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05화
담소연은 빠르게 촌락 밖, 진법의 입구에 대기 중인 병사들에게 합류했다.
모두 떠날 준비가 돼 있던 터라 별도의 시간을 소요할 이유가 없었다.
담소연의 등장과 함께 호위대장이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선발대가 기민하게 움직여 진법 밖의 상황을 살피곤 재차 돌아와 수신호를 보냈다.
일련의 과정이 매우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옛 송나라 때부터 이어져온 담가 사병들의 체계적인 훈련 결과였다.
담소연은 백호의 위에서 적색 패를 보았다.
그녀는 단검을 꺼내 패의 중심을 찔렀다.
쩍.
나무로 만들어진 패가 벌어지며 하나의 종이를 뱉어냈다.
담소연은 빠르게 종이를 펼쳤다.
‘황(皇)…….’
종이에 적힌 한 단어에 담소연의 표정이 굳었다.
담소연이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던졌다.
“육로로 갑니다.”
상황을 살핀 담소연이 간결하게 말했다.
그러자 기병들이 일사불란하게 호위방진으로 움직였다.
진법을 빠져나오자 붉은 석양이 일행들을 비추었다.
병사들은 곧장 막간산의 내리막을 내달렸다.
숙련된 기마술 앞에선 산악지형은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근 오백의 기병들이 달리기 시작하자 약초를 캐고 집으로 돌아가던 약초꾼들이 지진으로 착각해 몸을 사렸다.
담가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막간산을 벗어났다.
전신에 갑주를 입은 기병들이 갑자기 산에서 등장하자 인근 촌락의 사람들이 놀라 몸을 피했다.
심지어 거대한 백호까지 등장하자 산군이 나타났다며 사람들이 요란하게 기겁하는 소란이 일었다.
담소연과 병사들은 이런 상황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북쪽으로 내달렸다.
원래라면 막간산 남쪽에 위치한 항주로 가서 배를 구한 뒤, 동쪽 바다를 우회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하지만 오백이 넘는 기병들을 수용할 전함 수준의 배를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요즘처럼 수적과 해적들이 판을 치는 시기엔 돈만 가지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대신에 막간산에서 북쪽으로 직진하여 그대로 강소를 지나, 산동의 가문으로 갈 계획이었다.
기동력은 지치지 않는 준마들과 백호가 있기에 문제는 없었다.
다만 장강의 마지막 줄기가 강소성을 가로지르고 있어 잠깐 배를 타는 것은 불가피했다.
***
그렇게 한나절 만에 장강 하류의 진강에 담소연과 병사들이 도착했다.
진강, 이곳이 경로상 가장 짧게 장강을 건너기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강소성의 성도인 남경이나 배를 많이 만드는 장가항 등으로 향하지 않고 곧장 온 것이었다.
헌데 이곳에 도착하자 담가 일행들이 마주한 것은 참혹한 살육의 현장이었다.
마을 입구부터 그 안까지 그 수를 셀 수 없을 시신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중 몇몇은 끙끙거리며 간신히 생명의 불씨를 붙잡고 있었지만 곧 그 불씨가 스러져 가고 있었다.
“꺄아아악!”
마을 안쪽에서 사람들의 절규하는 비명들이 들려왔다.
담소연은 인상을 쓰며 명을 내렸다.
“병사들을 선별해 다친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그리고 우리는 마을로 들어갑니다.”
단호한 담소연의 명에 호위대장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담가의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져 다친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갑시다!”
백호가 시신들을 크게 뛰어넘으며 마을로 들어섰다.
호위대장과 그 병사들도 담소연을 호위하기 위해 빠르게 뒤따랐다.
무차별적으로 살육이 진행된 것인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 범인은 마을의 중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명?”
담소연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러한 대규모 살육을 벌일 정도라면 도적떼가 범인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봉두난발을 한 사내가 홀로 살육을 저지르고 있었다.
