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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89화 (89/200)

기공술사 89화

갑작스런 연회 준비에 의각원이 분주해졌다.

연회에 고기가 빠질 수 없어 천애랑이 직접 사냥을 나섰다.

깊은 산속에 은거하는 의각원이기에 마을과는 거리가 멀어 당장 필요한 것들을 사올 시간이 부족했다.

천애랑은 금방 인근의 멧돼지와 사슴, 토끼들을 잡아 돌아왔다.

이내 추나요법의 달인인 춘석이 고기들의 손질을 담당했다.

사냥감의 털들을 벗긴 춘석이 돌연 고기들을 주먹질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퍽! 퍽!

때아닌 주먹질에 천애랑이 의아해 하자 같이 구경하던 하춘이 설명했다.

“춘석의 말로는 저렇게 고기를 두들기면 육질이 연해진다 합니다. 야생 멧돼지는 특히나 고기가 질기니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한 걸 먹어봤어?”

천애랑의 질문에 하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예. 어찌나 맛있던지 상상만으로 침이 고이네요. 하하하!”

천애랑은 신기한 눈으로 춘석을 관찰했다.

아무렇게나 주먹질을 하는 것 같았지만 상당히 심오했다.

사후에 경직된 고기의 근육과 힘줄 결을 주먹질로 풀어주는 것이 보였다.

힘 조절도 매우 적당했다.

“너무 세게 때리면 고기 결이 다 터져서 구웠을 때 맛이 없대요. 식감이 살아있지 않다고 했던 거 같네요.”

하춘이 옆에서 설명을 이었다.

천애랑은 생각보다 전문적인 춘석의 고기 공부가 놀라웠다.

“이 정도면 직업을 잘못 선택한 거 아니야?”

고기에 대해 이 정도 진심이면 정육점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춘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의술 또한 뛰어나서 정육 장사를 하라고 놀리기엔 아깝더란 말이죠. 얼마 전엔 춘석 때문에 적성 마을이 난리가 났었습니다.”

“왜?”

하춘은 말을 하려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남성의 죽은 자존심도 살리는 명의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쫙~ 퍼졌었거든요.”

“어엉?”

천애랑이 뭔 소리냐고 묻자 하춘은 이 대화가 재밌는지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설동이를 기억하십니까? 가주님?”

설동이라면 천애랑이 적성에서 만난 의원이자 의각원의 인연을 이어준 인물이었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소중한 인연을 이어줬는데.”

이에 하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성에서 수련하는 설동이 잠시 의원(醫院)을 비울 일이 있어 춘석이 자리를 대신하러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천애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렇게 춘석이 추나요법으로 남성 환자 몇 명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마을에 난리가 난 거죠.”

천애랑은 황당하게 하춘을 쳐다봤다.

“과장이 심해도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하춘이 진지하게 손을 저었다.

“에이~ 가주님이 보셨어요?”

천애랑이 작게 고개를 흔들다가 인상을 썼다.

“그건 아니지……? 그런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크흠. 여하튼 다음 날부터 의원에 환자가 줄을 서게 된 겁니다. 설동이가 있을 때는 파리만 날리던 그 의원에 말이죠.”

천애랑은 정리가 하나도 안 된 당시의 의원(醫院) 상태가 떠올랐다. 누가 오긴 하나 싶던 곳이긴 했었다.

“또다시 춘석에게 추나요법을 받은 남성들이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환자들은 더 몰려들고 그렇게 된 거죠. 워낙 효과가 좋다보니 아낙들이 전면에 나섰고 곧 마을에서 춘석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됐습니다.”

“허어…….”

“그런데 그 때문에 춘석이 사라진 후 설동이 많은 곤욕을 치렀습니다.”

천애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많은 환자의 경험을 원했던 설동 입장에서 환자가 많아졌으면 좋은 게 아닌가 싶었다.

“왜?”

“다들 본인이 됐든 남편이 됐든 밤에 야수가 되게 만들어달라고 성화를 냈으니까요. 그런데 그건 춘석의 재주지 설동의 재주는 아니거든요.”

“아…….”

