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14화
다채로운 공격을 보는 재미는 있었다.
하지만 모두 투박했고 위력적이지도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느렸다.
‘하춘의 침술이 더 빠르고 날카롭다.’
천애랑은 그저 한 보를 움직임으로 검을 피해냈다. 그러곤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춘석의 공격이 더 묵직해.’
마찬가지로 공격을 피하며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설동의 공격이 더 변칙적이야.’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리고 의각원생들의 합공보다 위기감이 있지도 않아.’
모든 공격을 마주한 천애랑은 지루한 감정을 털어내듯 마저 손가락을 털어냈다.
태대대대댕!
경쾌한 날붙이의 튕김 소리와 함께 천애랑을 공격하던 이들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닫지 못한 채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무기가 사라져 있었다.
놀라움에 행동을 멈춘 이들을 보며 천애랑이 말했다.
“경고다. 더 귀찮게 하면 더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다. 시험해 보고 싶다면 말리지 않지.”
천애랑은 슬며시 살기를 흘렸다.
“크, 크윽!”
천애랑을 공격했던 이들이 처음 경험하는 강도의 살기를 느끼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몇몇은 게거품을 물며 기절을 했다.
‘아?’
천애랑이 놀란 눈으로 급히 살기를 거뒀다.
의각원 훈련생들을 기준으로 내비친 살기였다.
내심 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듯했다.
구경꾼들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른 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확실히 느꼈다.
강하다!
저 학사처럼 호리호리해 보이는 흑의폭군이라는 자는 강하다!
“대, 대단하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름이라니!”
“그 많은 수의 협공을 단 일수에?!”
“팽가보다 강한 거 아니야?”
사람들이 환호를 했다.
몇몇은 북경의 명문인 하북팽가의 무인이랑 비교까지 했다.
사람들의 환호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인들의 시대이지만 막상 또 무인들 간의 비무를 보기 힘든 것이 일반인들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멋들어지게 끝난 비무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험한 정세 속에서 어깨를 움츠리던 이들에게 지금의 비무는 하나의 대리만족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 즐겁게 환호를 했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즐겁게 해준 천애랑을 찾기 위해 시선을 모았다.
그러나 천애랑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
“어어?”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며 사라진 천애랑을 찾았다.
“언제 사라졌지?”
“뭐야 어디로 갔어?”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몇몇이 눈을 빛내고는 사라졌다.
인파를 빠져나온 천애랑은 곧장 객잔으로 향했다.
‘후우.’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인파 속에 숨어 있는 몇 시선들이 유독 신경이 쓰였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서 오십쇼!”
상당한 규모의 객잔을 들어서자 어린 점소이가 초상비를 펼치듯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추위를 피해 개미가 모였다네.”
천애랑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그러자 점소이가 반색을 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역시 북경의 객잔은 남다른지 2층부터는 모두 방으로 되어 있었다.
‘고관대작들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 많이 애용한다더니.’
다소 대화에 비밀이 필요한 이들이 이렇게 방이 딸린 객잔을 애용했다.
특히나 이곳 객잔은 벽이 두꺼워 방음에 탁월했기에 더욱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천애랑은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가장 높고, 안쪽에 위치한 방에 들어갔다.
그곳은 빈방이 아니었다.
창밖을 보던 중년의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요.”
마치 천애랑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는 듯 여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천애랑은 방 안을 살폈다.
일반적인 객잔이나 주루의 방처럼 꾸며져 있지 않았다.
‘객잔이 아니라 마치 집무실 같네.’
담가에 있을 때 잠시 봤던 담가주의 집무실 느낌.
벽을 둘러 각종 서류와 가재도구들이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다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여인이 먼저 자리로 가 살포시 의자에 앉았다.
치마가 붕 뜨듯 펄럭이며 수북하게 펼쳐져 내렸다.
천애랑도 여인과 마주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미리 준비가 된 듯 적절한 온도의 차가 내어져 왔다.
“내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하오?”
“시전에서 그리 화려하게 나타나시니 모를 리가요.”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잔주름이 진 중년의 나이임에도 상당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천애랑은 수긍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현재 담가와 황군의 상황을 알고 싶은데 정보가 있소?”
“잠시.”
여인이 천애랑을 안내해 온 점소이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기립해있던 점소이가 읍을 하고선 방문을 닫고 나갔다.
‘은신한 이들도 물리는가.’
여인의 손짓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천장 곳곳에 은신해 있던 이들도 거리를 벌렸다.
