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공술사-124화 (124/200)

기공술사 124화

다음날 이른 아침.

거의 하루를 소비한 운기조식으로 완전히 기운을 회복한 천애랑은 담하웅을 찾아 나섰다.

전날 내색은 안 했지만 막대한 기운을 쏟아 지친 상태였고, 이를 눈치챈 담하웅의 권유로 일찍 휴식을 취한 천애랑이었다.

걸음을 옮기던 천애랑은 마른 눈물로 무덤을 만드는 사람들을 보았다.

고인의 가족인지 그저 일하는 사람인지는 모르나 고요한 슬픔이 그들에게서 느껴졌다.

“…….”

전쟁의 뒤편에 차곡차곡 쌓이는 저런 슬픔들이 전쟁의 앞편에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키고자 하는 무게감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해주지.’

천애랑 스스로 느낀 바였다.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고 복수하는 행위보다 지키고자 하는 행위가 더 어렵지만, 이는 스스로를 잃지 않게 해주는 길잡이와 같았다.

천애랑이 만난 여러 인연, 그리고 가족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

이들은 천애랑이 살인과 복수에 잡아먹히지 않게 해주는 큰 이유였다.

또한 복수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지독히도 냉정하게 만들어주었다.

‘마교가 준동했다고 했지.’

천애랑은 사람들이 구덩이에 시신들을 집어넣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마치 자신이 백두산에서 할아버지와 가족들의 무덤을 만들 때가 생각났다.

‘준비는 되었어.’

무덤을 덮는 사람들의 공허한 움직임이 천애랑의 눈길을 계속 붙잡았다.

‘때만 기다리면 될 뿐.’

천애랑은 마치 흡성대법에서 억지로 벗어나듯 무덤에서의 시선을 힘겹게 거두었다.

그때 거리를 거닐던 백호가 반갑게 다가왔다.

담가 내에서 백호는 익숙한 건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백호를 크게 괘념치 않아 했다.

그르릉.

다가온 백호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천애랑은 피식 웃으며 백호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롱. 고로롱.

백호가 기분 좋은 듯 더욱 머리를 비벼댔다.

“녀석.”

천애랑은 기특함에 작정하고 백호를 문질러줬다.

대자연의 기운을 한껏 끌어와 백호의 영기가 생장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쯤 되자 백호는 머리 부비는 것을 그만두고 발라당 뒤집어졌다.

성인남성보다 더 큰 몸체가 쌔근쌔근 들썩거렸다.

“대체로 시큰둥하던 백혼데 확실히 천 오라버니한테는 다르네요.”

담소연이 천천히 걸어오며 미소를 지었다.

천애랑은 백호의 배를 문지르며 마주 미소 지었다.

“잘 잤어?”

너무나도 태연한 천애랑의 말에 담소연이 실소를 뱉었다.

불과 촌각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어떤 전투와 상황들, 사상자가 발생할까 고민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천애랑의 태평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금이 전시인 것도 잊게 생겼다.

“네 덕분에요. 전쟁이 시작된 후로 가장 잘 잔 것 같네요.”

“다행이다.”

천애랑은 백호에게서 손길을 거두었다.

백호의 아쉬움 가득한 소리를 뒤로하고 천애랑이 물었다.

“가주님은 어디 계시지?”

담소연의 시선이 성벽으로 향했다.

“같이 갈 거야?”

“아니요. 제 나름대로 전쟁을 준비해야 해서요.”

그녀는 농성에 필요한 기름이나 식량을 준비하는 민간인들을 가리켰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이곤 백호를 발로 툭 찼다.

“호야. 따라가서 좀 도와라.”

그르르릉.

천애랑의 손을 건드리던 백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슬렁거리며 담소연에게 다가갔다.

담소연이 웃으며 백호에게 슬쩍 영약 하나를 내밀었다.

자양강장제 수준의 영약이었지만 귀찮음 가득하던 백호의 움직임을 재촉하기엔 충분했다.

백호가 날름 받아먹으며 늠름하게 담소연을 앞장섰다.

담소연은 천애랑에게 미소를 전하곤 백호랑 걸음을 맞추며 멀어졌다.

천애랑이 성벽 위에 오르자 담하웅이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아! 잘 쉬었나.”