천애랑은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설동이 의원에 돌아가고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됐다.

“여하튼 설동은 한 것도 없이 능력 없는 의원으로 낙인찍혀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천애랑은 설동을 속으로 애도하며 춘석을 새삼스레 다시 봤다.

재주가 뛰어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인정받는 의원인 줄은 몰랐다.

퍽! 퍽!

춘석의 고기 다지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사슴이었다.

‘명의라고 떠받들어지는 모습과 저 모습이랑은 일치가 잘 안 되지만.’

천애랑은 가솔의 몰랐던 진면모를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당시엔 치료에 성공한 화란과 새로이 가주가 된 자신이 주인공이었기에 이런 세부적인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하춘 너는 따로 주특기가 있어?”

천애랑은 이 기회에 가솔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하춘은 천애랑이 막상 본인의 이야기를 물어오니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침을 잘 씁니다.”

“침?”

“네.”

하춘은 허리춤에 달아 놓은 간이 침통을 소리가 나게 찰랑거렸다.

천애랑은 하춘을 유심히 관찰했다. 일반적인 체형에 비해서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손목 좀 줘볼래?”

천애랑의 말에 하춘은 망설임 없이 손목을 내주었다.

그 모습에 천애랑이 피식 웃었다. 설동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래서 지금의 의각원과 인연이 이어진 거고.’

천애랑은 하춘의 손목을 잡고 가볍게 내기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천천히 하춘 내부를 관조했다.

‘화란에게 기공심법을 잘 배웠는지 꽤 정순한 내기가 쌓여있네. 세맥들도 잘 활성화가 되어 있고 말이지.’

잠깐 동안 하춘을 관찰한 천애랑은 그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말해 놓을 테니 당가로 유학을 다녀와.”

천애랑의 뜬금없는 말에 하춘이 놀란 눈을 했다.

“예? 사천당가 말입니까?”

“응. 당가에 가서 암기술을 배워봐.”

“연유가 있습니까?”

손목부터 뜬금없는 유학 이야기까지 조금은 저항할 만도 하지만 하춘은 절대적 신뢰와 냉철한 판단을 보이고 있었다.

천애랑은 미소를 지었다.

“우선 네 손가락 등의 신체 구조상 암기술을 배우기가 좋아. 내가 보니 암기술은 손가락으로 섬세한 내공운용을 많이 하더군. 침도 손가락의 감각이 중요한 것 아닌가?”

“맞습니다.”

“당가의 암기술이 일절이니 거기서 배우면 하춘 너의 침술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당가가 의술로도 꽤나 정평이 나 있기도 하고 말이지.”

천애랑의 말이 끝나자 하춘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침술과 의학지식을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뭐든 좋습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욕을 불태우는 하춘을 보며 천애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의각원의 모든 이들은 의술 발전에 미쳤다더니 딱 마음에 들었다.

저런 의지면 당가에서 어떤 고난이 펼쳐져도 잘 이겨내리라 생각했다.

천애랑은 이렇게 된 김에 다른 의각원생들도 살피러 갔다. 하춘에겐 할 거 없으면 춘석을 도우라고 보냈다.

때마침 추연, 추담 남매를 만났다. 둘은 모닥불을 피울 장작들을 마련하고 있었다.

천애랑은 장작 패는 것을 거들며 남매에게도 질문을 했다.

“주특기요? 흠. 저희는 약재를 잘 다룹니다.”

“맞아요. 덕분에 의각원 내에서 불을 제일 잘 피우죠.”

천애랑은 둘의 대답을 듣고는 수긍을 했다.

의각원에 있으면서 본 둘의 모습은 항상 탕약을 달이거나 약재를 다루고 있었다.

‘약재라……. 그건 멀리 갈 것도 없이 여기서 배우면 되겠네. 그리고.’

“심법이 경지에 오르면 불의 기운을 느끼는 것에 중점을 두면 좋겠군. 그러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 시간이 되면 내가 지도를 해주겠다.”

천애랑의 조언에 추연, 추담 남매는 미소를 지었다. 천애랑의 관심과 배려가 고마웠다.

