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90화
연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화란의 치료를 축하하는 연회 이후 오랜만의 연회였기에 의각원 모두는 간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연회의 주인공은 당연 천애랑이었다.
천애랑은 순배 돌듯 따라주는 의각원생들의 술을 기쁜 마음으로 모두 마셨다.
술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의각원생들은 한 목소리로 천애랑에게 이야기를 요청했다.
천애랑은 처음엔 멋쩍은 마음으로 사양을 했지만 간곡히 요청해오는 원생들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천애랑은 최대한 덤덤하게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의각원을 떠난 후 다시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할 이야기들도 많았다.
의각원을 오기 전 만난 산적들과의 인연, 그들을 구하려다가 생긴 광산전투.
특히 팽풍궐과의 대결을 이야기할 땐 모두들 숨을 죽이고 집중을 했다.
천애랑이 결국 쓰러지고 담가와 주원장으로 이어지는 만남에 대해선 모두 안타까움과 감탄을 뱉었다.
의형제와 관련되거나 사천당가처럼 비밀유지가 필요한 이야기는 딱히 하지 않았다.
다만 송소걸의 쓰러진 경위에 대해선 의각원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간단히 마교의 독에 의해서 쓰러졌다 이야기 했다.
그 후 영약을 구하기 위해 떠난 긴 여정들. 소림, 사천, 운남, 북해까지 이어지는 이야기가 끝나자 작은 정적이 흘렀다.
이내 몇몇은 슬픔에 눈물을 훌쩍였고 다른 이들은 감동의 박수를 쳤다.
천애랑의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들은 의각원생들은 금세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며 감상평들이 오고 갔다.
“흑흑, 가주님 진짜 고생 많으셨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오히려 소문이 과소평가된 느낌이네.”
“아니야 오히려 과대평가된 것 같은데? 소문으론 광산전투에서 용이 나타났다고 그랬는데? 천둥번개 치고 비 내리고 난리도 아니었대.”
“가주님이라면 가능하지. 화란 언니를 기적적으로 치료하셨는데 말이야.”
“아? 그건 또 그러네?”
“그래! 가주님이라면 다 가능하다니까?!”
“맞아!”
“소림사에서 진짜 큰일 날 뻔하셨네요.”
“남림에서가 더 큰일이었던 거 같은데?”
“아니, 북해빙궁이 더 큰일이었지.”
“와……. 그런데 가주님 은근 발이 넓으시네요. 소림방장도 알고 사천당가주도 알고 남림야수왕도 알고 북해빙궁주도 알고?”
“그러네? 우리 가주님 대단하다~.”
천애랑을 찬송하는 멋쩍은 대화들 속에서 천애랑이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천애랑은 연회 장소에서 빠져나와 의각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렇게 술기운을 조금 날려버리고 진법 안으로 들어갔다.
송소걸이 있는 건물 앞엔 화란이 벽에 기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의는?”
“아! 벌써 오셨어요?”
천애랑의 갑작스런 등장에 화란이 깜짝 놀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신의는 자고 있어요. 일찍 일어나서 송 소저에게 영약들을 먹여야 하거든요.”
“그렇군.”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 전 신의가 ‘난 환자를 보는 것 말고는 관심 없으니 신경 쓰지 말게.’라고 답했던 것이 떠올랐다.
다소 까칠한 구석이 있지만 의원으로선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화란 너도 지금이라도 연회에 참석하지 그래?”
“괜찮아요.”
“소걸이는 내가 보고 있을게. 무슨 일이 있으면 신의를 깨우면 될 일이고.”
화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송 소저가 다 나은 후 그때 편히 가주님이랑 연회를 즐길게요.”
“그래. 편하게 해. 그런데 소걸이 상태는 어때?”
“똑같아요.”
천애랑은 화란의 말을 듣고는 빠끔히 문을 열어 송소걸을 확인했다.
처음 봤을 때처럼 미동 없이 누워있었다.