천애랑이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천 가주님의 눈을 속일 순 없네요.”
천애랑은 대답 대신 연기를 날리듯 손을 저었다.
“기막을 펼쳤소. 대화가 새어나갈 위험은 없으니 편히 말하시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수신호위를 물릴 필욘 없었겠네요.”
여인이 입을 가리고 놀란 눈을 했다.
천애랑은 옅게 웃었다. 여인이 연기를 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자신을 배려하고, 예를 차리고자 함임을 알기에 기분 좋게 넘어갔다.
천애랑이 별다른 미동 없이 기다리자 여인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선 말을 시작했다.
“북경에서 담가로 황군 5만이 진격을 했다고 합니다.”
“흐음.”
천애랑이 침음을 흘렸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그 숫자가 많았다.
담가가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천애랑의 걱정이 이어진 여인의 말에 더욱 커졌다.
“황군은 지금 천진을 지나 남하 중인 것으로 파악되며, 진격 중 병사들이 계속 합류할 듯합니다. 지금도 병사들이 합류 중이며 담가에 도착했을 땐 적게는 8만, 많게는 10만의 병사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습니다.”
“으음…….”
천애랑이 팔짱을 끼며 고민을 했다.
5만도 엄청난 숫자였는데 더욱 늘어난 숫자에 황실이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정보는 없소?”
천애랑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음을 던졌고, 이에 여인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잠시 고민했다.
“죄송합니다. 이 외에 별다른 건 없네요.”
극히 미안한 표정을 짓는 여인을 향해 천애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시렵니까?”
여인이 덩달아 일어났다.
“황군이 벌써 천진을 지났다 하니 빠르게 뒤쫓아야 하지 않겠소.”
“그렇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직원들에게 일러 육포 등 간단한 물품들을 준비시키겠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알겠소.”
***
천애랑은 객잔 뒤편에서 점소이가 건네는 것들을 물끄러미 봤다.
간단한 물품이라기엔 너무 과하다 싶은 구성들이었다.
“급히 준비하느라 미흡합니다.”
점소이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천애랑은 절로 실소가 나왔다.
“매우 충분하오.”
괜찮다는 말에 안도했을까. 점소이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천애랑은 모르지만 그는 하오문 내부에서 정한 최상등급의 손님 중 하나였다.
이는 소문주와도 대등한 등급이었기에 천애랑을 대하는 하오문도의 태도가 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기 준마 두 필과 최고급 육포, 그리고 물 등입니다.”
점소이가 고삐를 내어준 준마는 특별한 소개가 없어도 좋은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당한 덩치에 어찌나 관리를 잘했는지 털의 윤기가 자르르했다.
그리고 식량을 담은 보자기는 최고급 비단으로 몇 겹을 둘러싸여 있었다.
물가를 잘 모르는 천애랑이지만 눈앞의 것들이 범상치 않음은 알 수 있었다.
“고맙다고 전해주시오.”
“어휴! 제게 그리 말을 높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점소이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내심 기분이 좋아보였다.
천애랑은 적당히 점소이를 일별하고 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객잔 내부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
영문을 모르는 천애랑과 점소이가 의문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내 둘은 객잔 뒷문을 열고 빠끔히 내부에 시선을 던졌다.
둘의 시선에 잡힌 객잔 1층 내부엔 동일한 복색을 한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남자였는데, 노인처럼 가득 주름진 얼굴엔 분칠이 되어 있었다.
“동창에서… 왜?”
점소이가 놀란 눈을 했다.
동창은 황실의 내시들이 모인 집단 중 무력을 가진 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천애랑은 청력에 집중했다. 그러자 내부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이곳에 흑의폭군인가 하는 이가 방문했음을 안다!”
“그자만 찾는다면 조용히 물러갈 터이다! 모두 협조해라!”
사내치고는 얇은 고성이 객잔 내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천애랑은 미간을 좁혔다.
저들이 자신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시전에서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관군이 와야지. 동창이 나설 일은 아니다.’
동창의 내시가 다시금 크게 소리를 쳤다.
“순순히 나타나 협조해라! 만약 네놈이 나타나지 않고 숨는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을 잡아 고문해 볼 수밖에!”
객잔 사람들이 두려움에 웅성거렸다.
흑의폭군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은 억울함과 두려움에 한껏 몸을 움츠렸다.
그때 천애랑의 머리 위로 작은 종이가 펄럭이며 떨어져 내렸다.
