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11화
산동성 제남.
산동성 내 가장 큰 도시이자 산동성을 다스리는 성주가 거하는 곳.
여름이 다가옴을 알리는 푸르른 나무들이 높은 담장을 둘러 아름답게 꾸며진 곳.
경비병에 둘러싸인 성주의 장원 안에서 성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담 가주.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유약한 성주의 신형이 놀라움과 두려움에 휘청거렸다.
생전 운동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것 같은 가는 팔다리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성주는 다급히 가까운 기둥을 잡아 기댔다.
그의 시선이 장원을 둘러싼 담가의 병사들에게 향했다.
자신의 병사들은 이미 제압된 상태였고 주위엔 모두 담가의 사병들뿐이었다.
“내가 무언가 섭섭하게 한 것이 있던가?”
말을 하는 성주의 목소리가 작게 사라졌다.
살기등등한 병사들의 기세에 절로 목이 움츠러든 것이었다.
유약하고 황권과 거리가 먼 황족이기에 산동성의 성주가 된 그는 괜한 실수로 죽지 않기 위해 그간 조심하며 살아왔다.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힘 있는 가문이나 상단들과의 교류도 대외적으론 자제했다.
이러한 모든 행위들이 황실에 대한 도전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나마 비공식적으로 암암리에 교류를 하는 몇이 존재했는데 그중 한 명이 산동담가의 담 가주였다.
두 사람은 술이나 차를 마시며 시를 읊는 취미가 같아 꽤나 오랜 기간 관계를 이어왔다.
성주는 내심 담 가주와는 평생 함께 갈 죽마고우와 같은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성주는 담 가주의 작금 행태에 당혹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성주를 가만히 지켜보던 담 가주가 입을 열었다.
“성주. 한낱 지렁이도, 늑대에게 잡힌 사슴도 살기 위해선 크게 몸부림치는 법이오.”
담 가주가 말을 이었다.
“또한 한낱 새도 자식을 지키기 위해선 뱀에게 부리를 쪼는 법이올시다.”
담 가주의 말에 성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황실이 가장 두려운 만큼 황실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주시해온 그였다.
그래서 가장 최근 황실에서 자신들에 반하는 세력들을 직접 벌할 것이라는 말이 나왔고, 그 대상 중 하나가 담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협조공문이 불과 한 시진(2시간) 전에 자신에게 도착했었다.
그런데 담 가주는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행동한단 말인가.
성주는 더욱 두려운 눈빛으로 눈앞의 담 가주를 보았다.
담가의 정보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결단의 칼을 뽑아 들었으니 자신의 목숨은 풍전등화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나를 어찌하려는가…….”
성주가 무의식중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디로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에 절로 몸이 움직였다.
이에 담 가주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남의 모든 군권을 넘기고 인질이 되시오. 얌전히만 있는다면 그간의 정을 생각하여 목숨과 편의를 보장하겠소.”
성주의 눈이 흔들렸다.
죽음이 가장 두려운 그이기에 지금의 제안이 솔깃했다.
다만 황실과 담가의 전쟁이 어떤 추이를 보일지 모르기에 걱정이 앞섰다.
“아니면 그냥 죽음을 받으시려오? 황실을 위해 저항하다 장렬히 전사했다고 내 말해주겠소.”
살기가 짙어지는 담 가주의 스산한 목소리에 성주의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저항하면 담 가주에게 죽고, 저항하지 않으면 어차피 황실에서 죽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살 가능성이 있는 쪽에 목숨을 거는 것이 낫다 싶었다.
“아, 알겠네! 부디 살려주게! 그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가.”
쉽게 꼬리를 마는 성주를 보며 담 가주는 쓴 미소를 지었다.
이젠 진정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넘 셈이다.
천하는 격변할 것이며 자신들은 그 과정에서 최대한 버틸 요량이었다.
그러다 보면, 그리고 운이 좋다면 자신은 죽을지언정 담가라는 가문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제아무리 담가의 사병이 많다 한들 상대는 무려 황실이다.
말과 화살로 천하를 차지한 최정예가 모인 곳.
그런 곳에서 자신들을 처치하기 위해 수만의 병사들을 보냈단다.
제남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군권과 나름의 성벽이 있다지만 이는 이란격석(以卵擊石)이었다.
즉, 계란으로 바위 치듯 그 한계가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할 수밖에.’
담 가주 담하웅은 의지 가득한 두 눈을 빛냈다.
***
성주에게서 전권을 이양받은 담하웅은 곧장 다음 행선지로 걸음을 옮겼다.
제갈세가.
산동의 오래된 명가 중 그 역사와 규모가 매우 거대한 곳이며 담가와 함께 제남에서 영향력이 높은 가문.
평소 학문과 진법 등에 대한 정보교류들을 해왔던 터라 담 가주의 방문은 큰 저항을 받진 않았다.
다만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청은 부재중이었기에 대신 그 아들인 제갈후산이 담 가주를 맞이했다.
“명망 높은 담 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갈후산이라고 합니다. 현재 아버님께선 부재중이신지라 제가 나서니 용건이 있으시다면 제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갈후산이 귀품 넘치는 태도로 정중히 인사를 하자 담하웅은 빠르게 제갈후산을 관찰했다.
다소 호리한 체격이지만 나름 무공을 꾸준히 익혔는지 그 경지가 제법이었고, 그에 따른 남자다움이 풍겨왔다.
그런데 이보다 더 뛰어나 보이는 것은 제갈후산의 눈빛이었다.
산전수전 겪어 노회한 이들에게서 보이는 깊고 탁한 황하물이 아닌 끝없이 흐르는 맑은 냇물 같았다.
