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공술사-93화 (93/200)

기공술사 93화

송소걸은 꿈을 꾸었다.

‘이곳은?’

송소걸의 눈에 매우 익숙한 연무장이 보였다.

여러 위장 건물들 속에 숨겨져 관계자가 아니면 찾을 수 없는 곳.

송소걸이 어린 시절을 훈련하고 보낸 곳이었다.

그곳엔 작은 여아와 잘생긴 중년인 있었다.

‘아버지? 그리고……, 나?’

“아빠. 이걸 왜 배워야 해요?”

작은 여아, 송소희가 고개를 들어 송강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손엔 작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단검술. 기억나네. 그나마 어린아이가 쥘만한 크기라고 처음 배운 무술이었는데.’

송소걸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아련하게 눈앞의 꿈을 관망했다.

간혹 사람들이 경험한다는 자각몽을 본인이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죽지 않으려면.”

어린 송소희의 질문에 송강은 다소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비의 차가운 표정에도 송소희는 기죽지 않고 그저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물었다.

“왜 죽는데요?”

송강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답했다.

“약하니까.”

“누가 죽이는데요?”

“세상.”

송강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당부하듯 말을 이었다.

“딸아. 세상이란 약하면 먹히는 곳이란다. 지금의 세상은 절대다수의 약자가 흘린 피로 강자가 호의호식하는 세상이지.”

어린 송소희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래서 아빠가 그런 약자들을 거두시는 건가요?”

송소희의 말에 송강이 움찔했다.

단호하게 딸을 훈육하려던 그의 표정이 기특함으로 물들었다.

“그래. 우리 하오문은 이런 약자들이 강자들의 논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지.”

“하지만 질 나쁜 아저씨들도 있잖아요.”

송강은 더는 엄격한 아버지의 가면을 유지하지 못하고 미소 지었다.

그러곤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지. 이 애비도 그것이 고민이란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생존이지 의협이 아니야.”

“흐음…….”

송강은 어린 딸을 보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른들이 하듯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송강은 딸이 아무리 영특하다고 한들 아직 이런 심오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이른 것 같다 생각했다.

짝!

그때 송소희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뼉을 치고선 말했다.

“아빠! 그러면 하오문을 무림 최강의 세력으로 만들어요. 세상이 쉽게 건들 수 없도록.”

송강은 딸의 말이 어린아이가 갖는 치기 어린 생각이라고 받아들였다.

“하하! 듣기엔 좋은 말이구나.”

어린 송소희가 허리에 앙증맞은 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이참! 농담 아니에요. 그러기 위해선 우선 저희 하오문이 양지로 나올 필요가 있어요.”

“양지로?”

“예.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요.”

송강은 진지하게 말을 하는 딸의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들었다.

“그래. 어디 너의 생각을 편히 말해 보거라.”

어린 송소희는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우선 약자들의 생존을 돕는다는 하오문의 존재와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송강은 흥이 난 듯 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어린 송소희 또한 아비가 자신의 말에 집중해주니 더욱 신이나 말했다.

“하오문의 존재를 많은 이들이 알 수 있도록 세상에 널리 알리세요. 대대적으로 공표를 하거나 할 필요는 없어 보여요. 대신 약자인 자들에게 실리를 쥐여 주세요.”

“어떻게 말이냐?”

어린 송소희가 검지를 치켜들며 당당하게 말했다.

“능력 유무에 따라 차별 있게 고용하세요.”

송강은 딸의 귀여운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능력 유무?”

“네. 고기를 잘 아는 자에겐 정육점을 차려주세요. 그리고 그자를 사장의 자리에 앉히세요.”

“모든 것을 제어하지 말고 투자만 하라는 소리더냐?”

어린 송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옷을 잘 다루는 이에겐 포목점을, 요리를 잘하는 이에겐 객잔을, 말을 잘 다루는 이에게 마점을, 계산에 능한 이들에겐 상단을, 가무가 능한 이들에겐 주루를 말이죠. 그 외에도 가진 바 능력에 따라 투자를 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더냐. 돈만 날릴 수 있는 것이 아니더냐.”

어린 송소희는 미소를 지었다.

“정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보?”

송강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하니 어린 딸의 얼굴을 보았다.

