘어 찔러오는 병사들의 창을 뛰어올라 피해냈다.
쉬쉬쉭!
공기를 가르는 창대의 파공성이 한음으로 들렸다.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킨 천애랑은 병사들의 창대 위에 내려앉으며 천근추를 펼쳤다.
거악과도 같은 무게가 창대에 가해졌다.
쿠구궁!
황실군 전용의 창대는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로 인해 창을 집은 병사들의 신형이 의지와 상관없이 우르르 무너졌다.
허점 가득한 병사들은 곧 쉬운 표적이 되었다.
사악! 샥! 사아악!
“컥!”
“악!”
“크악!”
간결하게 휘둘러진 천선이 갑주 입은 병사들의 빈틈을 정확히 지나갔다.
신묘한 천애랑의 실력에 병사들이 주춤거렸다.
“적은 하나다! 죽여라!”
“놈을 처치하지 못하면 진법에서 돌아올 지휘관님들에게 죽은 목숨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두려워 물러서는 자는 내가 친히 벌하리라!”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이들에게 있어서 절대자는 작게는 십부장부터 크게는 우장군이었다.
게다가 전시상황에서의 명령 불복종은 즉결사형이었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천애랑에게 달려들었다.
눈앞의 젊은 고수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쌓인 상관들의 공포가 더욱 큰 병사들이었다.
그 모습들에 천애랑의 미간이 좁혀졌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어느 정도 무력행사를 하면 자신을 알아보고 지레 겁을 먹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천애랑은 발아래 놓인 창대를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적이 도망가려 한다!”
천애랑이 물러남에 병사들의 기세가 더욱 타올랐다.
하지만 천애랑이 물러난 것은 병사들을 한눈에 담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천애랑은 다가오는 병사들을 향해 손을 펼쳤다.
신룡군림보.
쿠구구구구구구.
천애랑에게 다가오던 병사들의 움직임이 거대한 내기의 압력에 멈칫했다.
압(壓).
천애랑의 펼친 손이 꽉 쥐어졌다.
빠득! 콰드득!
“크아아아악!”
“으아악!”
엄청난 내기의 조임에 최선봉의 병사 수십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갑주를 입은 병사들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천애랑은 이어서 천선을 펼쳐 휘둘렀다.
화접탄.
불꽃 나비가 당황하는 병사들을 덮쳤다.
쾅! 콰과광!
마치 폭약이 터진 듯한 폭발에 병사들이 우후죽순 쓰러졌다.
엄청난 무용에 천애랑을 공격하던 병사들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서, 설마…?”
“담가에서의!”
화접탄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했던 병사들이 이제야 천애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전장의 신…….”
나지막한 동요가 순식간에 병사들에게로 전염됐다.
천애랑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차차착!
병사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물러났다.
또다시 한 걸음.
차차착!
주위를 빼곡히 둘러싼 병사들은 천애랑이 다가오는 만큼 일사불란하게 뒤로 물러났다.
빼곡하게 포위망을 형성했다곤 믿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천애랑은 차분하게 꽂아놓은 창대를 되찾았다.
그러곤 크게 외쳤다.
“나 천애랑이 우장군을 죽였다! 너희들의 부관이나 천부장 등의 지휘관들 또한 진법 안에서 모조리 죽었다!”
병사들의 동요가 더욱 커졌다.
필사적으로 병사들을 독촉하던 백부장들조차 놀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심지어 저 수급은 거짓이라고 외치던 백부장도 입을 떡 벌린 채로 굳어 버렸다.
담가의 성벽 앞에서 보았던 괴물, 그래서 우장군과 간부들이 진법까지 설치해 죽이려던 이가 눈앞의 청년이 맞다면.
그리고 저 수급과 청년의 말이 진실이라면.
병사들의 머릿속에 ‘공포’라는 감정이 순식간에 공유가 됐다.
“장, 장군님이 정녕!”
“세상에.”
“그럼 우린 어떻게…….”
공포는 눈을 흐릿하게 하고 근육을 수축시키며 의지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병사들이 두려운 눈으로 천애랑을 보았다.
이곳은 수만 병사들이 포진된 한 가운데다.
그러한 곳에서 천애랑은 의연하게 적장의 수급 달린 창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조자룡처럼 옛 역사 속에서나 나오던 영웅의 모습 같았다.
문제는 그 영웅이 아군이 아니라는 점이고, 자신들은 영웅의 서사에서 쓰러지는 그저 하나의 적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으으으…….”
극심한 두려움에 천애랑을 둘러싼 병사들의 포위가 헐거워졌다.
그때였다.
갈피를 못 잡는 황실군에게 있어서 청천벽력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담가의 정예들은 적들을 모조리 물리쳐라!”