사내는 마구잡이로 풀어헤쳐 흩날리는 머리카락만큼이나 그 옷도 그저 걸쳤다는 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대충이었다.
“크르르.”
마을 사람들을 살육하던 사내의 시선이 담소연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백호를 보는 것이었다.
“크르르르륵.”
연신 이상한 소리를 내던 사내가 담소연에게로 신형을 날렸다.
“아가씨를 지켜라!”
“저자를 저지해라!”
호위대장과 백부장들이 크게 외치며 방진을 짰다.
몇은 사내의 속도를 저지하기 위해 앞으로 마주 달렸다.
호위대장은 말허리에 매어둔 창을 집어 들었다.
우우웅---
호위대장이 투창자세를 취하자 창끝에서 기가 서렸다.
그는 곧장 다가오는 사내에게로 창을 던졌다.
쒜에엑---!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날아간 창은 그대로 사내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내의 신형이 흔들거리더니 호위대장의 창을 피해냈다.
“흠?”
호위대장이 인상을 썼다.
단번에 제압할 생각으로 이 할의 공력을 담아 쏘아낸 공격이었다.
절정을 넘는 고수가 아닌 이상에야 저리 피할 수 없었다.
“흐핫!”
그때 앞서 나갔던 병사 하나가 빠르게 다가오는 사내에게로 검을 내질렀다.
절묘한 시점의 찌르기가 사내의 복부에 닿을 찰나.
사내가 검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그런 사내의 손이 뱀처럼 검을 휘감으며 밀어내더니 순식간에 병사의 목을 제압했다.
으드득!
그리고 병사의 신형이 힘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찰나 간의 상황이었다.
“흐아앗!”
사내와 지척에 있던 다른 병사들이 순식간에 검진을 짜며 검을 찔렀다.
“크르르.”
사내가 짐승같이 낮은 소리를 내며 몸을 흔들거렸다.
그러곤 좀 전처럼 손이 뱀처럼 흔들거리더니 병사들의 검을 모두 쳐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피해!”
위기감을 느낀 호위대장의 외침과 함께.
으득! 으드드득!
순식간에 병사들의 목이 돌아가며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젠장! 고수다! 방심하지 말고 방어에 우선해! 아가씨도 위험하니 뒤로 물러나십시오!”
호위대장은 다급한 외침과 함께 말의 등허리를 박찼다.
하늘을 내달리듯 경공을 펼친 호위대장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강한 발검으로 사내를 공격했다.
호위대장의 공격 시점과 맞춰 다른 백부장들이 투창을 했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만큼 절묘한 합공이었다.
그때 사내가 쓰러진 병사에게서 검을 쥐어 들더니 빠르게 휘둘렀다.
사내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서렸다.
까앙!
“흡?!”
호위대장은 강한 반탄력에 뒤로 물러나며 몸을 추슬렀다.
까가가강!
동시에 백부장들이 기를 담아 쏘아낸 창들도 사내의 검에 막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호위대장의 눈이 좁혀졌다.
사내가 펼치는 검식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무당……?’
담가에 소속된 무인이기 이전에 무공을 익힌 무림인 중 하나로써 산전수전 다양한 경험을 한 그였다.
자신의 검을 막은 사내의 검식이 마치 무당파의 태극과 매우 흡사했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호위대장은 병사들의 상태를 살피며 외쳤다.
“차륜전으로 몬다! 나머지는 민간인들을 대피시켜!”
명을 내린 호위대장이 검을 꽉 쥐었다.
이내 그의 검에 노도와 같은 황금빛 기운이 뻗어 나왔다.
예로부터 황금은 황실에게 허락된 색.
담가에서 특별한 이들에게만 내려지는 송나라 황실의 무공이다.
담가가 송나라에 헌신하면서 받은 봉록들 중엔 그 품위와 위계를 지킬 무공비급도 있었고, 그 결과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하아아아압!”
