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21화
천애랑은 인상을 팍 썼다.
반갑게 올려다보는 팽풍궐과는 다르게 자신은 저 변태 노인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변태영감 그새 더 강해진 것 같네.’
‘괴물 같은 놈. 더한 괴물이 됐구만.’
두 사람은 서로의 경지와 성장을 가늠하며 속으로 감탄을 했다.
천애랑은 팽풍궐과의 격렬했던 전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날 죽을 뻔했지.’
천애랑은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뭘 고민하나. 도망가야지.’
다른 때면 모르겠으나 담가가 위기에 처한 지금, 저 변태 노인과 드잡이할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특히나 저 눈빛을 보니 우연히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분명 나를 찾아온 눈빛이다.’
천애랑은 즉시 환영유령보보를 펼쳤다.
그러자 천애랑의 신형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으음?!”
완벽하게 기척이 사라지는 천애랑을 보며 팽풍궐이 놀란 눈을 했다.
‘내 기감에서 사라지는 은신법이라?’
팽풍궐의 붉은 입술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환영유령보보를 쓴 천애랑은 객잔 방의 창문을 통해 도주를 시작했다.
그 방향은 객잔 밖의 숲이 아닌 마을이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
송소걸에게서 잡다한 지식을 많이 얻은 천애랑이었다.
송소걸의 말에 따르면 사람에겐 고정관념이 있어서 이러한 작전이 잘 먹힌다고 했다.
하지만 천애랑은 이내 인상을 썼다.
마을의 시전은 북적거릴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매우 고요했다.
어두운 공간을 만들어줄 등잔이 없는 꼴이었다.
심지어 마을 건물 곳곳에서 동창의 내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생각보다 많아 천애랑이 도주할 모든 방향을 가릴 정도였다.
‘쳇.’
천애랑은 곧장 허공을 박차고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갔다.
“쫓아라!”
동창의 내시들이 팔다리를 휘적이며 지붕 위로 따라 올랐다.
천애랑은 곧장 지붕에서 지붕으로 내달렸다.
한 마리의 제비가 날 듯 가벼운 천애랑과 달리 비교적 동창내시들은 지붕의 파편들을 날리면서 달렸다.
이는 천애랑과의 상대적인 비교일 뿐, 동창내시들도 상당한 경신법을 구사하는 중이었다.
천애랑은 끈질기게 쫓아오는 동창내시들을 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강한 진각을 밟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파삭!
천애랑의 힘찬 도약에 지붕의 표면이 뜯어지며 크게 비산했다.
동창내시들은 멈칫하며 천애랑이 만든 파편들을 검으로 쳐냈다.
타악!
“뭣?!”
힘없는 파편들에 동창내시들이 인상을 썼다.
천애랑이라는 자가 팽 태감님과 겨룰 정도의 절대고수라고 들은 그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지붕파편들에도 강맹한 내기가 실려 있을 거라고 예측한 것이었다.
헌데 아무것도 아니었다.
괜한 주춤거림으로 천애랑과의 거리가 현격히 벌어지는 결과만 발생했다.
“젠장! 숲으로 간다! 다른 조에 알려!”
삐이이익---!
내시들의 목소리처럼 고성의 피리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천애랑의 미간이 좁혀졌다.
따돌렸다 생각했는데 숲 인근에서 또 다른 동창내시들이 천라지망을 펼치듯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포위망을 구성한 것이라면 그동안 얼마나 조심히 자신을 추적해왔을지 짐작도 안 갔다.
‘하긴 보급부대를 와해시킨다고 소란을 많이 피웠으니.’
추적을 위한 흔적들이야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만약 보급부대를 처치하던 그때 어쭙잖게 나타났다면 손쉽게 도망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때 작정하고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작정하고 온 거야!’
북경에서 동창내시를 죽여서일까 싶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이 정도로 추격을 할지는 몰랐다.
한편, 팽풍궐은 느긋하게 피리소리를 따라 달렸다.
‘이번엔 반드시 잡아서 꼭 내 곁에 둬야지. 그게 아니면 죽이든지.’
천애랑이 들었다면 기겁할 속마음을 품은 채 팽풍궐이 히죽히죽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없는 숲에 도달한 천애랑은 축지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삐익---
삐이익---!
피리 소리와 함께 숲 곳곳에서 동창내시들이 나타났다.
‘작정을 했네. 작정을!’