와아아아아---!
천애랑의 신호를 받고 공격을 감행한 담가의 병력이 어둠 속에서 도깨비처럼 나타났다.
말발굽 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모든 말발굽에 두꺼운 천과 짚을 씌웠던 담가의 기병들이다.
이 때문에 황실군에선 담가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천애랑 때문에 황실군의 시선이 진형 내부로 쏠린 것도 컸다.
이 때문에 담가 병사들에 대한 황실군의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기병들은 쐐기진으로 적들을 와해시켜라!”
“보병은 방진을 형성하고 적들이 진을 짜지 못하도록 하라!”
노도와 같은 담가 병사들의 기세에 준비가 안 된 황실군은 속수무책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여물었음을 느낀 천애랑이 사자후를 뱉듯 크게 외쳤다.
“나! 천애랑이 우장군과 간부들을 모두 죽였다! 투항하라! 그리하면 살려줄 것이다!”
쿠루루룽!
때마침 하늘이 번쩍이며 천둥소리를 내었다. 그리곤 잇따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병사들의 판단은 빨라졌다.
“하늘이 노했다!”
“도, 도, 도망쳐!”
혼비백산 도망치는 황실군을 보며 천애랑은 전장의 중심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장군의 수급이 잘 보이게 창대를 치켜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애랑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소리를 쳤다.
“살고 싶으면 투항하라!”
많은 병력의 인파 속에서 밀려나있던 황실군들이 그제야 창대 위 수급을 보곤 기겁을 했다.
“장군님이!”
“후퇴하라! 후퇴해!”
“아니다! 적은 하나다! 어떻게서든… 크악!”
간혹 저항의 불씨를 보이는 놈들에겐 천선이 친히 찾아갔다.
천애랑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속도로 수만 병사들 진형의 중심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수십 번의 놀람과 저항, 그리고 죽음이 지나자 그제야 누군가 무기를 버렸다.
땡그랑.
천애랑이 살펴보니 황실군 답지 않게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었다.
땡그랑.
노인에 이어서 어린 남아 등 영양상태가 좋아 보이지 못한 이들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투항하는 이가 많아졌다.
때대대대대댕.
무기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대나무 숲 바람 이어지듯 들려왔다.
“천 가주!”
어느새 적진을 뚫고 다가온 담하웅이 천애랑의 창대를 보았다.
“역시! 대단하군!”
담하웅을 호위하는 기병들이 저항하는 병사들을 도륙했다.
담하웅은 천애랑의 시선을 따라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은 자들을 보았다.
“아. 황실군에 강제 징집된 양민들인가 보군.”
천애랑은 그제야 이들이 왜 피골이 상접했는지 이해가 갔다.
이에 천애랑은 크게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투항하면 살려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천애랑은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다가오는 황실기병들을 보았다.
그들을 향해 진각을 크게 밟았다.
토룡지와(土龍之臥).
쿠구구구구---!
천애랑의 발끝을 시작으로 황실기병들까지의 땅이 쩌저저적 갈라졌다.
히이이잉!
말들이 심히 놀라 날뛰니 기병들이 그대로 낙마를 했다.
천재지변과도 같은 이적에 모든 이들이 천애랑을 경외 어린 시선으로 봤다.
천애랑은 다시 한 번 크게 외쳤다.
“나 천애랑이 우장군과 모든 지휘관들을 죽였다! 그러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리하면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
이는 전쟁의 마지막을 알리는 최후의 외침이었다.
***
청해 곤륜산의 곤륜파.
“어찌할꼬.”
곤륜파 장문인은 격렬히 흔들리는 진법의 운무를 지켜보며 수심이 가득한 한숨을 뱉었다.
천애지형에 이루어진 방어진법은 철벽이라는 수식어를 가질 만큼 단단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인원에서 나오는 쉼 없는 공격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장문인…….”
장문인은 자신을 부르러 온 사제 현륜을 돌아봤다.
앞서 마교와의 전투에서 내상을 입어 한껏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 쉬지 뭐 하러 나왔나.”
“적들이 지척에 있는데 어찌 가만히 쉬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현륜이 수척한 얼굴에 강한 미소를 보였다.
장문인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적지 않은 부상이다. 회복이 늦으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라.”
“제 삶이 곤륜에서 시작했으니 그 끝도 곤륜과 함께할 것입니다. 곤륜이 풍전등화의 위기인데 끝까지 한 손이라도 보태야지요.”
“…….”
장문인은 지그시 사제의 표정을 봤다.
수척한 얼굴임에도 그 눈빛 안엔 곧게 솟은 곤륜의 기상이 담겨있었다.
장문인은 작은 한숨과 함께 물었다.
“그나저나 객들은?”
“접객당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가? 그럼 함께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