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공술사-110화 (110/200)

기공술사 110화

어두움이 잠식한 숲속.

작은 모닥불이 비추고 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흑화의 인물들이 둘러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젠장!”

현곽이 씩씩거리며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건?!”

현곽은 발에 치이는 무언가를 대충 옆으로 밀어 찼다.

“왜 이렇게 화가 났소.”

흑화의 일원이 현곽의 발에 차여 굴러가는 시체를 보며 물었다.

비밀유지를 위해 죽인 약초꾼이었다.

은밀함을 위해 험한 살길만 골라 움직이던 흑화였다.

귀한 영초라도 캐보겠다고 험한 산속 깊이 들어왔던 약초꾼의 운명이 이들을 만남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현곽이 화를 내듯 말했다.

“개방에게 꼬리를 밟혔소.”

타닥거리는 모닥불만 바라보던 현성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뭐? 뒷정리나 좀 하라고 했더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현성의 핀잔에 현곽이 인상을 썼다.

“개방의 거지 한 놈이 어찌 알고 동굴까지 추적해 왔다오. 그리곤 실종된 화산파의 인원들에 대해 묻더군.”

“거지 한 놈? 그러면 죽였겠구만. 그럼 된 거지 뭘 그리 성을 내?”

개방 거지를 죽였을 것이라 확신하는 현성의 말에 현곽의 얼굴이 더욱 주름지게 더욱 일그러졌다.

“못 죽였소.”

태연한 현성의 자세가 멈칫했다.

“뭐?”

현곽이 불편한 듯 다시 말했다.

“못 죽였단 말이오. 그놈이 개방의 방주인지 어쩐 건지 취옥장을 들고 있었소. 그리고 그 영악한 놈이 동굴을 무너뜨리고 도주를 했소. 쫓으려 해도 동굴은 물론 진법 자체가 무너지는 터라 불가능했소.”

듣고 있던 현성의 표정이 굳었다.

현성은 조용히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대충 집어넣었다.

타다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흑화의 모두는 현성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현성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꽁꽁 싸맨 관을 보았다.

1차적인 대법에 성공한 청상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현성이 입을 열었다.

“꼬리를 자른다. 모두 흩어져서 흔적을 교란시켜. 혹여 추적하는 것들이 있거든 이유 불문 모두 죽여 버려. 추적인지 아닌지 애매해도 죽여라. 우리의 꿈이 코앞인데 여기서 방해를 받을 순 없다. 완벽하게 흔적이 끊겼다 싶을 때만 합류하도록.”

현성의 명에 흑화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세상이 극히 혼란스러웠다.

멈출 기미 없는 황실의 문란은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과도한 세금을 넘어 전쟁이라도 준비하는지 장정들을 강제 징용하기도 했다.

이에 백성들은 가문의 묘가 모셔진 터전을 떠나 스스로 피난민을 자처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음이었다.

그렇게 초근목피하며 간신히 삶의 끈을 붙잡고 있는 이들에게 대규모 실종사건과 대량학살들이 벌어졌다.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범인을 찾아줘야 하는, 범인을 찾을 능력이 되는 관과 무림은 그러할 정신이 없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을 어린아이도 인생의 기치로 깨달을 만큼 험한 시대가 돼버렸다.

그렇게 다시 한 번 홍건적과 개방의 세가 커져만 갔다.

두 세력에게는 호재였으나 그 이면엔 세상의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개방은 거대해진 세를 바탕으로 흑화에 대해서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했다.

천라지망을 펼치듯 온 중원에 개방도를 분배해 작은 흔적이라도 찾고자 노력을 했다.

하지만 흑화에 대한 추적은 실패로 끝이 났다.

개방도들이 무참히 죽어갔기 때문이다.

그 흔적도 너무나도 산발적이고 광범위해 제대로 인력을 집중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은 산동, 어느 날은 감숙, 어느 날은 호남에서 개방도들이 죽어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특히나 추적하고자 하는 적은 개개인이 절대고수임에 비해 대다수 개방도의 수준은 그렇지 못한 것이 더욱 컸다.

죽어가는 개방도의 수가 일 천을 훌쩍 넘어가자.

[개방은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내실을 다지리라.]

개방은 체계를 확고히 할 겸 암묵적 활동중지 명령을 내렸다.

흑화의 위험을 몸소 느낀 방덕을 필두로 오결 이상의 간부급들은 한데 모여 극한의 훈련을 받았다.

미래를 위해 아껴두던 개방의 영약, 취구환도 적극 공유해 간부들의 무공실력을 높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아래 직급들에겐 개방의 무공을 개방해 가능한 한 익히도록 했다.

수많은 피를 흘렸던 개방처럼 무림의 수많은 문파들도 피를 흘렸다.

암살, 실종, 오해, 비동의 이권 등 다양한 이해관계들이 끊어지지 않는 실타래처럼 얽히면서 그 골들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중소문파 중에는 이러한 다툼으로 인해 스러진 곳들이 많아졌다.