개인적으로 추적이 실패할 경우를 모두 상정한 듯 동창내시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다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이들이라면 죽더라도 끝끝내 발목을 잡으며 시간을 끌 것 같았다.
천애랑의 눈이 해결책을 찾아 헤맸다.
동창내시들은 천애랑을 행방을 놓치지 않는 데에만 주로 초점이 맞춰진 것인지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거리를 벌린 채 천애랑과 나란히 달리는 모양새였다.
그때 천애랑의 전방에 동창내시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지름길로 쫓아온 팽풍궐이 뒤에서 나타났다.
“요호호! 오랜만인데 그리 매정하게 도망가는 겐가!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천애랑이 인상을 팍 썼다.
그가 느끼기에 참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오묘했다.
그날의 전투에서 덕분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많은 무공의 깨달음과 발전을 얻은 천애랑이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을 죽이려 한 팽풍궐이지만 내심 고마운 마음도 있긴 했다.
그런 이유로 혹여 개인적으로 찾아와 대화를 청한다면 응할 마음이 있었다.
‘다만 지금은 아니지.’
천애랑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번쩍임과 동시에 감각이 빠르게 확장됐다가 다시 빠르게 줄어들었다.
제공권.
수많은 깨달음으로 다져지고 다져진 천애랑의 제공권이 단단하게 천애랑의 주위를 감쌌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천애랑은 허리춤에서 천선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그의 눈이 황금빛으로 번들거렸다.
파지직!
번쩍이는 뇌전과 함께 천애랑은 신형을 돌려 팽풍궐에게 돌진했다.
“흐읍?!”
팽풍궐은 전신의 털이 바짝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오죽했으면 있지도 않는 양물도 바짝 긴장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팽풍궐은 미소를 지으며 전신의 내공을 개방했다.
크게 방출된 내공이 호신강기를 이루듯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감쌌다.
고도로 응축된 내공은 호신강기를 넘어 하나의 제공권을 만들었다.
쿠구구구구!
팽풍궐의 어마막지한 내공을 견디지 못하는 듯 대지와 내무가 비명을 토해냈다.
‘만월과 초월을 가져오면 좋았을 것을.’
팽풍궐이 속으로 아쉬움을 토해냈다.
황실에서의 불편한 눈이 있어 무기를 챙기지 못한 그였다.
그런 아쉬움과는 별개로 어느새 천애랑의 신형이 팽풍궐에게 도달했다.
팽풍궐은 기꺼운 마음으로 천애랑의 공격을 받아냈다.
세상이 멈춘 듯했다.
숲은 조용했고 바깥에서 위치를 지키는 동창내시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는 그들이 움직임을 멈춘 것이 아니라 천애랑과 팽풍궐, 두 사람 간과의 시간선이 다른 탓이었다.
둘은 절대자의 영역에 속한 같은 시간선을 공유했다.
파드득! 까드득!
충돌 직후의 찰나의 순간, 서로 간의 제공권이 서로를 잡아먹듯 격렬한 힘 싸움을 했다.
“크흡?!”
팽풍궐은 이내 놀란 눈을 했다.
아무리 무기가 없다한들 나름 전력을 다해 만든 호신강기와 제공권이었다.
그런데도 이를 뚫고 천애랑의 손이 들어오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팽풍궐은 다급히 손을 휘둘러 천애랑에게 탄지공을 날렸다.
천애랑의 움직임을 제한할 생각으로 얼굴에 가한 공격이었다.
파라락!
그때 천애랑의 손에 들린 천선이 활짝 펴지며 천애랑의 얼굴을 보했다.
마치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부채의 움직임이었다.
“......?!”
팽풍궐이 놀란 눈을 하는 찰나 천애랑의 신형이 결국 팽풍궐의 품에 파고들길 성공했다.
이어서 일점에 모인 천애랑의 정권이 그대로 팽풍궐의 명치에 꽂혔다.
빠아아악---!
다소 경쾌한 소리와 함께 팽풍궐의 신형이 산 아래로 멀리 날아갔다.
둘의 제공권이 사라지고 나자 숲속의 고요함이 사라졌다.
“태감님!”
지켜보던 동창내시들이 눈앞의 결과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동창내시들의 시선이 우두커니 서있는 천애랑에게로 모였다.
그들이 인식한 것은 극한의 속도와 극강의 내공으로 천애랑과 팽풍궐이 충돌한 것뿐이었다.