소걸의 무탈함을 확인한 천애랑은 화란의 옆에 가서 나란히 벽에 기대었다. 그리고 하늘의 달을 보며 말했다.
“항상 고마워.”
천애랑의 표현에 화란이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뭐 특별히 한 게 있나요. 그저 옆을 좀 지켰을 뿐이죠.”
“치료는 신의들이 한다 해도 그 외적인 것은 화란이 다 한 거 아니야? 몸을 닦아 욕창을 예방한다든지 옷을 갈아입힌다든지?”
“그건 의원으로서 당연한 거예요.”
천애랑은 휘영청 떠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초승달도 보름달도 아닌 모양의 달이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에 오롯이 빛을 내고 있으니 어떤 영험한 힘이라도 갖고 있을 것 같았다.
천애랑은 염원을 담아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도 고마워. 고생 많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화란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달을 잡고 싶은 듯 손을 뻗은 천애랑을 보였다.
“가주님은 송 소저를 살리고 나면 무얼 하실 계획인가요?”
천애랑은 달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복수해야지. 소걸이를 이렇게 만든, 그리고 우리 가문을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그리고 새로운 가족들을 지켜야지.”
천애랑은 다짐과도 같은 말과 함께 그 염원을 쥐듯 달을 향한 손을 꽉 쥐었다.
화란은 천애랑의 옆얼굴을 보면서 분노하고 괴로워하는 감정을 읽었다.
화란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할게요.”
“...... 고마워.”
천애랑은 짧은 대답 후 눈을 감았다.
마음으로 잡은 달이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꽉 쥐어 말은 주먹을 가슴께로 당겨 붙였다.
천애랑은 계속 눈을 감은 채 얕은 술기운과 시원한 밤공기를 음미했다.
내일부터 시작될 모든 일정들에 축복이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 그의 어깨로 무언가가 살포시 기대어왔다.
곱게 빗은 화란의 머리였다. 그녀의 향기가 천애랑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천애랑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눈을 뜨자, 화란이 기댄 자세 그대로 천애랑의 소매를 살포시 당기며 말했다.
“잠시만요. 이렇게 있어요.”
화란은 짧은 시간 그렇게 천애랑의 어깨에 기대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눈 좀 붙이러 먼저 들어갈게요.”
흔들리는 달빛처럼 화란이 휘청거리며 빠르게 천애랑에게서 벗어났다.
그녀가 떠난 자리엔 천애랑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 그의 미래를 응원하는 마음 등이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맴돌고 있었다.
* * *
날이 밝자 의각원은 각자의 생활로 다시 돌아갔다.
천애랑은 어젯밤 자리 그대로 건물 앞에서 운기조식을 했다.
기가 가득 모인 진법 안이라서 그런지 운기조식만으로도 피로가 다 풀렸다. 오히려 힘이 더 넘치는 기분이었다.
천애랑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신의가 다가옴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네가 밤새 여길 지켰는가? 화란은 어디 가고?”
신의가 다가와 물었다.
“그렇게 됐소.”
천애랑은 흙 묻은 엉덩이를 가볍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의의 손에는 작은 그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혹 소걸이가 먹기 편하게 영약을 녹인 거요?”
천애랑의 질문에 신의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의는 송소걸의 입에 준비해 온 영약 물을 매우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천애랑은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다면 돕겠소.”
천애랑은 말과 함께 손바닥을 송소걸의 목에 가볍게 대었다.
그리고 매우 섬세하게 내기를 운용해 신의가 입에 넣는 영약 물을 인도했다.
천애랑이 돕자 순식간에 약을 먹이는 일이 끝났다.
“그거 참 편하구만.”
자의로 무언가를 삼킬 수 없는 환자이기에 매번 영약을 목구멍에 적시듯 밀어 넣던 신의였다.
“요령을 알려주오?”
진지하게 묻는 천애랑을 보며 신의는 고개를 저었다.