“정보……, 정보라…….”

송강은 딸의 말을 곱씹었다.

“어디든 있고 그 연결이 촘촘한 정보의 수집망.”

송강은 연무장 바닥에 발을 끌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생각 정리를 위한 행동이었다.

“약자인 그들은 생존의 방법을 얻고 그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우리에게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보를 가공해 필요한 이들에게 파는 것이지.”

송강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의, 식, 주는 선택이 아닌 필수일 터. 하늘에 사는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모든 정보는 아래에서 흐른다.”

송강은 솟아오르는 흥분감에 손바닥을 비볐다.

“세상에 버려진 그들에게 있어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우리를 배신할 대단한 이유도 없을 것이고. 그들에게 베푼 금전적인 부분은 초기만 넘기면 그리 큰 것이 아닐 터.”

송강은 연무장 구석 바닥을 보았다.

개미가 무당벌레로부터 진딧물을 보호하고 있었다.

“진딧물이 제공하는 감로를 개미가 받아먹는 대신 그를 지켜주듯 이러한 역할을 하오문이 하면 된다.”

한 마리였던 개미의 곁으로 다른 개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자 무당벌레는 더는 욕심을 부리지 못하고 날아 도망갔다.

“부족한 힘은 숫자로 메우고 필요에 따라 돈과 정보로 우군을 만들면 될 터.”

송강은 하늘을 올려봤다.

쾌청한 날씨 가운데 작고 흰 구름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구름은 마치 자신의 어린 딸을 연상시켜 귀엽게 느껴졌다.

“하하하하!”

송강이 하늘을 보며 크게 웃었다.

“복덩이가 여기 있었구나!”

송강이 어린 딸을 번쩍 들어올렸다.

“하오문의 미래가 여기 있었어!”

송강이 어린 송소희를 품에 안고 빙빙 돌았다.

“딸아. 원하는 것이 있느냐? 이 아비의 기분이 좋으니 모든 들어주마!”

어린 송소희가 아비의 기쁨에 함께 미소 지으며 답했다.

“훗날 약관이 되기 전 세상구경 한번 해보고 싶어요.”

송강이 멈칫하고선 딸을 바닥에 내려놨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딸이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한 지혜를 가졌음을 확인했으니 그 생각을 경시할 수가 없었다.

“세상구경? 갑자기 그것은 왜?”

어린 송소희가 기도하듯 고운 손을 꼭 맞잡았다.

“나관중이 편찬해 쓴 삼국지를 읽었어요. 저도 그 책 속에 나오는 유비형제들처럼 도원결의 같은 운명적 만남을 원해요.”

“도원결의?”

“예! 사나이의 우정! 얼마나 아름다워요.”

어린 송소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 딴에는 멋진 자세를 취했을 테지만 송강의 눈에 어린 딸의 몸짓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비록 딸이 사나이의 우정을 외치는 게 정상인가 싶었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용납되는 날이었다.

“그래. 그래. 때가 되면 우리 딸이 하고 싶은 대로 하자꾸나.”

송강은 해맑게 웃는 딸을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오래전 추억을 엿보듯 이 둘을 조용히 관망하던 송소걸의 눈앞이 돌연 흐릿해졌다.

송소걸은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 있었다.

‘여긴……?’

잊을 수 없는 운명적 만남의 장소였다.

붉은 단풍잎이 흩날리던 단풍나무 밑의 세 사람.

“캬! 저도 이런 우정을 나눌 기회가 생기네요. 단풍나무 아래서 한 결의이니 풍하결의라고 하는 게 어때요?”

“그거 좋다.”

송소걸은 밝게 웃는 천애랑의 미소가 반가워 소리쳤다.

왠지 매우 오랜만에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님! 아참, 이거 꿈이었지.’

공허한 외침 속에서 송소걸이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멋쩍으면 머리 긁는 거 애랑 형님이 자주 하던 건데.’

송소걸의 시선이 천애랑의 옆에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찬호에게로 향했다.

‘어? 이때 찬호 형님이 미소를 지었었구나.’

당시엔 몰랐던 장면이 새삼스레 인지됐다.

갑자기 세상이 점멸되며 주위가 또다시 바뀌었다.