이는 공자가 말한 이립(而立)의 표본과 같았다.
마음이 확고히 서서 도덕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학자로 나섰다면 필히 대성할 눈빛이자 관상이었다.
“담하웅일세. 이리 헌앙한 것을 보니 제갈 가주가 참으로 든든하겠구만. 제갈가의 홍복일세.”
“과찬이십니다. 이리 자리하시지요.”
적당히 자리를 한 둘은 의례대화들을 나누며 차를 나눴다.
어느 정도 형식을 나누었다 생각한 담하웅이 본론을 꺼냈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그러시지요.”
“담가는 황실군과 맞서 싸울 것이네. 이에 대해 제갈세가가 도움을 줬으면 좋겠구만.”
“…….”
제갈후산이 덤덤하게 차를 홀짝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 때문에 가문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무림맹이 황실과 반하는 주원장의 부대에 지원을 하고 있다지만 이는 대외적으로 비밀인 사안이었다.
대외적인 변명으로는 주원장을 돕는 무림인들은 모두 개개인의 출세욕에 따른 행동들로 규정하고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일 수 있는 행동이지만 황실과 직접적으로 척지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무림맹의 꼼수였다.
그렇기에 현 상황에서 황실이 제갈세가에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할 명분이 적었다.
특히 마교가 격동함에 따라 무림맹이 바빠진 지금, 황실이라는 크디큰 불편함이 직접적인 영향으로 다가오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이러한 고민을 알 듯 담하웅이 품에서 도장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옥에 작은 용이 조각되어있었다.
황금용이 새겨진 옥새가 아닌 성주들 전용의 도장이었다.
이를 알아본 제갈후산의 눈이 커졌다.
“알아보니 말하기 편하겠군. 금일부로 담가가 산동성주의 전권을 이양받았네. 현실적으로 산동성 전체에 대한 통제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제남은 통제 가능할 것이네.”
“그렇겠습니다.”
제갈후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란 황실의 황제를 대신해 각 지역을 다스리는 대변인이다.
즉 성주의 명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있어서 곧 황제의 명과 같았다.
그러다 보니 산동성주의 도장이라면 최소 제남 안에 거하는 모든 세력들이 명을 따를 것이었다.
명령에 대한 진위여부를 파악하는 등의 일은 불경하다 여겨지기에 거의 없을 것이었다.
즉, 저 도장으로 당장 제남에서 많은 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담하웅이 품에서 하나의 교지를 꺼냈다.
제갈후산은 이를 공손히 받았다.
분명 저 도장이 찍힌 산동성주의 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내 교지를 펼친 제갈후산은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내용은 간단했다.
“제갈세가의 병사들을 한시적으로 빌리겠다는 산동성주의…, 명인 겁니까?”
담하웅이 고갤 끄덕였다.
“그대들이 자발적으로 도와준다면 고맙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엔 강제적으로 전쟁에 참여시킬 생각은 없다네. 자네라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
“혹 추후에 있을 황실의 명을 회피할 명분을 만들어 주시는 겁니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제갈후산의 되물음에 담하웅이 미소를 지었다.
“맞네. 지금 제갈가는 남궁가와의 전쟁으로 상당한 곤욕을 치렀지 않은가. 자네들은 이 교지를 황실을 명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따랐으며, 이에 무인들을 보냈다가 인질로 잡혔다고 하세.”
“……이해했습니다.”
제갈후산은 다탁을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제남에 도착한 황실군이 제갈세가에 지원요청을 명한다면 가문은 그렇게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시늉이라도 피해는 따를 터.
배수의 진을 친 지금의 담가라면 그 피해가 더 커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반대로 담가를 지원해 황군과 맞서자니 대놓고 반역인지라 그 판단이 심히 중했다.
그런데 담 가주는 그러한 고민의 짐을 덜어준 것이다.
남궁세가와의 전쟁, 거짓된 교지에 속아 인질로 잡힌 가솔들, 그로 인해 황실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제갈세가의 입장.
제갈후산의 머릿속으로 적당한 그림이 그려졌다.
제갈후산은 자리에 일어서서 매우 정중하게 읍을 했다.
“공식적으로 제갈세가는 산동성주의 교지를 따르겠습니다.”
“그리 알겠네.”
제갈후산은 다시금 정중히 읍을 했다.
“담 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를 표합니다. 다만 실제로도 현 제갈가는 피해복구의 시간이 필요한 때이니, 전쟁에 대한 지원은 기대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그 정도면 괜찮네.”
담하웅은 미소로 제갈후산을 달랬다.
제갈후산의 표정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이에 담하웅이 강하게 말했다.
“자네가 지금 우리 가문의 존폐를 염려하는 것은 아나 그리 무거워질 필요는 없다네. 우린 그리 약하지 않으니.”
담하웅의 기세에 제갈후산이 죄송함의 손사래를 쳤다.
“기 백 년을 이어온 담가의 폐망을 걱정하다니요. 결례를 범했습니다.”
제갈후산이 말을 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그 도장의 쓰임이 한정적인 부분이네요. 시간이 조금만 더 여유 있었다면 산동 전체의 민심을 이용해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전쟁은 병사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고 죽이는 행위 이외에도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는 민심이었다.
예로부터 가장 낮다고 여긴 백성들이 보급로를 끊고, 군량을 주지 않기 위해 힘겹게 기른 수확물을 불태워 버리고, 정보를 교란하고, 그로 인해 대군이 패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왔다.
그래서 제갈후산은 이러한 민심들을 잡을 수 있다면 담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조언을 에둘러 말한 것이었다.
이에 담하웅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여유에 제갈후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 무슨 방책을 마련하신 겁니까?”
담하웅은 자신의 동생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