팽풍궐을 수행하는 동창 무인들이기에 그들의 수준은 결코 낮진 않았다.
당장이라도 이 인원으로 움직인다면 어지간한 무림문파를 멸문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런 자신들임에도 두 절대자의 격돌을 단순하게밖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이에 천애랑을 둘러싼 동창내시들이 천애랑을 경외의 눈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팽풍궐, 즉 팽 태감은 황제보다 더 위대한 절대자였다.
그런 팽풍궐을 일격에 날려버린 천애랑은 단순히 젊고 강하다는 수식어로만 인식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간 팽 태감님이 왜 천애랑에게 집착을 하는지 몰랐으나 직접 눈으로 마주하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팽 태감이 쓰러진 지금, 천애랑을 굳이 억압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그러할 능력이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팽풍궐을 날려버린 천애랑은 작은 상념 속에 있었다.
팽풍궐의 탄지공이 얼굴로 날아올 때 느꼈던 천선의 자발적 움직임.
신부합일이라고 말했던 팽풍궐의 말이 떠올라 내심 놀라는 중이었었다.
그러나 그의 상념은 길지 못했다.
끈적한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천애랑은 주위를 둘러봤다.
‘뭐, 뭐야? 눈빛들이 왜 이래?’
주변을 둘러싼 수십의 동창내시들이 팽풍궐과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거기가 없는 놈들은 이상해!’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며 천애랑은 신형을 날렸다.
언제 팽풍궐이 쫓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 자리를 피해야 했다.
‘앞을 가로막는 내시들만 돌파하면 되겠지. 음?’
신형을 날리려던 천애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앞에 길이 열렸다. 내시들이 먼저 길을 터준 것이었다.
공격의사가 없다는 듯 멀찍이 물러난 내시들은 그저 흐뭇한 미소로 천애랑을 쳐다볼 뿐이었다.
천애랑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그는 동창내시들의 포위망을 탈출하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없는 놈들이랑은 다시는 상종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강자와의 전투가 즐겁다고 하지만 이렇게 찝찝해서야 쓰겠나.
천애랑은 치를 떨며 극성으로 축지법을 펼쳤다.
***
담하웅은 몰아치는 황실군을 보며 다급히 소리쳤다.
“버텨라! 화살을 퍼 부어라! 화살이 없다면 돌을 던지고, 뜨거운 기름을 부어라!”
담하웅의 표정이 슬픔에 썩어 들어갔다.
성벽을 오르는 저들은 엄밀히 따지면 황실군이 아닌 무고한 민간인들이었다.
어디서 강제징용을 당한 것인지 모르나, 아무런 보호구도 입지 않은 이들이 성벽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아비일 테고, 누군가의 아들일 저들은 황실의 권력 앞에서 그저 화살과 체력을 뺏을 소모품이 되어버렸다.
“흔들리지 말아라! 우리의 뒤에는 우리만 믿고 있는 가족들이 있다! 혼신을 다해 적들을 물리쳐라!”
담하웅은 악에 받친 명령을 내렸다.
저들이 딱하다 한들 자신들이 사정을 봐줄 처지가 아니었다.
특히나 자신은 전쟁의 슬픔과 전쟁의 비정함을 논할 나이도 직급도 아니었다.
그저 충실히 내 사람들을 지킬 뿐이었다.
담하웅은 성벽 너머 황실군의 진형을 바라봤다.
장수들로 보이는 이들의 비릿한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버텨야 한다. 버티고 버텨야 내 사람들과 내 아들이 산다.’
어딘가에서 황실군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아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천 가주 덕분에 이 주일은 벌었는가.’
천 가주가 보내준 수급 덕분에 며칠은 전쟁이 소강상태였다.
심지어 두 개의 수급이 추가로 도착해서 더 효과적으로 전쟁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황실군의 내부수습은 생각보다 빨랐다.
다시 공세를 펼치는 황실군은 민간인을 앞세우는 비정한 방법으로 거친 공격을 펼쳐왔다.
적진을 살피던 담하웅은 눈을 좁혔다.
멀리서 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조금은 이상했다.
담하웅은 눈에 안력을 돋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민간인들이 말 위에 묶여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몸엔 가죽으로 된 갑주와 함께 무언가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담하웅의 눈이 놀라움에 더할 수 없이 커졌다.
“이, 이런! 모두 폭발에 대비하라!”
말을 탄 민간인들의 몸엔 황실군의 폭약이 달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