“덕분에 잘 쉬었소.”

담하웅의 옆에 선 천애랑은 성벽 아래를 봤다.

제남 성벽을 장악한 황실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에 담가의 성벽 밖에서 담가 병사들이 전쟁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에 의해 목책 등 기마 방어용 구조물들이 설치되고 있었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나 이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담하웅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짙게 묻어나왔다.

천애랑은 어제 전방을 가득 채우던 병력과 지금 눈앞의 장애물들을 비교해봤다.

황하의 범람을 앞에 둔 위태로운 모래 둑처럼 보였다.

아마 저 장애물들은 기마든 보병이든 그들의 1선에서 쉽게 무너질 것이다.

“황실군이 8만이 넘는 병력이라 하였소? 그에 반해 담가는 2만?”

“맞네.”

천애랑은 미간을 좁혔다.

“생각보다 많이 불리하군.”

“그렇네. 그나마 공가의 격문 덕분에 병력이 보충되었기에 망정이지.”

“공가의 격문?”

“공자의 후손들이 도움을 줬네. 그들의 격문이 백성들을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했지.”

“아.”

“덕분에 황실군은 인근에서 강제징병이나 병량미를 얻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네. 그런데 어제처럼 무고한 백성들은 어디서 데리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네. 제남 인근의 백성들은 어지간하면 도망갔다 들었건만.”

담하웅의 말을 들으며 천애랑은 일전의 산속 촌락이 떠올랐다.

황실군이 남자들을 강제 징용하던 것의 결과가 이렇게 이어졌음을 깨닫자 입 안이 썼다.

담하웅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의 병력 2만 중 그나마 전쟁에서 쓸 만한 이들은 1만이 채 남지 않았네. 뒤늦게 합류한 병력은 어쩔 수 없이 훈련량이 적은지라.”

“헌데 내 기억에 담가의 사병이 3만이나 된다고 들었소만?”

담하웅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황실의 주 전력이 홍건적에게 감에 따라 대혁이가 위험할 수 있어서 1만 정도의 사병을 그리로 보냈네. 가주로서의 책임이 아비로서의 걱정 앞에서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더군. 그런데 전쟁이 어려워짐에 따라 이곳에서 죽은 이들에게 죄책감이 들더군.”

천애랑은 담하웅의 슬픈 표정을 보았다.

강한 책임감의 저울이 그의 어깨에서 휘청거리는 듯했다.

천애랑은 작게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문제였다.

‘아들의 목숨과 이곳의 목숨이라.’

쉽게 판단이 안 섰다.

뭐가 정의고 정답이라는 섣부른 위로를 입에 담기도 조심스러웠다.

천애랑은 그저 가슴을 더욱 활짝 폈다.

“앞으론 걱정 마시오. 내가 왔지 않소. 의제의 가문인 담가의 도움을 내 절대 잊지 않았소.”

번뇌에 가득하던 담하웅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래. 천군만마라는 표현이 어떻게 생겼을지 내 직접 목도했으니. 고맙네.”

천애랑은 그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였다.

성벽 밖을 경계하던 병사들이 부산스러워지고 적진에서 한 필의 기마가 다가왔다.

그는 전령임을 나타내는 깃발을 들고 있었다.

“대 원 황실군 우장군의 전언이다! 역도들은 예를 갖춰라!”

천애랑과 담하웅이 황당함에 시선을 마주했다.

이내 담하웅이 크게 외쳤다.

“나는 담가의 가주 담하웅이다! 개소리를 하려거든 살려줄 테니 물러나고! 그게 아니라면 거기서 말하라!”

담하웅의 강짜에 전령의 표정이 똥 씹은 듯했다.

그러자 전령 주위의 담가 병사들이 창을 치켜들었고, 성벽 위의 병사들은 활시위를 걸었다.

흉흉해지는 분위기에 전령이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천애랑은 들으라!”

뜬금없이 천애랑의 이름이 거론되자 병사들의 시선이 천애랑에게로 모여들었다.

‘뭐지?’

천애랑도 의아함에 성벽 난간 가까이 붙으며 전령을 쳐다봤다.

천애랑을 확인한 전령의 말이 이어졌다.

