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01화
섬서성 서안의 외곽.
개천이 흐르는 굴다리 밑에 거대한 천막 하나와 이를 중심으로 작은 천막들이 무수히 퍼져 있다.
그리고 이곳을 수백의 거지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이러한 거지들의 행선지가 모여드는 곳은 거대한 천막이었다.
거대한 천막 안.
개방의 섬서 분타주인 추개는 부하들이 수시로 가져오는 보고서를 보며 인상을 썼다.
“분타주님!”
“놓고 가.”
연이은 보고에 지친 추개는 막사 안 구석을 향해 대충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곳엔 아직 읽지 못한 보고서들이 무수히 쌓여있었다.
그리고 추개의 옆엔 이미 펼쳐 본 보고서가 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실종사건이 너무 많은데…….”
그는 허리춤에 있는 6개의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최근 대대적으로 개편된 개방의 체제변화에 따라 새로 육결이 된 그였다.
그는 마음이 심란할 때면 이렇게 매듭을 만지는 습관이 있었다.
자신의 위로는 칠결 총타주와 팔결인 8명의 장로, 그리고 소방주와 방주 뿐밖에 없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성공에 대해 되뇌면서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곳 섬서에서만 민간인의 실종이 벌써 3만이 넘다니…….”
추개는 보고서들을 빠르게 넘겼다.
“추산되지 않는 실종자들과 다른 성도들의 실종자까지 합치면 수십만의 실종자가 예상 된다라…….”
추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아무리 환란의 시기라지만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황실의 문란이 심해지고 탐관오리들이 팽배한 지금이다.
살기 위해서 선조들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백성들이 우후죽순 많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피난민들의 종착지는 화전민 또는 어딘가의 일꾼이 되거나, 무기를 쥐어 잡고 홍건적의 병사가 되거나, 개방처럼 자신들을 받아주는 곳에 몸을 의탁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피난민들이 많아질수록 홍건적의 세력은 더욱 커져갔고, 마찬가지로 개방의 세도 매우 커져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개방이 대대적인 개편을 한 것이기도 했다.
그때 천막 문을 열고 꾀죄죄한 거지가 다급히 들어왔다.
“분타주님!”
추개는 거지의 다급함에 대수롭지 않게 손을 까닥였다.
보고서가 쌓여 있는 공간에 놓고 가라는 의미였다.
거지는 그러한 추개의 손짓에 고개를 저으며 빈손을 펼쳤다.
문서화가 된 보고가 아닌 구두로 전하는 급보의 의미였다.
그제야 추개가 거지에게 보다 또렷한 시선을 보냈다.
자세히 보니 화산파에 밀접한 화음현, 그곳의 지타주 밑에서 일하는 이였다.
구걸 실력이 일품이고 경공이 매우 빠르다는 추가정보가 추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거지가 말했다.
“화산파에서 급히 협조요청이 왔습니다.”
“화산파의 협조요청?”
추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섬서성에 위치한 화산파나 종남파 등 여러 문파들이 종종 개방에 협조요청을 해오긴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구두로 전할 정도로 급보인 경우는 그간 없었다.
거지가 급히 말했다.
“보안등급 최극. 환류삼검 청상 실종, 이를 찾아 나선 매환검 백진 장로 및 일대제자 셋 행방불명, 정보 출처 청공 도인, 그리고 흑화.”
추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보의 중요도를 분류하기 위해 나눈 등급 중 최극은 가장 높은 등급의 비밀을 요한다는 의미였다.
즉 화산파의 입장에선 대외에 절대 노출하기 싫은 문제의 의뢰를 한 것이었다.
만약 불필요하게 이 정보가 세어나간다면 화산파가 개방에 대해 분노를 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보고는 대체로 서면으로 하지 않고 이렇게 직접 구두로 전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야 혹시 모를 중간과정에서의 비밀유출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화음현 지타주의 의견은?”
추개의 물음에 거지가 곧바로 대답했다.
“난이도 극상, 상대 경지 화경 이상, 소방주님은 물론 방주님의 판단이 필요함으로 보임.”
추개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흑화가 뭔지 모르지만 현재 화산파에 발생한 사건의 심각성이 매우 중하다는 것쯤은 확실해졌다.
“기다려봐.”
추개는 쌓여 있는 보고의 산으로 갔다.
그러곤 거침없이 보고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독에 곁에서 지켜보던 거지가 놀란 눈을 했다.