처절한 아귀다툼 속엔 오랜 역사나 전통 따윈 필요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힘이 있는지 없는지만 중요할 뿐이었다.

그 힘을 폭발적으로 보여준 곳은 하북팽가였다.

외유 중이던 소가주가 암살을 당해 죽자 하북팽가주는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평소 다혈질이던 그답게 소가주의 암살 전 동선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곳 모두에게 책임을 물었다.

또한 하북팽가의 정예들은 자신들의 거취인 북경에서 사파와 흑도들을 찾아다녔다.

팽가 정예들은 암살에 대한 조사와 함께 그들을 멸살시켰다.

북경에 지내는 터라 평소 황실 및 관과의 관계를 잘 유지했던 하북팽가는 부패한 관의 묵인을 통해 그 행동범위를 더욱 넓혔다.

그들은 북경을 넘어 하북 전체로 조사를 넓혔다.

그렇게 수천의 흑도와 사파문파들이 멸문했다.

그럼에도 하북팽가는 그들의 소가주를 죽인 범인을 찾진 못했다.

대신 팽가는 조사과정에서 멸문시킨 흑도, 사파의 막대한 비보들을 쓸어 모아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이는 소가주를 잃은 진주언가도 마찬가지였다.

하북에 적을 두고 있는 진주언가도 하북팽가의 조사에 적극 협조하며, 그 결과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다.

이렇듯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큰 출혈 없이 승자독식을 한 곳이 있는 반면 그러지 못한 곳도 있었다.

제갈세가와 남궁세가.

두 세가 간의 전쟁은 근래 정도문파 중 가장 많은 피가 흘린 전쟁으로 기록됐다.

최강의 방패 제갈세가와 최강의 검인 남궁세가의 전쟁은 총 2년이라는 긴 시간을 소모했다.

국가 간의 전쟁도 혹한의 추위 앞에선 잠시 멈추는 법이다.

제갈세가의 진법에 지지부진 파훼법을 찾지 못하던 남궁세가는 첫 해 겨울한파를 맞이했다.

수많은 화전민들의 영향인지 벌거숭이산이 된 주위 지형은 이듬 겨울의 혹한바람을 더욱 거세게 만든 듯했다.

이러한 거센 추위는 세가 내에서 머무르는 제갈세가보다 야전에서 공격을 감행하던 남궁세가에게 치명적이었다.

결국 남궁세가는 1차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둘 간의 전쟁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지지부진 했다고는 하지만 상당한 사상자가 나왔던 둘이다.

대화로 해결하기에는 지난한 설명이 필요해진 만큼 두 가문은 확실한 이득을 원하게 됐다.

이젠 각 가문 공자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유무와 징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됐다.

검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된다는 일념으로 안휘의 가문에서 정비를 한 남궁세가는 이듬해 다시 검을 들었다.

이번엔 산동의 제갈 본가가 아닌 안휘에 위치한 제갈분타들이었다.

남궁의 정예들이 노도와 같이 순식간에 몰아치며 제갈분타가 점유하고 있던 경제, 상권들을 모조리 가져왔다.

제갈세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산동의 관과 유지들을 끌어들여 산동에서의 남궁을 몰아냈다.

그렇게 각자의 이권을 챙기던 그들은 하남성이라는 하나의 전쟁터에서 또다시 싸우게 됐다.

하남성은 낙양 등 부유한 도시들이 있는 위치이자 무림맹 본타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하남은 지리적으로 북동엔 산동, 남동엔 안휘와 맞닿아 있었다.

이는 즉, 두 가문이 서쪽으로 향함에 있어서 가장 많은 경로가 하남을 통한다는 의미였다.

숭산의 소림이 내려다보는 하남에서 대대적인 전투는 못할지라도 두 문파는 치열하게 사상자를 만들며 하남에서의 이권다툼을 했다.

그렇게 1년이 더 흐른 후에야 두 가문의 전쟁은 끝이 났다.

보다 못한 소림방장이 중재를 나섰기 때문이다.

두 가문으로서도 자식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만, 충분한 이득을 얻었기에 못 이기는 척 물러났다.

두 가문의 다툼이 끝나자.

혼란을 만들던 세상의 갈등이 어찌저찌 자리를 잡거나 잊혀가면서 가짜 평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나름의 평화를 찾는 듯했다.

하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세상이 다시 격동했다.

이는 국소적으로 벌어졌던 무림세력 간의 다툼이 아니었다.

홍건적의 팽창을 더는 두고 보지 못한 황실이 군세를 일으켰다.

역적들을 참하고 국위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이었다.

그동안 이런 행보를 보이지 않던 황실이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 이유가 있었다.