“우장군께서 친히 천애랑 그대와의 독대를 원하신다! 천애랑 그대는 이에 응하라! 그렇지 않다면 무고한 백성들이 차례로 죽음을 당할 것이다!”

전령이 대뜸 뒤를 가리켰다.

전날 폭약에 의해 무너진 제남 정문 성벽 위였다.

일반 병사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먼 거리였지만 안력을 높인 천애랑에겐 문제가 없었다.

높인 안력에 제남성벽 위의 상황이 보였다.

“……?!”

성벽 위엔 박도를 어깨에 치켜 기댄 병사 몇이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그들 앞 난간에서부터 줄이 성벽을 따라 늘어져 있었다.

늘어진 줄 끝엔 여인과 아이들이 묶인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수가 수십이었다.

만약 저 박도가 내려쳐져 줄을 끊기라도 하면 매달린 이들이 그대로 낙하에 죽을 것 같았다.

인질을 앞세운 황실군의 명백한 협박이었다.

“이, 이런 천인공노할!”

천애랑과 같은 것을 본 담하웅이 이를 갈았다.

“인질은 저게 끝이 아니다! 천애랑 네놈이 오지 않는다면 일각마다 열의 목숨이 사라질 것이다!”

천애랑은 무서운 눈으로 성벽 아래 전령을 바라봤다.

짙은 살기에 전령이 움찔했지만 마저 할 말을 다했다.

“천애랑은 유시 말(19시) 제남 정문 너머 숲으로 와라! 단! 혼자서 와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거나! 그 전에 수상한 움직임이라도 보인다면! 마찬가지로 무고한 이들이 죽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천애랑 그대의 잘못이다!”

할 말을 마친 전령은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듯 멀어져갔다.

전령이 떠난 후 담가의 가주전에선 긴급회의가 이뤄졌다.

당연히 수많은 걱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명 함정입니다! 전쟁의 큰 변수인 천 가주를 해하고자 하는!”

“맞습니다! 기마병이 정예인 저들이 숲에서 만남을 자처하다니요? 게다가 유시 말이라는 그리 늦은 시간에? 분명 꿍꿍이속이 있습니다!”

“맞네. 천 가주! 인질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 볼 테니 자네는 가지 말게!”

담가의 장수들과 가신들, 그리고 담하웅이 극구 천애랑을 말렸다.

천애랑이 전령의 말을 승낙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천애랑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이에 담하웅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수틀리면 우장군을 죽일 요량인 것 같은데, 우장군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무언가 상황을 대처하기엔 너무나도 적진이야.”

하지만 천애랑의 표정은 단호했다.

확고한 천애랑의 태도에 담하웅이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자네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너무 위험해! 저기는 수만의 병력이 에워싼 용담호혈이야! 자칫하다간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네!”

천애랑은 살며시 손을 들어 담하웅을 진정시켰다.

“그래서 말인데…….”

그러곤 부드러운 미소로 머릿속에 떠오른 의견을 말했다.

천애랑의 말이 이어지자 반대 일변도의 의견을 뱉던 담하웅과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

유시 말.

천애랑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남 성벽을 지날 땐 박도를 든 병사들이 건들거리듯 노려봤다.

‘쯧.’

곳곳에 몸을 숨긴 병력이 상당했다.

눈앞의 인질들을 구할 수는 있겠으나 많은 소란이 일 것 같았다.

천애랑은 저들을 자극하지 않고 성문을 벗어났다.

드넓은 초원 위에 황군들이 양분되어 천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사이 끝에 전령이 말했던 숲이 보였다.

마치 친절하게 저 숲으로 가라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천애랑은 경계 가득한 시선의 병사들을 지나 숲으로 향했다.

‘하! 이것 봐라.’

숲에 들어선 천애랑은 그만 크게 실소를 뱉을 뻔했다.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미소를 숨겼다.

숲속에는 생사문과 환속진이 섞어진 진법이 펼쳐져 있었는데, 생문과 사문 등 모든 곳에 암살자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진법을 강하게 신뢰했던 것인지 진법 내부를 제외하곤 숲속에 병력조차 배치돼있지 않았다.

천애랑은 뒤를 돌아봤다.

어서 숲속으로 들어가라는 듯 병사들이 눈치를 주고 있었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군.’

천애랑은 표정을 숨긴 채 진법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