수백 개에 달하는 보고서를 일각(15분) 만에 읽어낸 추개가 입을 열었다.
“지타주에게 돌아가라.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엉덩이를 무겁게 하라고 전해. 너 또한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각별히 입과 몸조심을 하고.”
“알겠습니다.”
거지가 추개에게 인사를 하고 천막에서 물러났다.
천막 안에 홀로 남은 추개는 주섬주섬 조금 전에 분류한 보고서들을 보따리에 챙겼다.
이번 사건과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거나 고민해볼 만한 것들을 추린 것이었다.
이대로 하북 천진 본타로 향해 방주와 소방주를 만날 생각이었다.
‘소방주님은 방주님에게 특훈을 받고 있다고 들었으니 두 분은 아마 함께 계실 것이다.’
추개가 천막 문을 젖히고 나가자 굴다리 너머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환란이 오려는가.’
추개는 혀를 차고선 분주히 움직이는 거지들을 불렀다.
“본타에 다녀올 것이다. 그간 보고는 적절히 지타주들에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거지들을 보며 추개가 늠름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내심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허리의 여섯 매듭을 매만졌다.
다시금 열심히 살아 승진한 보람을 느끼는 그다.
대충 상황을 정리한 추개는 팔을 휘적거리며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북쪽으로 멀어졌다.
* * *
하북성 천진.
황궁이 있는 북경의 동쪽에 마주한 큰 도시이다.
마적들이 산재한 내몽고 지역으로 크게 돌아갈 작정이 아닌 이상 상인들이 요녕성을 지나 고려와 무역을 하기 위해 필요한 대표적 길목.
게다가 천하 모든 소비품의 최대 소비자인 황실과 가깝기에 엄청난 물자가 오가는 곳이기도 했다.
당연 엄청난 유동인구가 존재했는데, 이는 세상 모든 정보를 모으는 개방의 본타가 위치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방덕아. 그만하자.”
개방의 방주인 취옥개가 자신의 민머리의 땀을 쓸어내며 말했다.
비취옥의 의미가 담긴 이름의 주인답게 그의 머리가 햇빛에 반짝였다.
외부 활동이 많아져 훈련시간이 부족한 제자를 위해서 최근 많은 힘을 쓰고 있는 그였다.
“어후. 알겠수다.”
방덕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훈련의 결과 때문인지 거지 같은 행색이 더 심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엔 개방의 신물인 타구봉이 있었다.
달리 취옥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처럼 타구봉은 벽록(녹색 빛의 푸른 옥돌)색을 띠고 있었다.
방덕은 그런 타구봉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타구봉의 매끈거리는 대가리가 마치 사부의 머리와 일치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거 이러다가 나도 사부처럼 머리 다 벗겨지는 거 아니요?”
딱!
“크윽!”
방덕은 갑작스런 통증에 머리를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그의 눈에 방주 취옥개의 흔들거리는 신형이 보였다.
지난 2년간의 고련으로 초절정 극에 든 자신이었다.
심지어 흐릿하게 화경의 벽이 보이기 시작하는 요즘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은밀한 공격을 먹이는 사부를 방덕은 괴물 보듯 보았다.
“거참 노인네. 그렇게 팔팔하면서 왜 그리 악을 쓰며 경지를 속이는 것이오.”
방덕의 말에 취옥개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네놈도 알면서 그러냐.”
취옥개의 말에 방덕이 혀를 찼다.
어찌 모르겠나.
강호의 명언인 ‘3할의 힘을 숨겨라’를.
다만 방덕의 눈에 사부는 5할의 힘을 숨긴 느낌이었다.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말로 작정하면 무림맹주나 소림방장과도 박치기 할 수 있으신 분이 과하게 그러니까 그러는 거 아니요.”
방덕이 볼멘소리를 하자 취옥개가 허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 나이 팔십이 넘었다.”
“그런데요?”
팟!
이번에는 취옥개의 손길을 방덕이 가까스로 피해냈다.
“어쭈 피해?”
“그럼 맞고만 있습니까?”
방덕이 타구봉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며 경계를 했다.
이에 취옥개가 피식 웃었다.
“여하튼 다시 말해 나는 장강의 앞 물결이라는 소리다. 언제 자연의 밥이 돼도 이상하지 않을.”
취옥개의 말에 방덕이 인상을 썼다.