송소걸은 좀 전처럼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추억여행을 하듯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했다.

‘거 참 애랑 형님 만두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만두를 한가득 입에 넣고서도 또 만두를 주문하는 천애랑의 모습을 보며 송소걸이 웃었다.

‘이때도 몰랐는데 찬호형님이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네?’

처음에는 정말 자신을 싫어하나 싶을 정도로 까칠하게 구는 찬호였기에 송소걸은 의외의 시선으로 찬호를 바라봤다.

‘찬호 형님도 애랑 형님만큼은 아니지만 잘생겼단 말이지.’

송소걸은 킥킥대며 웃었다.

‘현실에서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분명 찬호 형님이 욕했겠지?’

송소걸의 장난기 어린 웃음과 함께 장면이 바뀌었다.

‘어? 하하하하!’

송소걸은 눈앞에 보인 장면에 박장대소 웃었다.

적벽의 보물을 찾겠다며 의형제들끼리 갔다가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바퀴벌레처럼 유연하게 나아가는 천애랑과 개헤엄 치는 듯한 자신, 그리고 제일 뒤에서 지렁이처럼 누워서 바닥을 타는 찬호가 있었다.

‘당시엔 정말 생명의 위험까지 느껴지는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희극이네.’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셋이 바닥에 대자로 누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

당시엔 누워있어서 몰랐지만 찬호가 말은 툴툴거리면서도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때 또다시 장면이 빠르게 바뀌었다.

송소걸이 천애랑, 찬호와 만난 후 있었던 모든 여정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어릴 때부터 꿈에 그리던 운명적인 만남과 여행들.

그리고 그 속에서 얻었던 잊지 못할 행복한 감정들이 송소걸의 마음을 행복으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너무 행복하다.’

그리고 의아한 점이 있었다.

‘매번 티격태격 했던 찬호형님이라 몰랐는데…….’

찬호는 어투와 다르게 매번 자신을 따뜻하고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송소걸은 이번엔 어떤 행복한 장면이 나오려나 기대하며 기다렸다.

‘아. 이곳은.’

형제들을 끔찍이도 챙기던 천애랑과 그런 그의 심기를 건드려 일촉즉발이 된 주원장의 진형이었다.

이제 보니 이곳에서도 찬호는 은연히 자신을 지키듯 움직이고 있었다.

‘에이, 설마.’

송소걸의 작은 의문이 커지기 전, 장면이 바뀌었다.

‘아!’

송소걸은 당황했다.

자신이 천애랑의 품에서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천애랑이 찬호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왜 둘이 싸워?’

송소걸은 극심한 당혹감을 느꼈다.

평소 자신과 찬호가 티격태격 다투는 것은 자주 하나 천애랑은 의형제 누구와도 싸운 적이 없었다.

특히나 찬호와 천애랑 둘은 막역지우처럼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기에 송소걸의 눈에 둘의 다툼이 너무나도 생경했다.

그리고 송소걸은 천애랑이 저렇게까지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거대한 기운을 내뿜는 천애랑의 모습에 송소걸은 꿈인 걸 알면서도 몸을 떨었다.

그때 찬호의 몸에서 엄청난 마기와 함께 아수라의 형상이 비췄다.

‘마……교?’

송소걸의 놀람과 함께 주변이 깊은 어두움으로 빠져들었다.

앞서 장면이 빠르게 전환되던 것과는 다르게 어둠은 길게 이어졌다.

송소걸은 알 수 없는 당혹감 속에서 깊은 어둠을 표류했다.

‘찬호 형님이 왜?’

등을 돌려 마교 무인들과 물러나는 찬호의 눈에선 분명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송소걸은 잠시 혼란이라는 구름에 몸을 누여 시간과 공간감을 완전히 잊고 표류했다.

그때 갑자기 밝은 빛을 내는 동아줄이 눈앞에 나타났다.

송소걸은 멍하니 그 줄을 잡았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어딘가로 빠르게 딸려가듯 속도감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상황 속, 눈을 떴을 땐 익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좀 전의 꿈속처럼 분노하지 않고,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애랑이었다.

송소걸은 왠지 모르게 무거운 입을 힘겹게 열었다.

“형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