천애랑을 응대했던 중년 여인의 서신이었다.
천애랑은 재빠르게 종이를 펼쳐 읽었다.
[도망치세요. 제가 적절히 상대하겠습니다. 어떤 연유가 있는지는 모르나 동창에게 잡혀간다면 많은 시간을 소모할 터. 귀공의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북경에서 동창을 공격하면 역적으로 수배될 수도 있습니다.]
천애랑이 종이를 읽음과 동시에 중년의 여인이 1층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동창 내시들을 향해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읍을 했다.
“동창의 어르신들을 뵈어 영광입니다. 이곳 객잔의 주인이 귀인들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동창의 인물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여인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이곳의 주인이 이렇게 기품 넘치는 여인일 줄은 몰랐구만.”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인은 침착하게 동창의 인물을 상대했다.
그 모습에 동창의 인물이 흥미를 잃은 듯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이곳으로 흑의폭군이 들어감을 봤다. 그자를 데리고 오거라.”
“죄송합니다. 소인이 견문이 짧아 흑의폭군이 누구인지 모르는 터라…….”
여인의 말에 동창의 인물이 꿈틀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주인과 마찬가지로 흑의폭군이 누군지 모르는 이들이 많은 기색이었다.
“크흠. 하긴 너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견문이 짧은 건 당연한 거지.”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사람을 개미 보듯 하는 동창의 시선에 누군가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학사의 복색을 한 사내였다.
이에 객잔 여주인을 상대하던 동창의 인물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다른 동창의 인물이 검을 뽑아 학사에게 휘둘렀다.
“크악!”
학사의 손이 아무렇게나 잘려 식탁 위에 툭 떨어졌다.
“흐익!”
“히이익!”
갑작스런 사태에 객잔 내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숨을 죽였다.
동창의 내시가 피가 묻은 검을 든 채 희번득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한순간에 공포로 잠식된 객잔의 분위기에 여주인이 얕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내 신색을 회복하고는 침착한 태도를 고수했다.
동창의 인물은 이런 공포 분위기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무조건 흑의폭군이라는 자를 찾아야 한다네. 똑똑해 보이는 여주인은 협조를 해주겠지?”
“죄송합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흑의폭군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시가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문지르며 여인을 관찰했다.
그러곤 말했다.
“금색 수실이 놓인 흑색 무복의 젊은 사내. 검은 장단발의 머리에 매우 잘생긴 외모. 그리고 이름은 천애랑.”
침착함을 유지하던 여인의 표정이 내시의 마지막 말에 움찔거렸다.
여인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빠르게 표정을 관리했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동창의 내시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여인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아는군.”
뭐라 대답하려던 여주인은 대답 대신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꺄악!”
툭.
가차 없이 휘두른 내시의 검에 여인의 왼팔이 잘려 떨어졌다.
“점장님!”
이에 천애랑 옆에 있던 점소이가 놀란 눈을 하고 뛰어갔다.
점소이는 빠르게 자신의 옷을 찢고선 여인의 잘린 부위를 지혈했다.
그러나 출혈량이 많아 지혈을 하는 점소이의 옷이 빨간 피로 가득 물들었다.
객잔 손님들 중엔 적절한 지혈을 할 수 있는 무림인도 있었으나 그는 피비린내 나는 살풍경함에 침묵을 선택했다.
“감히 동창을 농락했기에 작은 벌을 내린 것이다. 다만 우리가 찾고자 하는 이를 그대가 숨겼다는 증거는 없으니 나름의 배려를 했다.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으윽.”
내시의 비릿한 미소 앞에서 여인은 고통스런 신음을 참을 뿐이었다.
그녀는 점소이에게 의지한 채 간신히 의식의 끈을 잡고 있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과다출혈로 죽을 것만 같았다.
“후우.”
천애랑은 차가운 숨을 폐부에서 길게 뱉어냈다.
‘하오문과는 맹우의 맹세를 한 사이.’
그게 아니더라도 어찌 저 상황을 보고 모른 척한단 말인가.
저대로 두고 떠난다면 분명 더 많은 피해가 있을 터였다.
‘뭘 고민했더냐.’
천애랑은 자신의 굼떴던 행동을 자책했다.
“흑의폭군 천애랑은 모습을 드러내라!”
내시의 외침과 함께 천애랑은 신형을 날렸다.
쿠루릉!
뇌성이 울리며 섬전 같은 번쩍임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