“거 참. 굳이 표현을 해도 스스로를 밥이라고 할 게 뭡니까 밥이.”
취옥개가 버럭 소리를 쳤다.
“이놈아! 거지에게 가장 소중한 게 밥인데 뭘 새삼 그래?!”
방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 발 물러났다.
“알겠수다. 원 노인네. 성깔하고는.”
가볍게 혀를 찬 취옥개가 말을 이었다.
“다시 대화로 돌아와 나 같이 구 무림의 인사들은 장강의 뒷 물결이 잘 흐르도록 앞을 가로 막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간?”
방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겠는데요?”
“나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이제 물러나서 아랫것들 수발이나 받아야지 앞에서 설칠 나이는 아니란 의미다 이놈아.”
방덕은 취옥개가 말끝에 조용히 ‘무림맹주처럼 전면에 나대지 않고 말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대화의 요점이 벗어나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다.
“뭔 말인지 대충은 알겠는데, 그게 사부가 힘을 숨기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 그러는 겁니까?”
이에 취옥개가 방덕이 들고 있는 타구봉을 가리켰다.
취옥개의 손짓에 따라 시선이 오간 방덕이 더욱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취옥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개방의 신물을 왜 네놈에게 주었겠냐. 그리고 왜 개방의 대소사 대부분을 네놈에게 일임하겠어.”
선문답 같은 어투에 방덕이 조용히 미간을 좁히자 취옥개가 답을 했다.
“장강의 앞 물결은 언제든 사라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이야. 내가 없어도 개방이 흔들리지 않도록.”
“쩝.”
매일 티격태격 하지만 방덕의 어린 시절부터 부자지간처럼 40년을 지낸 탓에 그 정이 깊은 둘이었다.
방덕은 죽음을 논하는 사부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착잡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퉁명스런 표정을 지었다.
취옥개가 이어 말했다.
“조만간 세상에 환란이 올 것이다. 그럴 때 적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뭐일 것 같냐.”
방덕은 사부의 의도가 조금은 그려졌다.
“숨겨진 검…….”
취옥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제자가 똥 멍청이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원 말을 해도.”
방덕은 실소를 뱉었지만 표정은 심각해졌다.
숨겨진 검이라는 사부의 말속에 희생이라는 단어가 숨겨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헌데 거지가 너무 고고한 자세를 취하는 것 아니오?”
방덕의 말에 취옥개가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그렇지. 그래. 거지가 너무 뻣대는 것 같긴 하지. 그런데 어쩌나. 내 새끼들이 이렇게 많아지는데? 다들 냄새나는 것들이긴 한데 그래도 내 새끼들이지 않냐. 나 하나 희생해서 새끼들이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음 좋지 않겠냐.”
“거지답지 않게 무슨.”
방덕이 괜스레 투덜댔다.
이에 취옥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거지라는 삶이 얼마나 고단하더냐. 그리고 얼마나 그 사연들이 깊어.”
“그렇긴 하우.”
방덕이 순순히 수긍을 했다.
“앞으로는 네가 책임져야 할 이들이다.”
방덕이 혀를 찼다.
“츳. 그런 사부의 희생정신을 무림맹과 정도 무림에 설파 좀 해보시지 그러오. 요즘 꼴을 보면 아주 가관이던데.”
전국에서 발생하는 비동들의 이권다툼 때문에 정도무림이 꽤나 분열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언제 조용한 마교가 들불처럼 일어날지 모르는 지금 경계해야 한다고 주의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무림맹이 결성되고 마교가 겁을 먹은 것이라며 걱정할 필요 없다는 목소리들이 더 힘을 받는 추세였다.
취옥개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방덕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사부가 내 말이 맞다 하고 뭔 일이요.”
방덕의 장난기 어린 말에도 취옥개의 어두운 표정이 펴지지가 않았다.
이에 방덕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사부의 경지를 모르고 있는 마교 입장에선 추후에 당혹스러워할 것 같긴 하요. 게다가 항상 그래왔듯 무림의 위기 때마다 나타나는 은거고수들도 있으니.”
취옥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가 아직 마교를 잘 몰라서 그래.”
방덕이 눈을 좁혔다.
“내가 뭔 마교를 모른다 그럽니까.”
취옥개가 뒷짐을 지었다. 그의 깊은 두 눈이 무언가를 회상했다.
“50여 년 전 적진 깊숙이 작전을 수행했던 나는 분명히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