그리고 둘이 생각하기에도 불을 다루는 게 능숙해지면 약재를 달이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천애랑은 감사인사를 하는 둘을 일별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의각원 입구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정례방문차 의각원에 오던 설동이 진법 입구에서 천애랑의 소식을 듣고는 전력으로 뛰어온 것이었다.

“설동?”

“아이고~ 공자님! 아! 아니지 가주님! 백두신룡 가주님!”

요란한 별호에 천애랑의 미간이 좁혀졌다. 들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됐다.

설동이 천애랑 앞까지 와서 참았던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후우우우------.”

고개를 숙이고 한참 숨을 토하던 설동은 간신히 호흡을 정리하고 나서야 천애랑과 눈을 마주했다.

설동은 천애랑을 보자마자 덥석 손을 잡았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우리의 인연이 가볍지 않음을 말이죠. 그리고 역시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네요. 물론 가주님이 되실 줄은 몰랐지만요? 으하하하하!”

천애랑은 실소가 나왔다. 뭔가 우왕좌왕 정신없는 것은 여전했다.

“오랜만이군.”

“아이고오~ 그럼요. 오랜만이고요. 신수가 훤하신 모습에 제 마음이 다 놓입니다.”

그간 환자들을 많이 상대해 봤는지 얼굴 표정이 잘도 움직이는 설동이었다.

“소식들은 다 전해 들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도울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 하십시오.”

“고맙다.”

천애랑은 미소를 지으며 설동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땐 미처 제대로 된 감사를 표할 기회가 없었지만 네 덕분에 이런 인연이 이어졌으니 네게 큰 은혜를 입었다.”

천애랑의 진심에 설동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가주님은 예나 지금이나 호감입니다.”

“너……, 혹시?”

천애랑이 손을 빼며 살짝 뒤로 물러나자 설동이 잠시 멍하니 있다 인상을 썼다.

“아, 아닙니다! 노총각한테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진짜 아닙니다!”

강력하게 부인하는 설동을 천애랑이 미소로 달랬다.

“농담이다. 반가워서.”

“흐휴…… 그럼 다행입니다. 제가 마을에서 남자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있어서 말이죠.”

천애랑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설동을 보았다. 그리고 충격 때문에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세상이 넓다 한들 그건 아니지 않나.”

설동도 천애랑의 말에 깊은 공감을 했다.

“지당하고 지당하고 또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제가 아무리 곱상하니 생겼고 어려보인다고 한들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죠.”

천애랑은 설동을 흘겨봤다.

분명 말의 중간에 뒤틀린 자기애가 있었던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넘어갔다.

연회 준비가 다 끝났다는 말과 함께 저물어가는 해가 자리의 이동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자. 가서 그간 못했던 이야기 차분하게 하자고.”

“네!”

천애랑과의 만남이 너무나 즐거운 설동은 뒤를 따르면서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천애랑과 설동은 연회가 준비된 너른 터에 금방 도착했다.

중앙에는 모닥불이 막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주위로 의각원 식구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도 불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춘석이 손질한 고기들이 잘 구워지고 있었다.

천애랑의 옆에 서있던 설동을 인지한 의각원생들이 반가운 인사들을 했다.

“설동이 왔냐?”

“설동이다!”

“설동이 형!”

“설동 오빠다!”

설동은 오랜만에 만난 의각원 식구들의 인사에 화답하기 위해 일일이 그들을 돌며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천애랑은 그 모습을 조금은 떨어져서 찬찬히 지켜봤다. 마충이 천애랑의 옆으로 다가왔다.

“눈이 웃고 있구나.”

천애랑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란 식구가 어딘가를 다녀오면 저렇게 반기는 거군요.”

“그렇지. 그게 가족이지 않겠느냐. 이젠 기공가로 이어진 가족.”

마충의 말에 천애랑이 작게 움찔거렸다.

천애랑은 그동안 이들 모두를 이미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충의 입을 통해 다시금 가족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새삼 낯설면서도 간지러운 충만함이 올라왔다.

“그렇죠. 가족.”

천애랑이 환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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