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16화
한참 말을 몰아 달리던 천애랑은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꼈다.
‘뭐, 뭐지?’
동창 내시들의 음기를 맞은 기억이 없는데 마치 음기에 적중당한 듯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나저나.’
천애랑은 전방을 보았다.
북경과 천진 사이, 작은 마을이 화마에 휩싸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소란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천애랑은 말을 몰아 마을 가까이 다가갔다.
도적떼가 마을을 약탈하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황군?’
누런 갑주를 입은 황실군이 남자들을 강제적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 옆에는 끌려가는 남편이나 아들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여인들이 있었다.
퍽!
소리치던 한 노파가 군인이 휘두른 창에 머리를 맞고선 그대로 쓰러졌다.
“어머니!”
군인에게 붙잡힌 사내가 버둥거리며 크게 외쳤다.
젊은 여인은 울음 범벅의 얼굴로 노파에게 기어갔다.
이에 군인이 다시금 창을 휘둘러 여인마저 공격하려 했다.
“아, 안 돼!”
사내의 비명이 휘둘러지는 창을 무기력하게 붙잡는 찰나.
천애랑은 인상을 쓰며 다급히 손을 뻗었다.
후우웅!
군인의 창이 궤적에서 벗어나 땅바닥을 찍었다.
깜짝 놀란 군인이 창대에서 천애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빠가악!
어느새 다가온 천애랑의 주먹이 군인의 투구와 안면을 함께 으스러뜨리며 날려 보냈다.
쿠당탕!
날아가는 군인을 따라 한 손에 붙잡혀 있던 사내도 구르면서 날아갔다.
“……?!”
눈물을 흘리던 젊은 여인이 놀란 눈으로 천애랑을 올려다봤다.
“잠시.”
천애랑은 젊은 여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노파를 살펴봤다.
기품 넘치는 천애랑의 자태에 여인이 엉겁결 살짝 비켜났다.
‘다행히도 충격에 기절한 거군.’
천애랑은 이러한 사실을 여인에게 말해줬다.
그러자 여인이 생명의 은인을 대하듯 극진하게 절을 했다.
어느새 다가온 사내도 피와 흙이 범벅이 된 채로 천애랑에게 절을 했다.
천애랑은 이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 넘기며 시선을 돌렸다.
이 와중에도 마을 곳곳에선 비명이 계속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 은공의…….”
천애랑에게 구함을 받은 부부가 노파를 챙기며 입을 열었지만 말을 이을 순 없었다.
순식간에 천애랑의 신형이 멀어졌다.
천애랑은 몇 개의 시신을 넘으며 마을 중심지에 모인 병사들을 보았다.
“아,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
10살도 채 되지 않은 남아를 낚아채는 탓에 어미 되는 여인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사정을 하고 있었다.
이에 군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발차기를 해 여인을 떨쳐냈다.
“감히 황군의 행사를 막아?!”
군인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대로 여인을 일도양단해 기강을 바로 세울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 무슨?!”
어느새 다가온 천애랑이 군인의 팔을 휘감더니 검을 뺏어 들었다. 갑주가 철그덕 거렸다.
“아악! 잠시!”
군인이 죽음이라는 직감 앞에서 다급히 외쳤다.
푸욱!
하지만 천애랑은 가차 없이 군인의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인근에 있던 군인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천애랑은 그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겨 뻗었다.
위력보단 빠른 출수에 중점을 둔 탄지공이었다.
하지만 고강한 내공을 가진 천애랑이다보니 이러한 속탄도 군인들에겐 상당한 위력을 선사했다.
“커억!”
“큭!”
군인들이 고통에 무릎을 꿇었다.
갑주를 입은 덕에 치명상을 피했지만 순간적인 충격에 가쁜 호흡을 내뱉는 중이었다.
천애랑은 차가운 눈빛으로 군인들에게 다가갔다.
***
천애랑은 군인들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사라져도 상관없을 마을의 남자들을 강제징용하고 있다고?’
북경이나 천진 같이 대도시의 인력을 건들진 않으나 이렇듯 작은 마을은 약탈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했다.
남자들은 끌고 가 전쟁의 선봉에서 인간방패로 쓰고, 식량 또한 약탈해 군량미를 보충한다 했다.
‘개자식들.’
으득.
천애랑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황실군의 행태에 이가 갈렸다.
이 마을은 자신이 운 좋게 지나가는 곳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곳은 이러한 약탈을 겪고 있을 거란 소리가 아닌가.
천애랑은 심호흡을 하며 빠르게 평정심을 찾았다.
이러한 약탈보다 더 중요한 정보를 상기시켰다.
‘보급로.’
수만의 병력을 책임질 군량의 보급로 중 한 곳을 알 수 있었다.
“중요한 정보를 말씀드렸으니 저는 사, 살려 주시는 겁니까?”
천애랑의 발치에 제압된 군인이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천애랑은 근처에 있는 검을 들어 고민도 없이 군인의 심장을 찔렀다.
푸욱!
갑주를 뚫고 들어온 검에 병사의 고개가 추욱 쳐졌다.
마을의 주민들이 한곳에 모여 천애랑의 하는 양을 지켜봤다.
황군의 병사들을 향한 천애랑의 가차 없는 손속에 몇몇 주민들은 아이들의 눈을 가리며 시선을 피해고, 다수의 주민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이곳의 모든 군인들을 처리한 천애랑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마을의 대표로 보이는 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대협의 큰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많은 생명이 구함 받았습니다.”
노인이 천애랑에게 깊게 절을 했다. 노인은 뼈만 앙상했다.
나름 옷에 가려져서 그렇지 다른 마을 주민들도 노인과 마찬가지로 삐쩍 말라 있었다.