“됐네. 내 경지로도 그게 얼마나 지고한 수준인지 아네. 되도 않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난 항상 바쁘다네.”
신의는 환자가 다시 편히 쉴 수 있도록 밖으로 나섰다. 그 뒤를 따라 나온 천애랑이 재차 물었다.
“혹 기공가에 속할 생각이 있다면 내 신경 써서 지도해 주겠소.”
신의가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일 없네. 나는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야. 이곳엔 내 생전 경험하지 못한 환자가 있기에 내가 머무는 것뿐일세. 만약 치료가 다 끝난다면 다른 환자들을 찾아 떠나야지.”
“기공가에 속한다 하더라도 내 딱히 그대의 자유를 해치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오.”
대화 중에도 자기 할 일을 하던 신의가 손을 멈추고 천애랑과 시선을 마주했다.
“난 빚지는 것이 싫네. 그 기준은 오직 나의 마음에 달린 것이야. 자네가 말한 것처럼 만약 내가 기공가에 속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한들 나는 빚진 마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네.”
이에 천애랑이 재차 권유했다.
“그럼 소걸이의 치료를 도와준 대가로 나에게 보답을 요구하면 되지 않소? 나도 빚지는 것은 싫어하는데.”
신의가 피식 웃었다.
“이래 봬도 내 나이 칠십이 훌쩍 넘었다네. 내가 그 이후론 세 보진 않았으니 아마 실제 나이는 훨씬 많을 것이라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무슨 의민지 모르겠소만?”
천애랑이 갸웃했다.
신의가 손을 털며 말했다.
“내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말이네. 나도 작게 무공을 익히고 나름 무공을 많이 봐온 사람이야. 자네가 보여준 경지가 하루 이틀 될 일이던가? 못해도 몇 년에서 십수 년을 수련해야 터득할 방법일 터. 미치도록 욕심은 나지만 현실적인 생각을 안 할 순 없네.”
천애랑은 신의를 대단하게 쳐다봤다.
그저 탐욕 때문에 당가를 망치던 당가주나 그 외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멋진 신념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럼 내가 몸가짐을 바로 하는 동안 영약이라도 좀 드시오. 그래야 소걸이를 더 잘 보살필 수 있을 것 아니오.”
신의는 천애랑을 빤히 쳐다봤다.
의형제를 위하는 척하면서 본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는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야금야금 먹고 있다네.”
신의는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잘했소. 그럼 난 준비를 하러 갈 것이니 끝날 때까지 잘 부탁하오.”
“징그럽게도 챙기는군. 내가 환자를 앞에 두고 허투루 일할 일은 없다네. 환자를 걱정하는 건 돼도 내 태도일랑 걱정 말고 가게.”
천애랑은 피식 웃었다.
역시 까칠해 보여도 의술과 환자에 있어서는 참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다.
‘기공가의 식구가 돼 마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면 서로 말동무도 되고 덜 외롭고 좋을 텐데. 아쉽네.’
천애랑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답했다.
“알겠소.”
천애랑은 신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몸을 돌려 준비된 건물로 향했다.
* * *
며칠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신의들은 언제든지 천애랑이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진법 및 약재들을 꼼꼼히 점검했다.
천애랑은 그 기간 동안 일반적인 운기조식보다 더 깊은 심상의 단계를 통해 전신의 혈도와 세맥들 하나하나를 다 확인했다.
기공 4단계를 넘고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넓고 튼튼한 내공의 길들이 천애랑의 몸 안에 있었다.
모든 단전 간의 소통이 원활했고 임독양맥의 흐름 또한 더할 나위 없었다.
모든 것이 온전하고 완전하니 천애랑의 몸은 그저 대자연의 기가 머무르고 흘러가는 또 다른 하나의 우주가 되어있었다.
몸과 마음의 준비를 끝낸 천애랑은 눈을 뜨자마자 바로 신의들을 찾았다.
“시작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