불안정하게 나풀거리던 호위대장의 기운이 서서히 응집되며 검에 머물렀다.
검강이었다.
“모두 비켜!”
호위대장은 전력을 다해 사내에게 검을 휘둘렀다.
차륜전에 어지러이 손을 놀리던 사내의 두 손이 잘려 나갔다.
‘됐다.’
호위대장은 사내를 제압했다 생각했다.
상대가 무당의 인물이든 아니든 두 팔을 잃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호위대장은 각혈을 하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무리하게 내공을 뽑아내서가 아니었다.
사내의 잘린 두 팔에서 검녹색의 독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퇴(退)! 무조건 물러나!”
호위대장의 다급한 외침이 무색하게 사내의 지척에 있던 병사들이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쓰러졌다.
호위대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담소연을 돌아볼 때.
“호야!”
담소연이 백호에서 뛰어 내림과 동시에 백호가 앞으로 뛰어왔다.
크하아아앙!
거대한 입을 벌리고 백호가 포효했다.
백호의 입에서 거대한 기운의 바람이 쏘아져 나왔다.
이에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독연이 태풍을 만난 듯 휩쓸려 날아갔다.
“아저씨! 괜찮아요?”
담소연이 호위대장에게 다가가 걱정스레 묻자 호위대장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담소연이 매우 오랜만에 직급이 아닌 개인적인 호칭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기에 그만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호위대장이 손을 저어 담소연의 접근을 말렸다.
“독이라 위험합니다. 아가씨.”
무언가 대답을 하려고 입을 뻥긋거리던 담소연은 백호의 움직임에 시선을 뺏겼다.
두 팔을 잃은 사내가 짐승처럼 백호를 물려고 했고, 백호는 그런 사내를 피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빠악!
사람 몸통만 한 백호의 앞발에 맞은 사내가 날아가 건물을 반파시켰다.
“크르르르!”
그러나 사내는 아무런 타격이나 고통이 없다는 듯 뛰어와 백호를 공격해왔다.
백호는 발톱을 땅에 깊이 박더니 그대로 들어 올려 사내에게 날렸다.
파박! 파바바박!
사내는 피할 생각 않고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며 돌파했다.
“크르륵!”
여전히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사내가 팔을 휘적거렸다.
이에 팔의 잘린 단면에서 독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왔다.
백호는 독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체를 세우더니 두 앞발로 사내를 후려쳤다.
그러곤 날아가는 사내에게 섬전처럼 따라가 재차 발로 휘둘러 쳤다.
빠각!
빠가아악!
뼈가 부러지다 못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음에도 사내는 계속 움직였다.
고통스런 신음을 뱉지도 않았다.
콰아앙!
백호가 마무리를 하듯 사내를 강하게 내려찍었다.
그제야 백호의 발밑에서 사내가 버둥거리며 제압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담가의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새삼 백호의 강한 무위를 느낌과 동시에, 이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내가 연신 움직인다는 것이 기이했다.
“……상황을 정리하죠. 아저씨는 몸을 추스르고 계세요.”
움직이려던 호위대장이 단호한 담소연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내색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의 내부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기를 뽑아내느라 몸 주위로 강한 기운이 머물지 않았거나 저 자에게서 거리가 벌어져 있지 않았다면…….’
고통스런 표정으로 죽음을 맞은 부하들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독이었다. 헌데 어찌 무당과 독이…….’
호위대장이 백호의 발아래 여전히 꿈틀거리는 사내를 보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호위대장이 담소연을 불렀다.
“아가씨.”
담소연은 병사들에게 위험한 사내의 죽음을 명하려던 찰나 호위대장의 부름에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예.”
호위대장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저자. 아무래도 무당파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로 강력한 독은 당가가 떠오르고요.”
“……흐음.”
담소연이 고민을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호위대장이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엔 저 사내를 포획해 무림맹에 넘기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