영양상태가 매우 부족하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민생이 매우 곤궁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천애랑은 입 안이 썼다.
“운이 좋았을 뿐이오. 일어나시오.”
천애랑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여비였다.
“어, 어찌……?”
노인은 천애랑이 강제적으로 쥐여준 주머니를 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천애랑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을 주민들을 챙겨서 몸을 보하시오. 다들 너무나 말랐소.”
노인의 마른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뚜욱 떨어졌다.
“대협…….”
뒤에서 지켜보던 마을주민들도 천애랑의 의협에 눈물을 흘렸다.
항상 느끼지만 천애랑은 이런 상황이 꽤나 민망했다.
지금과 같은 행동이 측은지심에서 이뤄지는 것은 맞았다.
다만 과거 담대혁과의 대화처럼 선행으로 살업을 희석시키는, 지극히 개인적인 위로행위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노인과 마을주민들처럼 과한 감동을 표현하는 이들을 보면 민망함을 피할 수 없었다.
천애랑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도망치시오. 현재 황군이 전쟁을 위해 남하했소. 짐작기로 지원군이 뒤따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으며 그 과정에서 오늘과 같은 일이 이 마을에 다시없을 거라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소.”
노인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을주민들도 눈물을 흘리며 노인처럼 감사를 표했다.
천애랑은 대충 손사래를 쳤다.
“그럼.”
상황이 정리됐으니 떠나고자 했다.
그때 노인이 허겁지겁 천애랑의 앞을 막으며 발걸음을 붙잡았다.
“대, 대협의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굳이…….”
거절하려던 천애랑은 퀭한 눈에 한가득 눈물을 머금은 노인을 보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천애랑이오.”
“아!”
노인과 마을주민들이 짧은 감탄과 함께 그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듯 중얼거리며 되뇌었다.
천애랑은 노인에게 살짝 고개를 까딱이곤 멀찍이서 풀을 뜯는 준마로 향했다.
“은공! 감사합니다!”
“천 대협!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천애랑은 낯 간지럽게 외치는 이들에게 더는 시선을 주지 않고 말허리를 박찼다.
“가자!”
히이잉!
천애랑이 탄 말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내달렸다.
***
천애랑은 천진에서 황화를 지나 산동으로 가려던 계획을 틀었다. 그러곤 곧장 청현으로 향했다.
천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에 있는 곳으로 산동으로 갈 수 있는 여러 길 중 하나였다.
청현으로 향한 이유는 이곳이 보급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앞서 군인들에게 얻은 정보에 따르면 조만간 보급이 이곳을 지날 것이라 했다.
‘저기군.’
천애랑은 작은 나무숲에서 청현의 일부와 인근의 지형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상당한 너비의 나무다리들이 있었다.
청현은 강이 많이 지나가는 곳이었고, 특히나 동서방향으로는 바다로 흐르는 강줄기가 모인 곳이었다.
그래서 북에서 남으로 향할 땐 강 위에 놓인 다리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인근 나무에 말을 묶은 천애랑은 조심히 다리를 관찰했다.
보급로로 이용될 다리를 특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보급부대의 선발대인지 수십 명의 병사들이 미리 답사를 하며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민간인들은 병사들의 날 선 시선에 목을 움츠리며 종종걸음으로 피해갔다.
천애랑은 저물어가는 해를 보았다.
석양이 길게 드리우며 강물에 비쳤다.
어지러운 세상과는 다르게 석양을 머금은 강은 아름다움을 출렁이며 총천연색 공연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장춘몽의 꿈인 듯 석양과 강의 공연은 빠르게 어둠에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이에 귀가가 늦은 사람들은 어둠에 쫓기듯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병사들은 횃대에 불을 붙이며 경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한 어두움이 내려앉았다.
기다림 끝에 천애랑이 몸을 일으켰다.
“얌전히 있어라.”
천애랑은 조용히 풀을 뜯는 두 마리의 말을 쓰다듬었다.
대자연의 기가 소통하는 천애랑의 손길에 말들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천애랑은 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옮겼다.
강 위에 놓인 다리들.
은폐할 공간이 없는 다리 주위의 너른 벌판.
이 모든 곳을 배회하며 순찰, 경계하는 병사들.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천애랑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환영유령보보.
천애랑의 보법이 하나하나 쌓여가면서 그의 신형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수풀 속 찌르레기도, 작은 풀벌레들도 천애랑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완벽한 어둠이 된 천애랑은 곧장 외곽의 병사에게 향했다.
2인 1조로 구성된 순찰조였다.
“십부장은 대체 위험할 것이 뭐가 있다고 이리 유난인 건지.”
“무려 황군 정예의 보급이잖냐. 유난할 만하지.”
병사들의 잡담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천애랑은 그들에게 귀신처럼 다가갔다.
“그런데 담가가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황군이 직접 나서는 거야?”
말을 한 병사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의아한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응? 뭐야? 이놈 어디갔…. 읍!”
부욱!
내부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천애랑의 귓가에 작게 들려왔다.
조용한 암살을 위해 병사의 입을 막음과 동시에 심장에 침투경을 날린 것이었다.
“…….”
천애랑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멀찍이서 일렁이는 횃불만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듯했다.
천애랑은 쓰러진 병사의 손에 있는 횃불을 껐다.
그러곤 두 병사의 시신을 숲으로 조용히 끌고 갔다.
‘역시나 오는군.’
적막과도 같은 어둠과 침묵에 의아함을 느낀 순찰조 하나가 숲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앞선 순찰조의 횃불이 보이지 않기에 이를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천애랑은 또다시 환영유령보보를 펼치며 다가오는 순찰조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