무너진 장성을 넘어서 출몰하던 외적들을 잠재우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마교가 내몽고 전역으로 흩어진 혈교 잔당들을 최대한 흡수했다는 의미였으며, 그 과정에서 황실과 협력해 외적들을 처리, 흡수했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에 중원이 난리가 났다.

가장 큰 세를 이루던 주원장은 장사성과 진우량과 회합을 가지며 다가올 전쟁을 준비했다.

당연히 은연중 주원장을 지지하던 무림맹도 난리가 났다.

황실의 군세가 기치를 내건 것과 동시에 그간 숨죽이던 마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간 각종 이권다툼 등으로 공백이 컸던 무림맹이 제 역할을 하는 데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

세상의 혼란스러움과 별개로 의각원의 아침은 여느 때처럼 밝게 빛이 났다.

작은 초옥 방 안에서 천애랑은 탁자 위 놓인 서신을 보았다.

하오문주가 보낸 서신이었다.

서신은 두 개였다.

천애랑이 [一]이라고 적힌 첫 번째 서신을 펼쳤다.

[마교가 들불처럼 그 오랜 야망을 발출하기 시작했네. 서장은 물론 감숙의 북쪽이 순식간에 마교에 의해 점령되고 있네. 그로 인해 신강과 마주한 청해의 곤륜파가 큰 위험에 처해 있다네.]

“흐음.”

천애랑은 마교라는 단어를 덤덤하게 지켜보며 서신을 마저 읽었다.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불타고 있었다.

[그런고로 무림맹에선 급히 사천당가와 그곳의 정도문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바이네. 그네들도 무력단을 조직해 구원군을 보낸다고 하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들만으론 마교를 저지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네.]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읽어 내려갔다.

[자네가 당가와 각별한 사이이기에 그들을 당장이라도 돕고 싶어 할 것이라 짐작하네.]

“흠?”

뜬금없는 부분에서 끝난 서신에 잠시 움찔한 천애랑은 곧장 [二]라고 적힌 서신을 펼쳤다.

[곤륜파를 구하러 간 당가의 위험과 마찬가지로 산동 담가에도 큰 위험이 닥쳤다네.]

천애랑이 미간이 좁혀졌다.

[황실의 시선이 담가로 향했다는 첩보네. 병력을 모으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수가 족히 몇만은 될 것 같네. 담가의 장자가 황실의 주적인 주원장의 군사이지 않나. 홍건적을 치러 가는 길에 겸사 담가도 벌하려는 거라 짐작되네. 그대로 둔다면 홍건적과의 전쟁 중 후방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거라 판단한 것 같네.]

천애랑은 빠르게 서신을 읽어 내렸다.

[이에 담가는 가문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는 대신 결사항전을 외칠 것 같네. 담가주가 그간 이러한 사태를 대비했음인지 거대한 장원이 하나의 성처럼 되어 있더군.]

‘그나마 다행이군.’

천애랑은 조금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저 읽었다.

[하지만 내 짐작에 군세의 차이가 많이 날 것 같네. 그런고로 담가는 버티기만 할 뿐일 것 같아.]

‘흐음.’

천애랑은 표정을 굳히며 계속 읽었다.

[갑작스런 상황들에 하오문의 총력이 동원된 상태네. 그래서 별도로 사천당가나 산동담가를 지원할 여력이 못 되네. 그리고 자네도 잘 알다시피 하오문이 무력이 강한 것도 아니니 말일세.]

천애랑은 서신의 끝자락에 적혀있는 추신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지금의 정보들은 그간 열심히 투자한 전서응과 하오문도들을 통해 기민하게 접수한 것들이야. 이는 자네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직 시간이 있을 거라는 의미라네. 그럼,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건투를 비네.]

천애랑은 서신을 접고 잠시 눈을 감아 짧게 명상을 했다.

부동심을 얻기 위해 이곳에서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었다.

매우 짧은 시간의 명상을 끝낸 천애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뒷머리를 질끈 묵었다.

그간 길어진 머리카락이 옆으로 흘러내렸지만 대충 쓸어 넘겼다.

그는 곧이어 금빛 수실이 멋지게 수놓아진 흑색 비단 무복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천애랑은 담소연이 선물로 보내준 부채를 꺼내 들었다.

파지직!

천애랑이 천선(天扇)이라 이름 지은 부채가 기쁜 듯 천애랑의 기운에 곧장 반응했다.

천애랑은 이러한 귀보를 선물해준 담소연을 떠올리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곤 허공에 나지막하게 말했다.

“비조(飛鳥).”

그러자 초가 밖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예를 갖췄다.

천애랑을 호위하는 살막의 특급살수 중 하나였다.

천애랑은 비조에게 서신[一]을 건네며 말했다.

“살막주에게 전달해.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당가의 인원들을 지켜주도록. 난 산동담가로 향할 것이다.”

“존명.”

비조는 나타났을 때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애랑은 어둠 사이사이로 멀어져가는 비조를 일별하고선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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